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사과

1984년 서울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재학중. dryeyed@gmail.com

 

 

 

제8회 창비신인소설상 당선작

영이

 

 

영이야. 아이들이 영이를 부른다. 영이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영이까지 합쳐서 다섯 명의 영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먼저 은영이의 영이가 명랑하게 뛰어간다. 정현이의 영이도 은영이에게 달려간다. 주희의 영이는 아주 예쁜 레이스 치마를 입고 있다. 검은색 에나멜 구두가 주희의 눈동자에 가득 찼다. 마지막으로 채은이의 영이는 이상한 머리핀을 했다. 채은이는 영이를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채은이의 머리핀은 언제나 예쁘다. 마지막으로 영이는 달려가는 영이들을 바라봤다. 방금 전까지 영이는 영이 하나뿐이었는데 아이들이 부르자 하나의 영이와 네 개의 영이들이 되었다. 영이는 몹시 당황하여 숨었다. 하지만 영이들이 네 개나 있으니까 괜찮다. 은영이의 영이가 가장 열심이다. 정현이의 영이는 뒷모습밖에 없다. 왜냐하면 정현이는 언제나 뒤에서 영이를 쳐다보기 때문이다. 영이는 정현이가 그렇게 자기를 풀죽어서 바라보는 것이 싫다. 정현이는 개처럼 처량하게 영이의 뒤통수를 쳐다본다. 정현이의 영이는 언제나 은영이의 영이다. 그래서 정현이는 슬프다. 나도 슬프다. 주희의 영이는 언제나 예쁜 치마를 입고 있다. 주희의 영이는 머릿결도 좋다. 하지만 무엇보다 주희의 영이는 똑똑하다. 그래서 나도 주희의 영이가 제일 좋다. 주희의 영이는 아침마다 고민한다.무슨 치마를 입을까, 머리는 어떻게 땋을까? 세 영이는 참 보기가 좋다. 그런데 네번째 채은이의 영이는 흉하다. 채은이의 영이는 보잘것이 없다. 채은이의 영이는 빵 부스러기 정도다. 그런데 영이의 채은이는 여왕이다. 채은이는 우리 반 모두의 여왕이다. 채은이는 마치, 엘레나 같다. 사과를 좋아하는 엘레나. 사과같이 예쁜 엘레나. 그러니까 헬레나. 거울만 보는 왕비님. 채은이는 새하얀 니트 원피스도 가지고 있을 정도이다. 그러니까 영이하고는 상대도 안된다는 말이다. 아, 영이는 맨날 맨날 주희의 영이였으면 좋겠다. 주희의 영이는 공부도 잘한다. 그런데 채은이의 영이는 그냥 열심히 하는 정도이다. 그렇다면 진짜 영이는, 그러니까 영이, 그냥 영이는 어떤가. 영이는 한가지다. 영이는 영이의 영이만 없으면 좋겠다. 영이의 영이는 흉하다. 썩은 콩보다 더 흉하다. 영이는 영이의 영이가 싫어서 집에 가는 것이 싫다. 영이의 영이가 나타나면 영이는 울고 싶다. 하지만 영이가 집으로 가는 길이면 영이의 영이는 어김없이 영이의 귓속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런데 영이의 영이는 뭔가? 영이의 영이니까 진짜 영이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렇지도 않다. 영이의 영이는 영이의 영이일 뿐, 그러니까 수많은 영이들 중 하나일 뿐. 영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영이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뿐이다. 주희의 영이가 새까만 뒤통수인 것처럼, 채은이의 영이가 이상한 머리핀인 것처럼, 은영이의 영이가 온통 미소인 것처럼 영이의 영이는 흉한 영이이고 모두 각각의 영이들일 뿐이다. 꽃다발처럼 많은 영이들이 너무 열심히 해주면 어떤 영이는 달이 되고 어떤 영이는 수세미가 될지도 모르겠다. 영이는 그게 무서운데, 누구한테도 얘기할 수 없다. 얘기하는 것이 더 무섭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이 혼자서는 너무 벅차다. 나의 영이가 진짜 영이일까? 영이는 물어본다. 하지만 아무 대답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하늘에서 달콤하게, 훌륭한 음성이 쏟아져내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영이는 발밑을 두리번거린 적도 있다. 하지만 바닥에는 회색 먼지만 가득했고, 영이의 고민은 점점 더 헝클어졌다. 머리가 아파진 영이는 영이의 영이를 그냥 나의 영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런데 나의 영이라는 말은, 그러니까 영이의 영이라는 말은 너무나 성가시고 헷갈려서 이제부터 그 영이는 순이라고 부르겠다. 일단 순이는 너무 무섭다. 아직까지는 그게 다다. 순이는 무섭다.

