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문학, 정치, 민주주의

 

진실의 습격

민주주의와 문학 그리고 자본주의

 

 

강경석 姜敬錫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민족문학의 ‘정전 형성’과 3·1운동: 미당 퍼즐」 「우리들의 일그러진 ‘리버럴’: 비평이 하는 일에 관한 메모」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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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체의 역설

 

발단은 서정시였다. “시를 일인칭 독백의 형식으로 간주하거나, 시 장르가 자아와 세계의 동일시를 통해 구성된다는 가정”1을 토대로 수립된 서정시론은 2000년대 들어 ‘미래파’ 담론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고 당시 등장한 많은 시인들이 이 ‘새로운’ 물결에 호응했다. 미래파 기치의 최초 고안자였던 권혁웅은 이 사태를 “시는 더이상 일인칭 독백의 형식이 아니”2라는 말로 요약했는데 2000년대의 시적 유산에 대한 신형철의 관찰 또한 다르지 않았다. “2000년대의 어떤 시인들 덕분에 한국시는 ‘시인(일인칭)의 내면 고백으로서의 시’라는 일면적이면서도 지배적인 통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이제 시는 누구도 될 수 있고 무엇이건 말할 수 있다.”3 그런데 최근에 등장한 한 신예비평가는 2000년대 시 비평담론을 두고 “개개인의 자아가 젠더, 계급, 지역, 인종 등 다양한 위치성이 가로지르는 복합적인 장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면밀한 관찰 없이 자아는 그 자체로 해체되어야 마땅한 권능함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데 일조”함으로써 ‘자아의 해체’를 마치 “좀더 윤리적이거나 혹은 미적인 것”4처럼 호도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한다. 주목할 만한 견해다. 왜냐하면 미래파의 출현 이후 지금까지 진행된 시와 정치(또는 윤리), 페미니즘 ‘리부트’ 그리고 최근의 ‘일인칭의 역습’ 논의 등을 고려할 때 원칙적 수준에서 전제되는 자아의 해체는 자칫 다양한 소수자 ‘나’들의 목소리마저 일괄 배제해버릴 위험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 결론적으로 제시되는 새로운 자아의 면모 또한 의문을 낳기는 마찬가지인 듯하다. “정체성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며 관계 속에서 구축되고 허물어지고 새롭게 그려질 수 있는, 일종의 지도와 같은 것”5이라는 인식 아래 여성, 동물, 기계의 자리를 ‘새로이’ 마련하는 것과 “발언권을 거의 가져본 적이 없는 존재들이 입을 열었다는 사실, 그것이 중요하다”6는 이전 비평담론의 강조 사이에는 보기보다 차이가 거의 없는 듯하기 때문이다. “폭력의 구조 안에서 여성은 자신을 재현할 언어를 갖지 못하는 위치에 자리하기도 한다”7는 있는 그대로 타당한 예시와 “요컨대 대의불충분성과 대의불가능성, 이것이 2000년대의 한국의 정치적 조건이고 바로 그 무렵에 2000년대 시들이 쓰이고 읽히기 시작했다”8는 ‘포착’ 사이에서도 본질적 거리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는 탈서정에서 여성으로, 퀴어로, 동물로, 기계로 강세의 위치를 조금씩 옮겨왔을 뿐 끊임없이 다른 듯 같은 얘기를 반복하고 있는 게 아닐까.

미래파의 탈서정이 서정의 지속적인 부활 없이 자립할 수 없고 이른바 포스트휴먼의 동물, 사이보그 또한 인간 중심주의의 반복적 재생 없이는 정치적으로 의미화되기 어려운 것처럼 ‘나’라는 의제의 과도한 중심성은 그에 대한 해체주의적 열정이 낳은 역설에 의해 오히려 불식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니 ‘나’의 ‘정체’나 ‘위치’보다 그 존재 조건들로 물음의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들이 크게 보아 ‘문학과 정치’라는 범주에 속해 있는 만큼 그 조건들 중에서도 민주주의가 우선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오늘날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갈수록 빈틈없이 규정해오고 있는 자본주의라는 계기와의 관련 속에서일 것이다. 당연히 문제는 시에 한정되지 않는다.

 

 

2. 자아의 민주화: 이장욱의 소설론과 「복화술사」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장욱의 산문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9(이하 「그러나」)는 일종의 소설창작론이다. 그 자신이 미래파 관련 논의에 참여했던 비평가이기도 했기에10 더욱 주목되는 측면이 있는데 그는 우선 “인간은 어떤 경우에도 1인칭을 벗어날 수 없지만 동시에 무수한 1인칭들의 교차와 충돌과 이합집산에서도 역시 벗어날 수 없다”(173면)고 선언한 다음, 한걸음 더 나아간다.

