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제13회 창비신인소설상 수상작

최민석 崔民錫
1977년 경북 포항 출생.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업. searacer@naver.com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
내 이름은 ‘유리스탄 스타코프스키 아르바이잔 스타노크라스카 제인바라이샤 코탄스 초이아노프스키’다. 줄여서 ‘초이아노프스키’라 부르기도 하고, ‘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름이 꽤나 긴 탓에 태어나서 내 이름이 정식으로 불린 것은 딱 두번뿐이다. 한번은 출생신고를 할 때였고, 다른 한번은 초등학교 입학식 때였다. 중학교 때부터는 선생님들도 ‘유리스탄 스타코프스키 아르바이잔…’까지 읽다가 그냥 초이아노프스키로 불렀다.
이름 때문에 가장 가슴 아팠던 기억은 바라바라스키와의 일이었다. 바라바라스키는 7년을 사귄 여자친구였다. 그녀는 키르기스스탄에서 가장 유명한 이스쿨 호수 앞에서 고무튜브를 빌려주는 일을 했는데, 큰 눈과 시원한 목선이 사랑스러웠다. 순수 키르키스족으로서 집에서도 매우 마음에 들어했고 섹시하면서도 조신한 맛이 있었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내 이름을 못 외웠기 때문이다. 7년 동안 정확히 부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차라리 그냥 줄여서 부르면 상관없겠지만, 무슨 생각인지 매번 틀리면서도 굳이 다 부르려 했다. ‘유리사탄(×) 스타코프스키 아르바이잔… 사랑해’라거나, ‘유리스탄 스타코풀스키(×) 아르바이잔… 그리워.’ 이런 식으로 7년 넘게 들으니 나로서도 자꾸 난처해졌다.
사랑을 저버리면서까지 내가 이름을 고수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내 이름에 들어간 모든 이름이 내 조국 키르기스스탄을 용맹하게 지켜온 조상들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아버지 아르바이잔은 러시아에 항거했고, 증조할아버지 스타노크라스카는 우즈베키스탄에, 고조할아버지 제인바라이샤는 코칸드족에게, 그보다 앞선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은 투르크족과 몽골, 위구르족에 대항해 몸바쳤다. 지금 나 ‘유리스탄 스타코프스키 아르바이잔 스타노크라스카 제인바라이샤 코탄스 초이아노프스키’가 자유의 공기를 마시며 독립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것은 모두 내 이름에 등장한 선조들 덕분이다. 나뿐 아니라 온 키르기스스탄 민족이 내 이름에 등장하는 선조들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러므로 내 이름은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이며, 나를 존재하게 하는 정체성과도 같다.
그런데, 나를 자꾸 ‘최씨’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
나는 지금 한국의 안산에 와 있다(아…… 안산의 자장면은 정말 맛있다). 용사의 후예인 내가 왜 한국의 안산에 있는 공장까지 왔느냐면……, 일단은 돈이 궁해서였다. 카자흐스탄에서 빵을 굽는 작은삼촌에 의하면, 한국에 가서 일하면 한달에 일년치 월급을 벌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 가문은 키르기스스탄의 경제 악화 탓에 주변국가로 흩어져 비즈니스 활동을 펼치고 있다. 군인가문에서 상인가문으로의 대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셈이다.
가장 먼저 외국에 나간 것은 작은삼촌이었고, 나 역시 그의 영향으로 이곳에 와 있다. 여동생은 샹하이에서 민속인형을 팔고 있고, 작은삼촌은 투르크메니스탄의 식당에서 일하고 있고, 아버지는 우즈베키스탄의 양조장에서 일하고 있다. 이런 가문의 흐름에 역행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큰형 ‘스타로프스키…… 초이아노프스키’다(그의 이름 또한 몹시 길다. 중략이 미덕인 것 같다). 그는 자본과 결탁하는 행위야말로 가문의 수치라며 현재 아프가니스탄에 건너가 탈레반과 공모를 꾀하고 있다. 그것이 바람직한 방향인지는 모르겠으나, 큰형만이 우리 가문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나는 그를 존경한다. 그가 무서워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나는 이제 아홉살 된 막내여동생 유리를 위해 매달 집으로 돈을 보내고 있다. 유리는 웃는 모습이 정말 귀엽다. 유리의 웃음을 보면 세상의 모든 근심이 다 휘발되는 것 같다. 유리가 나보다 스물다섯살이나 어린 이유는 순전히 아버지 때문이다. 우즈베키스탄의 양조장에서 일하는 아버지는 저임금의 현실을 개탄하며, ‘월급 이외의 무엇이라도 받아야 한다’는 궁리 끝에 양조장의 술을 매일밤 몰래 마시기 시작했다. 밤마다 꾸역꾸역 술을 마신 지 7년째,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가 되었다. 그러고선 무턱대고 성욕을 해결하고자, 용맹해진 남근을 과시하듯 여기저기 휘두르기 시작했다. 양조장에선 아버지의 문제를 파악하자마자 곧장 두달간 귀가조치를 취했다.