 

영이와 순이와 네 명의 영이들은, 또 채은이와 주희와 은영이와 정현이는 갈림길에 도착했다. 영이와 순이와 네 명의 영이들과 채은이는, 주희 은영이 그리고 정현이와 헤어졌다. 그러니까 영이는 주희의 영이, 은영이의 영이, 그리고 정현이의 영이와도 헤어졌다.5분 뒤에 영이와 순이는 남은 한 명의 영이와 채은이와도 헤어졌다. 채은이는 아파트단지로 들어갔다. 채은이의 영이는 채은이네 아파트 관리사무소로 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 채은이의 뒷모습이 점점 작아지고 영이의 집이 점점 가까워지자 숨어 있던 순이가 영이의 귓속에서 줄줄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영이는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아파트단지를 지나 주택가 골목길로 들어갔다. 이제 순이는 완전히 다 흘러나왔다. 영이는 입을 꾹 다물고, 어깨는 아무렇게나 두고, 까맣고 까맣기만 한 인형 눈을 하고는 타박타박 걷고 있다.영이는 순이와 함께 붉은 벽돌로 쌓은 똑같은 모양의 이층집들 사이를 걷다가 그중 하나로 들어가려고 한다. 불쌍한 영이의 머리카락들이 어깨 위로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바람이 왔다갔기 때문이다. 영이의 손은 맥주색 철문을 만나자 모기처럼 약해졌다. 왜냐하면 영이는 문을 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이의 발들은 돌계단 삼형제를 만나자 깜짝 놀라 움츠렸다. 왜냐하면 영이는 계단을 오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마당에 깔린 푸르른 잔디들도 엉엉 울고 있었다. 감나무의 구슬픈 목소리는 여기까지 들려온다. 나는 지금 이 풍경을 너절하게 늘이고만 있다. 왜냐하면 그러고 싶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나도 영이만큼이나 영이의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말도 안되는 말들의 계단을 쌓고 또 쌓아서 가능한 한 영이가 늦게 늦게 집에 들어갔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집에는 술에 취한 아빠가 있기 때문이다. 영이가 술에 취한 아빠를 만나고 싶지 않은 만큼 나도 술에 취한 영이의 아빠를 만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때 갑자기 순이가 어서 집으로 들어가라고 영이를 몰아붙이기 시작한다. 영이의 발은 껌이 되어 문에 찰싹 달라붙고만 싶다. 열쇠를 꺼내는 영이의 손이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정작 영이의 목구멍은 태연하다. 영이의 목은 석쇠 위에서 지글지글 타고 있는 돼지막창처럼 얌전하게 타들어가고만 있다. 찰칵 하고 문이 열렸다. 순이는 커다란 맥주색 철문을 열고 황량한 사막, 아니면 지옥의 늪, 혹은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로 걸어들어간다. 영이는 까맣게 탄 식빵처럼 바싹 말라붙었다. 바로 그때, 순이가 영이의 작은 어깨를 확 밀었다. 그래서 영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오히려 대담하게, 집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아빠는 식탁에 앉아 기분좋게 술을 마시고 있을 뿐이었다. 갈색 스웨터에 베이지색 잠옷 바지를 입고 있다. 헤벌쭉 웃더니만, 딸기 같은 얼굴로 상냥하게 영이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순이의 눈에 비친 아빠는 주정뱅이일 뿐이다. 었고, 이고, 일 것이다, 앞으로도 영원히. 똑똑한 순이는 영원이란 깨진 독에 물을 채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빠는 깨진 독에 물을 들이붓듯이 목구멍 속으로 술을 들이붓는 사람이다. 아빠가 영이를 부른다. 그것은 아빠가 순이를 괴롭히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 순이는 온통 울고 싶다. 온 거실을 빙글빙글 돌면서 울고 싶다. 그러다가 두 주먹으로 있는 힘을 다해 피아노 건반을 내리치고 싶다. 그러고 나서 걸려 있는 액자들을 모두 부수고 소파와 소파 위의 쿠션을 다 찢어버린 다음에 쿠션 솜을 다 먹어버렸으면 좋겠다. 먹다가 목이 막혀서 꽥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하지만 영이는 순이의 이런 마음을 알지 못한다. 영이는 영문도 모른 채 진동안마기처럼 부르르 떨고 있는 순이를 질질 끌며 힘겹게 자신의 방으로 걸어간다. 바로 그 순간, 아빠가 영이의 팔뚝을 잡았다. 영이의 몰랑몰랑한 살이 아빠의 커다랗고 메마른 손바닥에 가득 찬다. 화가 난 순이는 이제 낡은 계단처럼 삐그덕 삐그덕 울기 시작했다.몹시 놀라고 당황한 영이는 두 손을 뻗어 작고 예쁜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영이는 울기 시작한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영이는 아빠를 돌아본다. 그러자 난처해진 아빠가 영이의 팔을 놓고 비틀거리며 다시 식탁에 가 앉았다. 한숨을 푹 쉬더니 빠른 속도로 술잔을 비운다. 덩달아 술병도 빠른 속도로 비어간다. 그런 아빠를 순이는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아빠는 차마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순이는 광대뼈 옆으로 흘러내린 붉게 충혈된 누리끼리한 눈알을 발견했다. 축 늘어진 붉은 혓바닥은 뱀처럼 사악했다. 고무장갑처럼 빨간 얼굴에선 온통 불꽃이 터지고 있었다. 아빠의 피부는 녹아내리고 있었다. 순이는 순도 높은 염산을 구해서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깜깜한 콧구멍에서는 검붉은색 지렁이들이 혈관처럼 가득 흘러내리고 있었다. 흘러내린 지렁이들이 영이의 발밑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놀란 순이가 갑자기 떨림을 멈췄다. 그래서 가까스로 영이는 방문을 열 수 있었다. 영이는 힘겹게 침대 위로 쏟아져내렸다.

