특집 1 | 장르문학과 한국문학

 

장르문학과 본격문학이라는 시빗거리

 

 

정영훈 鄭英勳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이 시대 아들들의 운명과 소설의 모험」 「윤리의 표정」 등이 있음. yhoon2@dreamwiz.com

 

 

1. 본격문학의 귀환, 그 징후적 성격

 

최근 들어‘본격문학 대 장르문학’이라는 대립구도를 종종 만나게 된다. 돌이켜보건대 우리 문학사에서 본격문학이니 순수문학이니 하는 말이 홀로 쓰인 경우는 거의 없다. 본격문학 혹은 순수문학은 그 반대편에 대중문학이나 통속문학 같은 것들이 놓여 있었을 때만, 그러니까 이들에 대한 대당(對當)개념으로만 쓰였던 것이고, 평소에는 그저 문학이었을 따름이다. 본격문학은 문학의 지붕 아래 얌전하게 공서(共棲)하던 대중·통속문학이 난데없이 자기 몫의 지분을 요구해올 때, 나는 그대들과 아무런 상관이 없노라고 금을 긋기 위해 스스로에게 붙인 이름이다. 그런만큼 본격문학이나 대중·통속문학은, 현상적으로 이런 부류에 속하는 문학이 있는 것과는 별개로, 규정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대중문학에 관한 많은 논의들이 개념적 정의의 실패로부터 사유를 시작하고 있는 것은‘본격문학’또는‘대중문학’이 내포하는 어떤 불가능성을 암시하고 있다. 특정한 작품을 예로 들어 본격문학적이거나 대중문학적인 속성을 부분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겠지만, 무수하게 흩어져 있는 작품들을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이라는 두가지 범주 안에 솜씨 좋게 가려넣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대중문학에 관한 논의들이 대개 대중문학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을 선별하는 데서 시작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합의된 바가 없기 때문에 대중문학이란 이런 것이라고 우선 합의해야 했던 것이다.1

그러니 본격문학의 귀환은 그 자체로 징후적이다. 문학이 놓인 삶의 자리에 대해, 문학의 존재방식에 대해 반성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본격문학 대 대중문학의 대립과 관련한 우리 문학사의 논쟁을 살펴보면 금방 드러나는 것처럼, 이 논쟁은 문학의 존재방식에 대한 질문을 내장하고 있다. 가령 1930년대의 통속소설에 관한 논의는 일제 군국주의의 팽창으로 대표되는 시대적인 흐름 속에서 성격과 환경의 부조화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를 그 배면에 깔고 있다. 통속소설은 성격과 환경의 부조화를 안이하게 해결해버리고 있거니와 이 점이 바로 통속소설이 대중적일 수 있는 조건이다. 이들은 시대가 요구하는 것에 가장 잘 반응함으로써, 가장 민감한 지점에서 본격문학 혹은 순수문학이 놓여 있는 장(場)의 조건을 건드린다. “시대가 요구하는”이라고 썼지만 이것은 역사적 전망에 따라 미래를 선취하는 것 같은 긍정적인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 문학을 정치권력의 보조적인 도구로 만들거나, 21세기식으로 하면, 일개 문화상품으로 전락시키려는 시도가 이 표현에 담겨 있다. 따라서 문학의 자율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문학이 자율적일 수 있기 위하여 맞서야 할 상대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를 가장 분명하게 알려주는 것이 바로 대중·통속문학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대중문학은 문학의 존재방식에 대한 바로미터, 그것도 가장 민감한 지점을 건드리는 성감대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조금 과장되게 말한다면, 대중문학이라는 타자와 대면하면서 본격문학이 자기상실을 경험한 적은 거의 없다. 대중문학과의 선명한 대비를 통해 본격문학은 자신에게는‘본격’이라는 이름을, 그리고 상대에게는‘대중’혹은‘통속’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서로간의 차이를 확인한 다음 재빨리 문학으로 회귀한다. 문학이라는 장의 내부에서 발견한 대중문학이라는 타자는 문학으로의 귀환을 위해 소모되었을 뿐, 본격문학이 대중문학을 위해 자기를 포기한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본격문학 대 장르문학’이라는 대립구도와 마주하면서 느끼는 물음거리란 이런 것이다. 장르문학이 본격문학의 맞은편에 놓이게 되었다는 것은 대중문학을 대신한 자리에 장르문학이 놓이게 되었음을 뜻할 것인데, 그렇다면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에 관한 논의들은 어떤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 이번에도 본격문학은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을까, 아니면 이번만큼은 장르문학이라는 타자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거나 아예 싸움에서 패해 자기 자리를 물려주게 될까. 아무래도 답하기에는 곤란하고 예측하기에는 어려운 물음이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니 일단 길을 떠나보아야겠다.

 

 

2. 지금, 본격문학과 장르문학의 구도

 

다시 한번 하는 이야기이지만 대중문학이 장르문학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여전히 반대편에는 본격문학이 있고 둘 사이의 위계도 그대로이니, 근본적인 구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인정하기 싫겠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다. 새삼스레 소설의 위기를 들먹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르문학의 상업적 성공에 대해서도 달리 언급할 것이 없다. 상업적 성공이라면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본격문학의 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최근 몇년 사이 문단 내부에서 보이는 장르문학에 대한 관심은 예사롭지 않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작년 하반기 이후의 작품들만 놓고 보아도, 박민규의 「크로만, 운」(『문학과사회』 2007년 가을호), 「」(『창작과비평』 2008년 봄호), 원종국의 「두 사람이 보이는 자화상-Mix-and-Match 4」(『문학과사회』 2007년 가을호), 윤이형의 「마지막 아이들의 도시」(『작가세계』 2007년 가을호), 「큰 늑대 파랑」(『창작과비평』 2007년 겨울호), 이명랑의 「2012년, 은하 스위트」(『문학사상』 2007년 9월호), 남한의 「갈라테아의 나라」(『문학수첩』 2007년 겨울호), 오현종의 「창백한 푸른 점」(『문학동네』 2007년 겨울호), 복거일의 「애

  1. 가령 이동하(李東夏)는‘한국의 대중소설에 대한 검토’라는 과제 앞에서 느낀 낭패감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 낭패감은, 쉽게 말하자면, 대중소설이라는 낱말을 과연 어떻게 규정지어야 할지 종잡을 수 없다는 사실에서 왔다. 도대체 대중소설이란 무엇인가?”(「한국 대중소설의 수준」, 『문학의 시대』 제2권, 풀빛 1984, 53면) 이어서 대중소설의 윤곽을 제시한 후 박완서의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이문열의 『레테의 연가』, 이청준의 『낮은 데로 임하소서』를 대상으로 정하여 논의를 시작한다. 이와 비슷한 방식으로 오생근(吳生根)의 「한국 대중문학의 전개」(『문학과지성』 1977년 가을호)에서는 박완서의 『휘청거리는 오후』, 최인호의 『도시의 사냥꾼』, 한수산의 『부초』를, 송승철(宋承哲)의 「대중과 대중소설」과 김태현(金泰賢)의 「위기의 시대와 상품소설」(『문학의 시대』 제2권)에서는 각각 박범신의 『풀잎처럼 눕다』와 최인호의 『적도의 꽃』 『고래사냥』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