아버지는 집에 돌아온 그날 밤, 63세의 나이로 유리를 탄생시켰다. 어머니는 훗날 닥치는 대로 달려드는 아버지를 온전히 받아주는 게 상책이었다고 회고했다.
아버지의 양조장을 생각하니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나를 테러리스트로 만든 자다. 유순한 상인으로 살려고 했으나, 결국 포악한 용사로서 살게 만든 그. 나를 ‘최씨’라 부르는 사람. 우리 가발공장의 사장 ‘안면수’다. 사람들은 그를 ‘안면몰수’라 부른다. 안면몰수가 나를 최씨라고 부른 것은 나를 처음 보던 날이었다. 그는 내 이름을 ‘유리스탄 스타코프스키 아르바이잔…’까지 읽다가 마지막 ‘초이아노프스키’를 보고선, 금세 최씨라 불렀다.
“어, 초이? 초이면, 최씨네. 그냥 최씨라고 해.” 안면몰수는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내가 본 그의 마지막 웃음이었다. 그뒤부터 그는 양 눈썹을 하나로 쭉이어 붙일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최씨, 머리 잘못 붙이면 니 머리를 뽑아버린다” “최씨 눈 삐었어? 눈깔을 뽑아버릴라” “최씨, 어제 병원 갔다왔으니 일당 깠어. 꼬우면 병신 되지 말든가” 같은 말을 습관처럼 해댔다. 사장이 일단 최씨라고 부르면 그 뒤에는 사전에도 없는 말들이 나온다. 나는 처음에 이것이 무슨 말인지 잘 몰랐으나, 몽골인 바타르의 도움으로 나쁜 뜻이라는 것을 알았다. 바타르는 한국어와 러시아어를 모두 구사하는 인텔리지만, 여기서는 그냥 박씨로 통한다.
사장은 어디서 그런 기술을 배웠는지, 직원들의 이름을 들으면 곧장 그것을 한국식으로 바꾸는 재주를 지녔다. 그것 하나만은 인정한다. 나는 최씨, 바타르는 박씨, 콩고의 주글레리는 주씨, 에티오피아의 워크네시는 내씨, 네팔의 쿠마리는 구씨, 이런 식이다. 인도의 라시가 라씨가 된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나마 내 이름이 가장 정성들인 작명이라 한다.
그는 이렇게 모든 것에 한국식을 강요한다. 「너희 여기에 배우러 왔잖아. 너희 꼴랑 이 돈 몇푼 때문에 브로커한테 비자 사서, 배타고 비행기 타고 이까지 와서 쪽방에서 새우잠 자는 거 아니잖아. 너희는 꿈이 있어. 그 꿈을 가슴에 품고 인도양, 태평양, 대서양 넘어온 거야. 여기서 배워서, 너희 고국에 돌아가 그 정신과 기술을 전수하겠다는 꿈 말이야. 안 그래? 주씨! 너희 대통령 여기 와서 새마을운동 배워갔잖아. 간단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5시부터 일하는 거야. 밤 12시까지 일하고, 윗사람들 보면 90도로 인사하고, 밥 주면 두 손으로 ‘감사히 먹겠습니다’라고 인사하고 먹는 거야.」
그는 우리에게 한국의 스승을 자처했다. 한국의 스승은 사랑하는 제자를 위해서는 때로는 매를 들기도 하는 거라며, 애제자 라씨를 매로 키웠고, 몽골에서 온 여제자 치치게 지씨에게는 야간특별수업을 해줬다. 치치게는 수업을 받고 나온 후면 아랫도리가 아파 제대로 걸을 수 없었고, 라씨는 사랑의 훈육을 받는 날이 길어질수록 허리를 제대로 쓸 수 없었다.
나는 정의를 실천해온 가문의 후예로서 이런 일을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당연히 라시 라씨에게 안산시청에 민원을 제기해 인간으로서의 기본권을 되찾으라고 했다. 라씨는 내 말대로 민원을 제기했고, 곧바로 불법체류자인 게 탄로나 추방당했다. 그는 치치게의 강간도 함께 고발했는데, 치치게도 보건소에서 검사를 몇번 받더니 에이즈나 매독 등 기타 성병에 걸리지 않았다는 위로와 동시에, 추방명령을 받았다.
나는 바타르 박씨와 함께 대형 신문사에 제보했으나, 한국 언론의 주류임을 자처하는 그 신문사는 자신들의 자유주의 철학에 맞지 않는다며 우리 이야기를 거부했다. 결국 이름을 처음 들어보는 어느 작은 인터넷 매체에서 우리 사연을 기사화해주기로 했는데, 맙소사—————, 거기에는 우리보다 더한 사연들이 바글댔다. 폭행이나 월급착취 등은 우리가 보기에도 기사 축에 못 들 것 같았다. 오히려 기사를 내주는 것이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