 

영이는 울고 있는 것은 영이가 아니라―순이도 아니고―단지 자기의 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울고 있는 것은 영이가 맞다. 울지 않는 것은 순이였다. 순이는 어느새 천장에 닿아 있었다. 천사처럼, 아니면 나방처럼 천장을 파닥파닥 날아다니면서 침대에 엎드려 울고 있는 영이를 봤다. 빨갛게 달아오른 영이의 뺨이 순이는 맘에 안 들었다. 들썩거리는 영이의 작은 어깨도 싫었다. 순이는 울고 있는 영이가 부끄러웠다. 그래서 순이는 영이에게 울고 있는 것은 네가 아니라 네 몸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영이가 끄덕이자 방에는 괴로운 영이와 울고 있는 영이의 몸과 거짓말쟁이 순이가 있게 되었다. 그렇게 된 거다. 셋은 이렇게 저렇게 자꾸 오락가락하며 뒤섞여서 결국 누가 누구인지 알아보기도 힘들게 되었다. 그래서 영이는 점점 더 머리가 아팠다. 처음부터 순이도 영이들도 영이의 몸도 만들어내지 않았으면 이렇게 엉망진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이는 뭔가 자꾸자꾸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영이 혼자서는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빠는 지구가 태어난 날부터 깨진 항아리에 물이 가득 차는 날까지 계속해서 술만 마시고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빠 생각을 하지 않고 견디기에는 하루가 너무 길었다. 하지만 그 긴 하루가 아빠 생각만으로도 너무나 짧았다. 그 짧고도 긴 하루 동안 영이는 숙제도 해야 하고 학교도 가야 하고 밥도 먹어야 했다. 그리고 은영이와 웃으며 데굴데굴 구르기도 해야 하고 주희에게 편지도 써야 하고 채은이와 안녕도 해야 하고 정현이의 머리핀도 골라줘야 했다.

영이의 몸이 열심히 밥을 먹는 동안, 영이는 아빠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순이가 영이의 어깨를 떠미는 동안 영이는 풀밭의 고양이를 볼 수 있었다. 영이가 엄마한테 혼나서 울고 있을 때 순이는 다음주 사회시간에 발표할 숙제를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엄마의 비어져나온 코털을 보며 얼굴을 찌푸리거나, 또는 엄마의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말을 비웃거나, 바보 멍청이 같은 논리에 한숨을 내쉴 수도 있었다. 아니면 아까 채은이가 했던 말이 무슨 뜻인지 곰곰이 생각해보거나, 주희는 왜 매주 좋아하는 남자애가 바뀌는지도 연구해볼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영이는 영이와 순이, 그리고 영이의 몸과 꽃다발처럼 많은 영이들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 허둥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게다가 영이한테는 아빠와 엄마도 있다.

