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편혜영 片惠英

1972년 서울 출생.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아오이가든』 『사육장 쪽으로』 『저녁의 구애』 『밤이 지나간다』, 장편소설 『재와 빨강』 『서쪽 숲에 갔다』 『선의 법칙』 『홀』 등이 있음. fragmenta@naver.com

 

 

 

후견

 

 

입양기관 담당자를 만난 후 정소명은 아버지 정호인에게 곧 그 사실을 알렸다. 어차피 알게 되리라 생각해서였다. 수학교사로 교직을 시작한 정호인은 일찌감치 재단과 관계를 맺고 비교적 이른 나이에 M읍에서 유일한 고등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재임 중 전형적이고 권위적이라는 평판이 있었으나 퇴임 후에도 여전히 교장으로 불렸다.

해괴한 일이다. 정호인이 불쾌해하며 말했다. 방법을 찾아볼 테니 일단 내려오라고 했다. 다음날 정소명이 집에 도착했을 때 정호인은 클럽 회원들과 함께 있었다. 읍내 병원장, 농약사 사장, 현직 도의원이었다. 모르는 얼굴이 있었는데, 변호사라고 했다. 그들은 이 지역 R클럽 회원으로 어떤 안건이건 함께 의논해서 결정했다. 비밀을 훤히 알고 있는 사이라는 뜻이었다. 모여 있을 때면 특별한 의제 없이 입을 놀렸지만 방문객이 끼어들면 일시에 입을 다물어버림으로써 일반적인 수준의 대화를 의미심장한 것으로 만들었다. 정소명으로서는 내키지 않는 인사를 한번에 끝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정호인과 어울리는 클럽 회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면 이 마을에서 해야 할 일은 얼추 끝나는 셈이었다.

“정기자, 오느라 고생했네. 최원장은 잘 있고?”

정소명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호인은 딸이 의약잡지 기자로 단 6개월 근무했고 결혼 후 어떤 경력도 쌓지 않았다는 걸 잘 알았다. 이혼소송 중인 사위를 여전히 최원장이라 불렀고, 사위 얘기가 나오자 놓치지 않고 병원 규모를 떠벌렸다. 클럽 회원들은 이 화제가 빨리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표정으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걱정 말게. 잘될 걸세.”

정호인의 얘기가 끝나자 병원장이 정소명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 일에 대해 이미 얘기를 나눈 것 같았다. 질문이 이어지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다였다.

병원장이 다시 시작하라는 듯 고갯짓을 하자 변호사가 입을 열었다. 가장 좋은 건 이웃에게 알려지게 하는 겁니다. 계고장을 붙여두세요. 대문 앞에서 연체 금액을 크게 말씀하셔도 되고요. 다른 말씀은 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 말에 정호인이 허허 웃으며 대꾸했다. 부끄러워봐야 인간이 되는구만.

정호인은 클럽 회원들과 조합 형식으로 기금을 마련해 처지가 어려운 농민들에게 자금을 대출해주는 사업을 벌였다. 의도와 달리 고금리인 탓에 사채와 다름없다는 비난을 받았고 연체율이 높아 자금 회수와 운용이 수월치 않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정호인은 자주 발끈했고 내가 누군지 아느냐고 소리쳤고 마을 사람들 얘기를 할 때면 은혜도 모르는 놈이라는 표현을 썼다. 추심에 관해 변호사의 조언이 필요한 걸 보니 대출에 문제가 생겼거나 누적 연체액이 심상치 않은 것 같았다. 앞으로는 소액의 연체라도 인정사정 봐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정소명이 학생 시절 지내던 방은 지금은 손님방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쓰던 가구도 남아 있지 않고 청소해주는 아주머니의 뜻대로 정리된 방이라 이제는 제 방 같은 느낌이 전혀 없었다. 책상 위에 커다란 상자가 놓여 있었는데, 정소명의 학생 때 물건이 담겨 있었다. 정호인이 정소명의 상장을 죄다 벽에 걸어두었다가, 정소명이 질색하자 거기에 담아둔 것이었다. 어쩌다 이 방에 묵는 사람에게라도 자랑거리로 삼으려는 게 분명했다. 상자를 내다버리려면 일단 차에 가져다두어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정호인이 방으로 불쑥 들어왔다.

“그 아이를 돕기로 했다.”

“어떻게요?”

“우리 클럽 하는 일이 본래 그런 거 아니냐. 봉사, 희생, 헌신…… 사정 얘기를 하니 다들 딱하다더라. 당연히 도와야 한다고.”

“누가 딱하다는 거예요?”

“어허, 누구겠냐. 네가 친모인 줄 알고 멀리서 찾아왔다는 그 말도 안 되는 입양아지. 기관하고 합심해서 진짜 친모를 찾아줄 생각이야. 클럽이 나서면 결국 마을 사람들이 다 나서게 되어 있어. 오래전 일이지만 동네일이라면 누구 집에 숟가락이 몇갠지도 다 아는 사람들 아니냐. 아무리 꽁꽁 숨겨도 다음날이면 소문이 나는 게 이 동네다. 남의 이름으로 애 낳고 도망간 여자 하나쯤은 금세 찾을 수 있을 거야.”

