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김소연 金素延 시인.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등이 있음. catjuice@empas.com
박 준 朴 濬 시인.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등이 있음. mynameisjoon@hanmail.net
백지연 白智延 문학평론가.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 등이 있음. cyndi89@naver.com
김소연 이번호 문학초점에서는 자신만의 아름다운 감수성을 발명하고 있는 박준 시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기대가 되는 한편 걱정이 앞섭니다. 오래 알고는 지냈지만 문학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로 나누어온 사이라, 정색하고 차분하게 대화할 수 있어야 할 텐데요. 더군다나 아름답게 말해야 할 것만 같아 더 긴장이 됩니다.
박준 저는 이미 정색을 하고 앉아 있습니다.(웃음) 이런 자리에서 두분을 뵙게 되니 낯설기도 하고 더 반갑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백지연 마침 오늘 다루는 책들의 주요한 화두가 ‘연애’인데요. 박준 시인과 무척 어울리는 주제가 아닐까 싶어요.(웃음) 함께 나눌 대화가 기대됩니다.
유진목 시집 『연애의 책』
김소연 유진목 시인은 등단절차를 거치지 않고 첫 시집인 『강릉 하슬라 블라디보스토크』(문학과죄송사 2015, 이하 『강릉』)를 독립출판물로 출간했는데요. 『연애의 책』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는 시집이어서 의미가 깊습니다. 지면에 발표한 작품들을 고르고 모아서 한권의 시집을 꾸리는 통상적인 절차와 다르죠. ‘연애의 책’이라는 제목도 흥미롭게 다가와요. 지금 이 시대에 이렇게 ‘연애’를 전면적으로 내세워서 일관성있게 쓴 것도, 용기나 절박함 아니면 할 수 없는 작업인데요. 시를 읽는 기쁨을 한껏 느끼게 하는 좋은 독서체험이었습니다.
백지연 저도 꾸밈없는 진솔한 시를 만난 느낌이 좋았습니다. 요즘처럼 사랑 이야기가 넘쳐흐르면서도 진지하게 ‘연애’ 이야기를 하기 어려운 때가 또 있을까 싶은데요. 하루가 멀다 하고 여성혐오와 각종 폭력과 성 추문이 미디어를 장식하는 시대에 순정하고 진심어린 이야기를 만나는 것 자체가 낯설기도 하고 소중하게 다가왔어요.
박준 말씀대로 유진목 시인은 각종 문예지의 청탁 없이, 그리고 문단의 평이나 독자들의 눈에서 비켜서서 오롯이 혼자 한권의 시집 분량을 자유롭게 써왔을 텐데요. 그래서 저는 시의 첫 문장이 시작되고 종결되기까지의 과정이 기존의 젊은 시인들하고는 조금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일단 시를 쓰고 발표하는 과정에서 겪는 마감과 독촉의 공포도 없을 거고요.(웃음) 반면 무엇을 쓰는 일의 지난함과 외로움은 더 크게 느꼈을 테고요.
백지연 소설로 보면 장편에 해당하는 스토리텔링을 지닌 건데요. 시적 상황들이 서사성을 지니면서 매끄럽게 읽히고, 화자가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친절하게 서술하는 방식도 흥미로워요. 사랑하는 ‘당신’에게 무언가를 아낌없이 내주면서도 자기존중의 균형감각이 있고요. 특히 함께 밥을 차려먹고, 살을 부비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그런 삶 속의 연애를 자연스럽게 그리고 있어서 좋았습니다.

왼쪽부터 김소연, 박준, 백지연. Ⓒ 신나라
김소연 육체적인 감각을 잘 살릴 뿐 아니라 시의 장면들을 환기하는 이미지가 선명해요. “어느 날은 당신이 불쑥 내 방으로 들어오기도 한다/그냥 오기 뭐해서 귤 한 봉지를 손목에 걸고”(「사랑의 방」) 같은 구절을 보면 이미지가 선연하고요. 사랑하는 사람을 이미지로 기억하는 것이 가장 빛나게 드러난 대목입니다. 화자가 아니라 시 속 타자를 이토록 생생하게 제시해놓은 시는 처음이다 싶어집니다. 독자가 시인의 시에 동참이 안될 수가 없는 중요한 덕목이라 여겨져요. 영화 한편을 보는 것보다 더 압도적이었습니다.