 

영이네 집 pm 2:48

주방―아빠가 식탁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영이의 방―영이는 침대에 엎드려 운다.

거실―텔레비전은 혼자서도 잘 논다.

안방―엄마는 타이레놀을 세 알 먹고 자고 있다.

 

십오분 뒤 엄마가 잠에서 깨어난다. 잠에서 깬 엄마가 침대에 걸터앉아 기지개를 켠다. 하품을 하고는 화장대에 가서 머리를 다듬는다. 두 손을 허리에 댄 채 상체를 뒤로 쭉 젖힌다. 엄마는 이제 천천히 문으로 걸어간다. 밖으로 나온 엄마는 거실을 지나 부엌으로 향한다. 그러다가 커다란 장애물, 아빠와 마주친다. 갑자기 엄마의 작은 몸에서 아찔하게 붉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것으로 영이 엄마가 화가 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평범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무당의 눈에는 보일 것이다. 내 눈에도 보인다. 엄마는 말처럼 흥분했다. 눈가리개를 달고 얌전히 마차를 끄는 예의바른 말이 아니라, 안장도 얹지 않고 초원을 뛰어다니는 활력이 넘치는 야생마 말이다. 부엌에 도착한 활력이 넘치는 야생마는 냉장고를 넘어뜨리고 벽을 까부수고 저 먼 우주까지 달려갈 기세다.하지만 영이 아빠는 활력이 넘치는 야생마가 자신의 코앞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완전히 취했기 때문이다. 영이 엄마는 슬픈 눈으로 텅 빈 양주병을 바라본다. 엄마의 붉은 연기가 부엌을 가득 휘감았다. 하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엄마의 탄탄한 종아리에 시선이 간다. 왜냐하면 말의 생명은 다리이기 때문이다. 과연 말은 달릴 것인가? 장애물을 훌쩍 뛰어넘어서? 아니면 냅다 적의 뒤통수를 걷어차고? 엄마는 일단 냉장고에 가서 물을 마신다. 말은 내일 달릴지도 모르겠다. 나는 너무 가슴이 두근두근해서 내일이 오늘인지 어제가 내일인지도 헷갈릴 지경이다.

 