정호인은 약속을 잡아놨으니 면사무소 앞 까페 주인을 만나보라고 일렀다. 아무래도 정소명 또래가 저지른 일일 테니 동기 사정에 밝은 사람에게 얘기를 들어보라는 것이었다. 까페 주인이 정소명과 동창이라고 했다.

“읍내 쏘다니던 흔한 날라리 중 하나일 게다. 걔들은 나한테 인사 한번 하는 법 없었다. 지들이 누구 덕에 사람 구실 하는 줄도 모르고 감히 네 이름을…… 은혜도 모르는 놈들.”

정호인이 누구에게인지 알 수 없는 욕을 내뱉고 다시 거실로 나갔다.

이현숙이라는 입양기관 담당자는 불쑥 전화를 걸어와서는 시간을 내달라고 했다. 간곡한 투였다. 예전에도 정소명은 종종 모르는 여자에게 그런 전화를 받았다. 전화로 용건을 말하는 경우도 있고 무조건 만나자는 경우도 있었다. 만나면 남편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얘기하면서 울음을 터뜨리는 여자도 있고 정소명을 사납게 몰아세우는 여자도 있었다. 이현숙 역시 그런 부류 중 하나라면 만나두는 게 소송에 유리할 터였다.

이현숙은 맡은 업무를 설명하고는 사진을 한장 내밀었다. 꽃무늬 블라우스를 입은 여자가 눈이 크고 머리숱 적은 아기를 안고 있는 사진이었다. 정소명 표정을 살피더니 사진을 한장 더 내밀었다. 여자 사진이었다. 작고 까만 얼굴에 흑단같이 검은 머리를 늘어뜨리고 명랑하게 웃고 있었다. 어려 보였다. 갓 스무살이나 되었을까.

“사라라고 해요. 이쁘죠?”

딱히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아서 정소명은 잠자코 있었다. 사라가 너무 어려 보여서 남편과 관계된 사람이라면 역시 꽃무늬 블라우스 쪽일까 싶었다. 짐작 가는 바가 없어서 기분이 나빠졌다. 기습적으로 벌어지는 일치고 좋은 일이 없었다.

“이 아이가 이렇게 자란 거예요.”

순서대로 두장의 사진을 가리키는 이현숙의 말에 자랑스러워하는 투가 묻어 있었다. 정소명은 금세 불쾌해졌는데, 그 말의 의도를 산발적으로 추측하느라 기운이 빠져서였다. 사진 속 여자가 남편의 딸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르는 여자에게 이런 식으로 남편의 얘기를 들어왔다. 가급적 휘말리지 않으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이분은 위탁모예요.” 이현숙이 꽃무늬 블라우스를 가리켰다. “사라는 백일 무렵에 네덜란드로 입양됐어요.”

이번에는 서류를 내밀었다. 병원 기록과 입양동의서였다. 복사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래도 서류에 기재된 산모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는 똑똑히 보였다. 주소란에 적힌 집 주소도 선명했다. 정소명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아버지 집 주소가 적혀 있었다.

남편이 누군가를 시켜 일을 꾸몄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남편은 결혼 후 한푼도 벌어오지 않은 정소명에게 재산을 나눠주고 위자료까지 물어야 한다는 사실에 분개했다. 한동안 재산 명의를 돌리는 일에 몰두하는 것 같더니 소송이 시작되자 정소명의 흠을 찾으려고 여러모로 시간을 끌었다. 남편 짓이 아니더라도 그가 알게 된다면 이 일을 악의적으로 이용하려 들 것이다. 남편은 언제나 이런 일을 추궁해왔고 있으리라 짐작해서 화를 냈고 벌어진 일처럼 굴었다.

“많이 컸죠? 지금 한국에 와 있어요. 친엄마를 만나고 싶어해요.”

이현숙이 말한 ‘친엄마’가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정소명은 고개를 저었다.

“전 아닙니다. 아이를 낳은 적 없습니다.”

이현숙이 당연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런 일을 자주 경험한 것 같았다. 제 자식이 아니라고 부인하거나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이는 일 말이다.

“당연히 그러실 겁니다. 사정이 있으시겠죠.”

정소명은 당황해서 사람을 잘못 찾아왔다고 되풀이해 말했다. 이현숙은 잡아떼봐야 소용없다는 듯 가만히 서류를 내려다보았고 정소명도 뒤늦게 그것을 의식했다.

“제 글씨가 아니에요.”

“알아요. 어머니가 걱정하시는 게 뭔지 다 알아요.”

이현숙이 테이블 위에 놓인 정소명의 손을 살짝 잡았다 놓았다. 뭘 안다는 걸까. 정소명이 아는 건 자신이 낳은 아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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