 

진실은 발언되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 시선 사이에서 마치 에피파니처럼 자신을 힐끗, 보여주는 것이라고 배웠다. 이 경우 진실은 아름답거나 올바르거나 매력적인 문장으로 재현되지 않으며 대표되지도 않는다. 진실은 언제나 1인칭으로 재현 가능한 세계 너머에서, 건조하고 잔인하며 아름다운 방식으로 우리를 습격한다.(174면)

 

‘진실’이라는 의제가 추가되었거니와 이것이 단순한 일인칭 부정론 또는 그와 연동하는 재현 부정론과 차별된다는 점은 분명히 감지된다. 진실이 “이질적 시선 사이에서” 문득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말은 진실이 서로 다른 “재현”과 “대표”들의 “교차와 충돌과 이합집산” 가운데서야 ‘비로소’ 드러난다는 뜻일 것이다. ‘진실을 재현한다’는 것과 ‘재현을 통해서 또는 재현 가운데 진실이 드러난다’는 것은 명백히 다른 차원이다. 전자가 동일성의 원리라면 후자는 매개의 원리이기 때문인데 그는 “재현”과 “대표”라는 두 낱말을 은근히 겹쳐 씀으로써 자신의 창작론을 민주주의의 문제로 확장한다. 알다시피 두 낱말은 모두 ‘리프리젠테이션’(representation)의 역어이며 동시에 정치적 대의(代議)를 의미한다. 글의 시작과 끝에 작가 자신이 실제로 체험한 “소규모 공동주택에서 벌어진 이웃 간의 소송전”(178면, 이하 같은 면에서 인용)을 예화로 배치한 것 또한 이와 긴밀히 호응한다. 그 경험을 통해 그가 오늘날 소설 쓰기의 의미에 대해 새삼 성찰하지 않을 수 없었던 본질적 의문은 그러니까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오늘날의 ‘공동’은 ‘코뮨’이 아니고 ‘커뮤니티’도 아니고 심지어 ‘커먼’도 아닌 것 같다. 이제 우리의 ‘공동’은 진영 논리와 확증편향과 적대적 공존의 재생산 속에서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때 인문학에서 회자되었던 ‘공통체’나 ‘다중’은 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우리는 공동생활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합당한 결론으로 사태의 윤리적 봉합을 서두르지만 우리는 여기서 질문을 더 밀고 나가보기로 한다. 진실의 드러남을 가로막고 은폐하는 “진영 논리와 확증편향과 적대적 공존의 재생산”의 근거지 또한 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일인칭’이고 그에 기초한 ‘민주주의’이되 우리가 그것을 벗어날 수도 없는 운명이라면 도대체 그것은 어떤 ‘일인칭’이고 ‘민주주의’인가.

종종 거론되듯 정체성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어서 얼마든지 재구성할 수 있다면 이때의 일인칭 ‘나’는 늘 단수가 아니라 복수다. 그렇다면 ‘나’의 내부에 거주하거나 그곳을 드나드는

  1. 권혁웅 『시론』, 문학동네 2010, 23면.
  2. 같은 책 24면.
  3. 신형철 「2000년대 시의 유산과 그 상속자들: 2010년대의 시를 읽는 하나의 시각」, 『창작과비평』 2013년 봄호 365면.
  4. 김보경 「인간의 가장자리로 걷기: 여성, 동물, 기계」, 『문학과사회』 2020년 여름호 420~21면. 시에서 ‘나’의 문제를 둘러싼 최근 논의의 흐름을 개관해주는 글로는 조대한 「‘나’의 응답: 2000년대 시를 경유한 1인칭의 진폭」, 『자음과모음』 2021년 봄호를 참조.
  5. 김보경, 같은 글 441면.
  6. 신형철, 같은 글 368면.
  7. 김보경, 같은 글 426면.
  8. 신형철, 같은 글 374면.
  9. 『문학과사회 하이픈』 2019년 겨울호.
  10. 이장욱 「꽃들은 세상을 버리고: 풍자가 아니라 자살이다」, 『나의 우울한 모던 보이』, 창비 2005 참조. 이 글의 핵심은 “요컨대 문제는, 서정 자체가 아니라 서정의 ‘권위’이다”(38면)라는 문장에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