엄마는 갑자기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빠는 설거지 소리가 시끄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엄마한테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하라고 했다. 하지만 수도꼭지에서 쏟아져나오는 수많은 물방울들, 접시, 컵, 포크, 밥그릇과 수저는 계속해서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귀가 없기 때문이다. 정작 귀가 있는 엄마는 아주 조용하다. 하지만 술에 취한 아빠는 자꾸 엄마한테 조용히 하라고 했다. 정말로 힘이 쭉 빠지는 광경이다. 아빠가 자꾸 엄마의 힘을 빠지게 해서 엄마도 자꾸 화를 내는 것인데 아빠는 그걸 모른다. 됐어, 됐어, 아휴 씨발년, 그래 됐다. 아빠는 손을 휘휘 저으며 일어선다. 됐어, 됐다니까. 그러고는 거실로 가서 소파에 꼬꾸라졌다. 딸기 같은 뺨을 비죽이 내밀고 눈을 감았다. 두 팔을 웅크려 가랑이 사이에 끼었다. 엄마는 수도꼭지를 잠그고 나서 식탁을 치우기 시작했다. 양주병을 번쩍 들더니만 욕을 한다.씹새끼, 개새끼, 씨팔새끼. 뭐 이런 욕이다. 열여덟 개의 욕을 늘어놓으며 식탁을 치운 엄마는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꽝 닫았다. 찰칵 하는 소리도 들렸다. 말은 안 달리고 마구간으로 돌아갔다. 나는 휴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영이는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잠이 들었다가 내일 깨어나면, 햇살이 창을 부수고 들어오면, 다 까먹을 수 있을 텐데. 그러니까 내일까지 자면 좋겠다. 하지만 이제 겨우 세시를 넘었다. 영이는 바닥에 떨어진 과자 봉지를 생각한다. 책상에 흩어진 지우개 똥을 생각한다. 그 옆에 있는 코 푼 휴지도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들과 내가 똑같다고 느낀다. 똑같고 또 똑같다고 생각한다. 순이는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죽고 싶다’이다. 하지만 순이는 영이에게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래서 영이는 자기가 죽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런 영이가 순이는 존나 바보 같다. 영이는 아무것도 모르고 침대에 누워 울고만 있다. 그런 영이의 귀에 안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영이는 알맞게 녹아서 침대에 딱 붙어버렸다. 영이의 귀에 심란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저 멀리 있지도 않은 땅에서 나는 노랫소리였다. 그곳은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는 땅이다. 내가 이렇게 모호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나한테는 그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음악을 아주 잘 알기 때문에 노래 설명이라면 정말 잘할 수 있지만 안 들리니까 할 수 없다. 아무튼 영이는 노랫소리를 들었다. 시간은 여기서 잠깐 멈춘다. 엄마의 정겨운 설거지 소리. 엄마는 그릇을 하나하나 깨부수려고 작정한 사람처럼 세심하다. 아빠의 중얼거림은 잊혀진 언어로 지은 천상의 시 같다. 한편 심란한 이국의 노랫소리가 계속해서 영이의 귓속 달팽이관을 흔든다. 완전히 녹아내린 영이의 두 손이 시트에 스며들어 침대 밑으로 벌꿀처럼 뚝뚝 떨어진다. 순이는 어느새 침대 아래로 기어들어가 흘러내리는 영이의 손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고 있었다. 어둠속에서 순이의 이빨이 빛난다. 잠시 후, 영이의 손을 다 먹어치운 순이가 엄마와 아빠가 싸우다가 죽어버리라고 심란한 노랫소리에 맞춰 심란한 춤을 추며 방 안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죽어버려라! 싸우다가 죽어버려라! 둘 다 불에 타 죽어라! 자연발화! 집아, 너도 불에 타라! 나도 죽겠다! 우리 모두 다 죽자! 타서 다 바스라져라! 영이는 귀를 막고 싶었지만 영이의 두 손은 이미 순이의 뱃속에 들어가 있었다. 영이는 점점 커다란 귀가 되어갔다. 아빠의 주문과 엄마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커져만 갔다. 커다란 귀는 맹렬히 문에 부딪혔다. 아빠의 주문이 점점 멀어져간다.영이의 귀는 문을 드릴로 파기 시작한다. 엄마의 욕이 청아하게 부엌을 울렸다.

 

죽어라, 둘 다 죽어라, 둘 다 죽어버려라! 하고 영이는 생각했다. 그러자 순이가 박수를 쳤다. 부엌은 나가 뒈져라와 개새끼로 꽉 찼고, 거실의 아빠는 조용했다.영이는 울면서 계속 둘 다 죽으라고 중얼댔다. 하지만 영이는 영이의 몸이 우는 것뿐이라고 생각했고, 둘 다 죽으라는 말은 순이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무것도 안하는 나는 너무 심심하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영이는 너무 멍청하다.

 

pm4:28

부엌―텅 비어 있다.

영이의 방―영이는 (순이 없이) 잠들어 있다.

안방―영이 엄마는 자고 있다.

거실―아빠는 소파에 누워 잔다.

 

오후 5시 20분, 영이는 잠에서 깨어난다. 영이는 기지개를 켜고 천장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는다. 다시 한번 기지개를 켜면서 일어선다. 영이는 힘차게 침대에서 뛰어내리다가 침대 밑에서 기어나오는 순이와 정면충돌했다! 순이는 그 커다란 충격에도 불구하고 예습과 숙제를 잊지 않고 있었다. 영이는 할 수 없이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교과서를 펴고 연필을 들었다.

 

먼저 영이는 과학책을 꺼냈다. 내일 과학시간에는 백반 결정 만들기를 하기 때문에 전과를 펴고 백반에 대해 알아보기로 했다.

 

백반 동물 가죽의 가공, 사진의 인화, 알루미늄 제조, 우울증 치료 등에는 거의 쓰이지 않는 수은계 독성 기체이다. 결정을 이루는 성질이 뛰어나므로 큰 덩어리로 만들 수 있다. 그래서 과천 종합청사 2층의 모든 책상과 기둥이 백반 결정을 깎아서 만들어졌다는 소문이 있다.

 

영이는 요점정리 문제를 푼다.

 

(안) 안에 알맞을 말을 써넣으시오.

1. 백반 덩어리를 고운 가루로 만들기 위해서 (백과사전)을/를 사용한다.