박준 저는 유진목 시인이 다루는 작은 이야기들이 좋았어요. 「낮잠」은 별다른 일 하나 없는 상황에서 화자가 낮잠을 자고 여름을 보내는 이야기입니다. 「식물의 방」에서는 화분을 키우는 정적인 이미지와 세밀한 일상의 풍경이 쭉 이어지는데요. 유진목 시인은 일상의 작은 장면들을 그러모아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데 참 능한 분 같습니다. 이 시들을 가만히 읽고 있으면,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이렇게 작은 일들만 끝없이 벌어지다가 끝나는 것이겠지? 그런데 이것이 그리 나쁘지 않네,라는 이상한 안도감이 들어요.
백지연 개방성과 유연성을 지향하는 부드러운 화법 아래 깊고 고통스러운 상처의 현실이 있어요. 시에서 ‘당신’을 대하는 화자의 감정도 복잡합니다. 날을 세우는가 싶으면 어루만지고요. 당신은 매우 무심하고 원망스러운 사람인데, 화자의 유연한 시선 속에서 이해와 연민을 얻게 되죠. 상처입은 사람들에게는 삶이 그렇게 누추하지 않다는 위로를 주고, 떠난 사람들에게는 뭔가 변명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준달까요. 남성 독자들이 읽으면서 더 많은 위로를 받지 않을까 생각해봤습니다.(웃음)
김소연 시가 드러내는 기묘한 기다림의 모습 속에 여성상의 익숙한 페르소나가 있죠. 김소월(金素月) 시의 정서도 떠오르고요.
박준 꽃 진 자리에서 떨어진 꽃잎을 하나하나 세고 있는 것 같은, 다소 수동적인 여성화자의 발화방식이 낯익기는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격렬한 파토스(pathos)가 섞여 있어요. 첫 시집인 『강릉』의 뒷표지에 “나는 너가 죽었으면 좋겠다”라고 단 한줄만이 적혀 있어 놀랐어요. 그리고 이번 시집의 첫번째 시 「신체의 방」에는 “나는 당신을 죽일 거예요”라는 구절이 나오고요.
김소연 상대를 죽이고 싶어하는 것도 사랑의 본질 아닌가요.(웃음)
박준 상대의 손에 죽고 싶어하는 것도 사랑의 본질 같아요.(웃음) 『강릉』과 이번 시집의 관계도 흥미로워요. 첫 시집의 시들을 일부 선별해 이번 시집에 재수록했는데요, 「잠복」과 「낮잠」은 두 시집 모두 1부의 두번째와 세번째 순서에 수록되어 있어요. 반면 『강릉』의 1부 첫번째 시였던 「사랑의 방」은 이번 시집에서 제일 마지막에 실려 있고요. 조금 먼 이야기지만 처음이 곧 끝이 된다는 것. 이것 또한 사랑이라는 감정의 본질 같네요.
김소연 유진목 시를 읽어보면 기존의 시들과 오랫동안 소통해온 친근한 지점들이 있어요. 81년생 시인인데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인 70년대에 쓰인 것처럼 재구성한 시들이 있어요. 부모를 페르소나로 자신의 출생 이전의 서사를 에세이처럼 구축했는데요. 유희경(兪熙敬)의 「면목동」이 떠올랐습니다. 나희덕(羅喜德) 시가 가진 포용의 서사도 있고, 김언희(金彦姬) 시의 그로테스크하고 냉정한 시선도 있고요. 이성복(李晟馥)과 박준의 시를 떠올리게 하는 부분도 있어요. 시인들이 즐겨 사용해온 화자들이 유진목 시 안에서 융합되면서 기존의 목소리들과 적절하게 거리를 두기도 하는 지점이 낯익음과 낯설음의 양가성을 모두 지닌 대목 같기도 합니다.
백지연 「동산」과 「동지」에서는 김애란(金愛爛) 소설의 감각적인 화법이 확 느껴졌고요. 그때는 아, 두 작가가 비슷한 세대지, 하고 실감했어요. 아쉬운 건 시들이 익숙하고 매끄러운 만큼 시인 고유의 개성적인 지점들이 잘 다가오지 않았어요. 어머니와 결합된 가족사 이야기나 출생을 그리는 어두운 이미지들이 특이했는데 시집에서 크게 강조되진 않았고요. 『강릉』에 실린 「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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