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백낙청 외 『문명의 대전환을 공부하다』, 창비 2018

‘지혜의 등급’과 평등주의의 모순적 관계

 

 

고명섭 高明燮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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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담론 아카데미는 ‘한반도와 한국사회의 변혁과 문명적 전환을 위한 담론을 더 심도있게 연마하자는 취지로’ 마련된 공부모임이다. 『문명의 대전환을 공부하다: 이중과제론과 문명전환론』은 1기 모임의 결과물인 『변화의 시대를 공부하다』에 이어 두번째로 펴낸, 이 아카데미 2기 모임의 성과물이다. 여러 분야의 전문가·연구자가 한자리에 모여 발제하고 토론하고 결론을 끌어내는 과정이 다큐멘터리처럼 집약돼 있다.

이 모임의 공부 주제는 한마디로 말해 ‘백낙청 담론’이다. 참가자마다 백낙청 담론에 대한 이해 수준은 차이가 있지만 담론의 주창자인 백낙청 자신이 직접 참여해 공부 내용을 강평하고 보충하고 참가자들과 문답함으로써 토론이 흩어지는 것을 막고 논의를 집약해 공부모임에 값하는 결실을 이루어냈다. 특히 텍스트를 바르고 깊게 읽는 훈련은 이 모임의 두드러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백낙청 자신이 이런 말을 한다. “학문세계의 진지전에서 승리하려면 결국 학문적으로 더 우수해야 한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서 더 넓고 깊게 보면서 학적으로 더욱 엄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236면)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에 새겨둘 말이다.

백낙청 담론은 다양하게 펼쳐져 있어서 얼핏 보면 서로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논리적으로 구성된 학술서적으로 담론 전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상황 변화에 그때그때 개입하여 논문과 대담의 형식으로 담론을 제출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대나무가 각기 따로 서 있는 듯이 보여도 뿌리를 들여다보면 하나로 연결돼 있듯이, 백낙청 담론도 공통의 뿌리에서 자라나온 것이라고 봐야 한다. 문학론에서부터 체제론·변혁론·문명론을 거쳐 지혜론까지 내적인 일관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백낙청 담론이다. 참가자 백영서의 말대로 백낙청 담론의 바탕에는 “도식화할 수 없는 안 보이는 체계가 있다”(139면). 나아가 백영서는 “체계가 있어야 한다는 게 사상가의 중요한 요소”라면서 그런 점에서 보면 백낙청이 “우리나라에 드문 사상가 중 한 사람”(140면)이라고 말한다. 물론 체계를 갖추었다고 해서 모두 사상가라고 할 수는 없고, 깊고 넓은 체계로써 사유가 일이관지할 때 사상가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백낙청 담론은 백낙청 사상의 표현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공부의 주제 가운데 하나인 ‘이중과제론’은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를 가리킨다. 한편으로는 근대, 곧 ‘근대 자본주의체제’에 적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 근대를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이중과제다. 그런데 ‘적응하면서 극복한다’는 이중과제가 ‘형용모순’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참가자 중 한 사람도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데, 백낙청은 “감당하면서 동시에 극복하는 노력을 한다는 게 논리적으로 전혀 모순될 게 없”(7면)다고 답한다. 백낙청의 설명대로 ‘적응과 극복’은 형용모순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없다. 형용모순이란 ‘네모난 동그라미’처럼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모순을 말한다. 적응과 극복이 모순관계에 있는 것은 맞지만, 처음부터 불가능한 기획이 아님은 분명하다. ‘적응과 극복’은 다른 말로 하면 헤겔(G. Hegel)이 말한 ‘아우프헤붕’(Aufhebung)의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버리고 간직하고 끌어올리는 것’이야말로 변증법적 지양의 핵심 아닌가.

공부의 두번째 주제인 ‘문명전환론’은 이중과제론에 비해 논의가 명료하게 흘러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개벽론’에 초점을 맞추면 문명전환론의 얼개를 그려보는 데 어려움이 없다. 문명전환론이란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중과제를 수행함으로써 기존의 문명을 새로운 문명으로 바꾼다는 얘기다. 우리 근대사에서 이런 문명전환의 비전을 제시한 것이 바로 ‘후천개벽’ 사상이다. 동학(천도교)-증산교-원불교로 이어지는 민족종교가 19세기 말~ 20세기 초 서세동점의 시대에 제시한 비전이다. 백낙청은 이 세 종교 가운데 특히 원불교의 개벽론에 주목한다. 원불교의 개교이념인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야말로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를 요약하는 말임과 동시에 문명전환의 길을 앞서서 비춘 등불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이 백낙청의 ‘지혜의 등급’ 담론이다. ‘지혜의 위계’ 혹은 ‘지혜의 등급’이라 하면 민주주의·평등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사람들에겐 당장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그러나 백낙청은 민주주의·평등주의가 제대로 구현되려면 ‘지혜의 등급’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 평등주의 이념에 따라 지혜조차 모두 평등한 것으로 취급되면 “애물들이 설쳐대는 난장판”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것이 민주주의의 맹점이기도 하다. 고대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곧잘 중우정치·폭민정치로 전락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근대 민주주의도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파시즘이나 보나빠르띠슴(Bonapartisme)으로 떨어진 경우가 많았다. 만인평등을 원리로 삼는 원불교가 『정전』에서 지자본위·지우차별을 강조하는 것은 지혜에 등급이 있다는 것을 명확히 받아들여야만 평등주의가 온전히 실현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백낙청은 말한다. “우리가 지향하는 자유롭고 평등한 사회라는 것 (…) 결국 그것은 지혜로운 민중이 스스로를 다스리는 세상, 그런 의미에서 지혜가 다스리는 세상이 되어야 함은 명백합니다.”

지혜란 다른 것이 아니라 삶과 세계를 전체로서 통찰하는 것, 그리하여 삶과 세계가 나아갈 방향을 바르게 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삶과 세계가 얼마나 넓게, 얼마나 깊게 통찰되느냐가 지혜의 등급을 가르는 기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혜의 등급이 중요하다 해도 그 등급이 고정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백낙청도 지혜의 질서가 “역동적이고 가변적인”(329면) 것임을 강조한다. ‘지혜의 등급’ 담론은 실천과정에서 위험을 수반한다. 지혜의 등급을 앞세우다보면 평등주의와 민주주의가 위협받기 쉽기 때문이다. 반대로 민주주의와 평등주의를 강조하면, 지혜가 괄시당하는 ‘애물들의 세상’으로 떨어지기 쉽다. 지혜와 평등은 모순관계에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진실로 소중한 것을 얻으려면 이 모순 속에서 모순을 뚫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 모순이야말로 삶의 실상이자 삶의 비밀이다. 그 모순에 담긴 절실한 진실성을 포착하고 구현하는 것이야말로 지혜의 몫이다. 이 책을 낳은 창비담론 아카데미의 공부모임이 바로 그 지혜의 길 닦기를 모범적으로 보여준다. 지혜를 연마하는 이런 공부모임이 더 많아질수록 우리의 민주주의도 더 풍요롭고 성숙한 것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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