2. 결정을 크게 만들기 위해 (아주 큰 그릇)을/를 준비한다.

 

이번에 영이는 속력에 대해 공부하기 위해 실험관찰책을 폈다.

 

4. 걸린 시간이 다를 때에 속력을 비교하는 법

삼각함수의 덧셈정리를 이용하여 3차 방정식의 x〓-1일 때의 해를 찾아 미분한 후에 0에 수렴하는 값을 찾아 코시–슈바르츠 부등식에 대입하여 답을 구한다.

 

영이는 아주 명쾌하게 이해했다. 이제 도덕 숙제만 하면 된다.

 

선택활동: 다음과 같은 행동을 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말해봅시다.

1. 생활반성표를 거짓으로 표시하는 행동

•생활반성표를 거짓으로 표시할 경우에 생기는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들키면 얻어맞는다.

―기분이 좋아진다.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노력할 일은 무엇일까요?

―위조기술을 향상시킨다.

2.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 휴지를 버리는 행동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휴지를 마구 버릴 경우에 생기는 문제점은 무엇입니까?

―마구 버리니 더이상 버릴 휴지가 없게 된다.

―주위환경이 아주 깨끗해진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옳은 행동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오늘도 영이는 훌륭하게 숙제를 끝마쳤다. 6시 39분의 일이었다. 영이는 교과서를 탁 덮었다. 그러자 십정초등학교 5학년 3반 18번 김영이 하고 씌어 있는 게 보였다. 영이는 꼼짝 않고 앉아 하염없이, 십정초등학교 5학년 3반 18번 김영이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그런 영이를 바라보는 순이는 너무나 슬퍼졌다. 영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일곱시가 넘어 있었다. 부엌에서 달그락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빠가 흐느적대는 목소리로 영이를 불렀다. 영이야,오, 밥 먹자. 영이가 어떤 알 수 없는 기대를 갖고 문에 손을 댄 순간, 부엌에서는 탈칵하고 병뚜껑 따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서 콸콸콸 시원스럽게 쏟아져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영이는 반대쪽 벽까지 튕겼다가 가까스로 돌아왔다. 영이의 알 수 없는 기대란 아빠가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이었나보다. 아빠는 또 술을 마신다. 특히 ‘또’라는 말이 지하 4338층 정도의 깊이에서부터 천천히 울려퍼진다. 아빠는 또 술을 마신다. 문을 열고 나간 영이의 눈에 아빠 손에 들린 맥주잔이 보였다. 그 맥주잔은 아빠만했다. 아니 아빠가 맥주잔만해 보였다. 아빠는 알코올 숨결을 내뱉으며 영이를 지나서 안방으로 갔다. 밥 먹자, 여보,일어나. 영이의 마음이 휘청거린다. 지구도 따라서 휘청거리는 것 같다. 순이는 부엌 천장을 파닥파닥 날아다닌다. 영이는 얼마나 멋진 저녁식사 시간이 될지 잘 알고 있었다.

 

