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차미령 『버려진 가능성들의 세계』, 문학동네 2016

미래를 약속하는 비평을 고대하며

 

 

염동규 廉東奎

문학평론가 critics_eye@daum.net

 

 

175_424작년 봄에 있었던 한 대담에서 황현산(黃鉉産)은 이렇게 말한다. “문학이 누군가가 어디로 가야 한다고 외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죠. 외친다고 해서 문학이 그리로 간 적도 없고 가서 잘된 적도 없어요.”(『문학동네』 2016년 봄호 530~31면) 비슷한 취지에서, 황현산은 ‘한국문학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같은 질문 역시 “위험한 질문”으로 생각하며, 문학이 믿어야 할 모든 것을 작가의 성실성 쪽으로 돌리고 있다. 대가의 고민이 지닌 결들을 충분히 존중한다. 아직은 어린 세대에 속하는 나 같은 비평가는 ‘거대서사의 붕괴’를 체감하는 순간이 지니는 절망적 무게를 알지 못하며, 그 순간 이후에 갖게 된 ‘거대서사’에 대한 불신감을 완전히 이해하고 헤아릴 길이 없다. 하지만 대가의 고민과 대답을 존중한다 하더라도 선뜻 동의가 되지는 않았다. 본의를 왜곡하는 것은 아닐까 싶어 조마조마하기도 하지만, 나는 황현산이 비평을 지나치게 과소한 장르로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작품이 먼저 가는 길을 따라가며 ‘조언’쯤이나 해야지 ‘선도’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니. 대관절 비평이 왜 이렇게 왜소해야 한단 말인가.

차미령(車美怜)의 평론집 『버려진 가능성들의 세계』에 대해 논하는 자리에서 새삼스럽게 황현산의 생각을 끌어들인 것은, 이 책에서 차미령이 드러낸 비평의 자세 역시 황현산의 그것과 그리 멀지 않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해서다. 자신이 비평을 시작하게 된 바로 그 계절에 문학의 종언이 운위되기 시작했다는 저자는 “전망을 내놓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더 가까이서 자세히 보려고 했다”고 적는다. 소설 자체를 “이야기가 완성되기까지 버려진 가능성들의 세계”라고 정의하는 차미령은, 섬세하고 성실한 작품 읽기의 결과물이라고 할 자신의 비평에 대해서도 오히려 “읽고도 읽지 못했던 가능성들”은 없을지 염려한다.(‘책머리에’) 그런데 문득 궁금해진다. 동구권의 몰락을 지켜보며 작은 것들의 가능성을 천착한 원로 비평가의 자세와 문학의 종언을 지켜보면서 “더 가까이서 자세히 보려고 했다”는 중견 비평가의 자세가 겹쳐 읽히는 것은 우연일까?

잠시 언급했다시피 『버려진 가능성들의 세계』는 그야말로 섬세한 읽기 능력이 발군인 수작이다. 작품의 세세한 결들을 문장과 비유, 사소한 수사의 차원에서까지 미시적으로 읽어내고, 또 종합해냄으로써 작품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하는 그의 비평은, 찬찬히 따라가며 읽는 이에게 감탄을 연발케 하는 면이 있다. 작품과 그 요소들에 대해 성급한 판단을 내리기 이전에, 더 많은 결들을 놓치는 건 아닐지 염려하여 거듭 공들여 읽고 쓴 비평은 작품과 작가들의 고민을 정성 들여 듣는 저자의 미덕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대상을 반드시 승인하고 상찬하는 것만은 또 아니니, 대상의 가능성과 한계를 두루 읽어내는 탁월성을 보인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래서인지, 남들이 쉽게 단정 짓고 말아버릴 법한 장면들을 놓치지 않는다. 예컨대 강영숙 소설의 환영(幻影)들을 단순한 “현실도피나 대리충족”의 소산으로 환원하지 않고, 그러한 환영을 낳은 현실의 조건을 포착하여 마침내는 “억압된 소망이 끓어넘치는 도가니”를 강조하게 되는 대목(「유기에 맞서서: 윤성희와 강영숙의 소설」)이 그렇고, 『두근두근 내 인생』(창비 2011)에서 김애란이 보였던 변화에 성급히 실망하거나 과찬하지 않고 ‘이야기꾼의 존재론’이라는 키워드를 동원하여 작품을 설명해내는 대목(「이야기꾼의 탄생과 진화 1: 김애란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이 그렇다.

그러나 이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내가 느낀 아쉬움은,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작품에 묶여 있는 것 같다’는 인상, 지우기 어려운 ‘왜소함’의 느낌, 그것 때문이었다. 『버려진 가능성들의 세계』는 최소한 비평가가 현실에 직접 육박해 들어가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는 않았다. 소설이 우리 사회에 던지는 ‘질문’들을 꼼꼼히 탐색해나가면서도, 정작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모조리 작가가 해주기를 기다리는 듯하다고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박민규와 조하형의 빼어난 작품들을 다루는 자리(「환상은 어떻게 현실을 넘어서는가: 박민규와 조하형의 소설」)에서, 차미령은 그들의 소설이 추구한 상상력이 딱히 자유로움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 같다고 지적하면서, 작가들에게 희망을 가질 것을 주문한다. 그런데 솔직히 좀 불편하게도 들린다. 현실을 넘어서야 한다는 일종의 대결 의무가 ‘작가’ 쪽에만 넘겨져 있다는 인상 때문이다. 그럼 비평가는? 하는 물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의 시대인 2010년대 소설의 사회적 성찰을 다룬 글(「2010년대 소설의 사회적 성찰: 황정은론」)에 관해 말하자면, 황정은이 내어놓은 『계속해보겠습니다』(창비 2014)는 단지 우리에게 “소박하지만 수락할 수밖에 없는 메시지”를 대답으로 제출한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작품에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계속해보겠습니다”는, 비루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는 이 세계에서 과연 우리가 어떤 “응답”을 가지고 “계속”할 것인지를 ‘질문’하고 있는 방식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 묻자. 작품이 세계에 대해 내어놓는 질문에 비평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글을 열며 언급했던 황현산이나 저자의 관점과 달리 나는 비평가의 작업이 단지 작품 속의 미세한 국면들로부터 ‘가능성과 한계’를 읽어내는 일에만 한정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비평가가 작품의 ‘후위’에서 ‘단지 조언 정도만 해줄 수 있을 뿐’인 위치에 머물러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비평 또한 다른 모든 독립된 장르들과 정확히 ‘같은 위치’에서 세계와 사람들을 상대로 미래를 약속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비평가에겐 작가에게 요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망과 거대한 성찰, 틀을 넘는 전복적 기획과 시도들이 필요하다. 차미령의 다음 비평 작업들이 ‘작품의 바깥’에 대한 적극적인 질문과 대답, 그리고 미래에 대한 약속의 장으로 그 폭을 넓혀주기를 고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