영이네 집은 언제나 이렇다. 영이의 첫번째 기억은 고구마가 덜 익었다며 삶은 고구마를 던지며 싸우는 엄마와 아빠였다. 영이가 세살 때의 일이다. 영이한테 그 기억은 보랏빛으로 아주 달콤하게 남아 있다. 기억 속에서 영이는 해맑게 웃고 있다. 아주 순진하게 웃는다. 기억 속의 엄마는 하나도 말 같지 않았고 아빠는 술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냥 천천히 그리고 꿈같이 날아다니던 보라색 고구마들이 있다. 그런데 그 사건이 사실은 그렇게 훈훈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 영이가 일곱살 되던 해 가을의 일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국수가 덜 익었다며 뜨거운 국수 가락을 집어던지고 펄펄 끓는 국수 국물을 퍼부으며 싸웠다. 그래서 엄마는 왼쪽 팔이 벌겋게 익고 커다랗게 물집이 잡혔다. 아빠는 오른쪽 장딴지와 종아리에 화상을 입었다. 그때 엄마는 쉰한 개 정도의 욕을 늘어놓았고, 아빠는 주먹으로 엄마의 왼뺨을 갈겼다. 엄마는 이가 부러졌다. 화가 난 엄마가 아빠의 엄지손가락을 덥석 물었고, 마치 개처럼, 흘러나온 피가 아빠의 베이지색 면바지를 흥건히 적셨다. 영이는 우물우물 국수를 씹으며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때 영이는 순이가 없었다면 미치거나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끔씩 영이는 그때 자기가 죽었다면 엄마와 아빠가 다시는 싸우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순이 때문에 영이는 죽을 수가 없었다. 순이는 몹시 떠는 영이의 몸을 꼭 껴안았다.‘언제까지나’라는 듯이. 순이는 그렇게 영이 앞에 나타났다. 두 눈에서 흘러내리던 눈물이 말라붙어 영이의 뺨에 허연 가루를 만들 때까지도 순이는 영이를 안고 있었다. 그래서 영이는 정신을 잃지도 못했다. 영이는 너무나 말짱한 자신이 부끄러웠다. 자기 마음이 나무껍질처럼 메말랐다고 느꼈다. 그게 다 순이 탓인 것을 영이는 몰랐다. 순이가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이는 자기가 너무너무 약하다는 것을 몰랐다. 순이가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영이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하지만 도대체 왜 엄마와 아빠가 자꾸만 싸우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덜 익은 국수를 증오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 이후로 영이는 덜 익은 국수를 못 먹는다. 영이는 너무 익어서 풀같이 된 국수만 먹는다. 똑같은 날들이 그 뒤로도 끝도 없이 이어졌지만 그날에 비하면 시시했다. 하지만 매번 그날과 똑같이 끔찍하다.

 

여기 영이가 있다. 그 옆에 정체불명의 순이도 있다. 영이는 밥을 먹기 위해 식탁 앞에 앉았다. 영이의 마음이 두근댄다. 내 마음도 두근댄다. 영이의 마음이 이렇게 두근거리는데 순이는 즐겁다는 웃음을 짓고 있다. 무슨 일이 벌어질까 너무너무 재미있다는 표정이다. 두근대는 영이는 자신이 웃고 있다고 착각하고 만다. 심장이 뛰는 소리에 정신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영이는 그런 자기가 너무 사악하게 느껴졌다. 사실 영이는 순이가 진짜 영이, 그러니까 정말 자기라고 생각한다. 아, 드디어 엄마가 방에서 나온다. 여기서 나는 소주를 한잔 마셨으면 좋겠다. 그것도 커다란 머그컵으로 단숨에 마시면 좋겠다. 하지만 내게는 미지의 목소리가 들리기 때문에 계속 쓰겠다.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쓰겠다. 다 쓴 다음에 나는 울겠다. 왜냐하면 팔이 아프니까. 다 쓴 다음에 나는 팔이 아프겠다. 왜냐하면 울고 싶으니까. 그리고 내 이야기를 듣지 않는 놈들은 다 죽여버리겠다. 왜냐하면 내 이야기니까.

 

엄마가 식탁에 앉는다. 불길함이 붉은개미 군단처럼 순식간에 식탁을 뒤덮었다. 불길함은 어젯밤 카지노에서 돈을 많이 잃었는지 만사가 귀찮고 피곤하다. 하지만 그가 최선을 다할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pm 7:17

거실, 영이의 방, 안방―텅 비어 있다.

부엌―1. 술에 취한 아빠가 저녁을 차리고 있다.

2. 순이는 영이 옆에 얌전히 앉아 있다.

3. 진홍색 잠옷을 입은 엄마가 방금 의자에 앉았다.

4. 된장찌개와 오징어젓갈, 김, 깍두기, 감자멸치볶음, 숟가락, 젓가락, 오이지무침과 잡곡밥 주변을 목적 없이 방황하는 지치고 피곤한 불길함.

 

아빠가 술을 마신다. → 엄마가 욕을 한다. → 아빠가 엄마를 때린다. → 엄마와 아빠가 싸운다.

 

아빠가 술을 마시면 엄마는 욕을 하고 아빠는 엄마를 때리고 둘은 싸운다. 한 문장으로 쓰면 될 것을 나는 왜 이렇게 많은 문장을 쓰고 있나. 왜냐하면 백 문장에는 백 문장의 진실이 있고 한 문장에는 한 문장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의 고통과 나의 고통이 다른 것처럼, 열 시간의 고통과 십 분의 고통이 다른 것처럼, 백 문장의 진실과 한 문장의 진실은 다르다. 이것은 아주 고통스러운 광경이기 때문에, 한 문장―삼 초간의 고통이 아니라 천 문장―삼천 초의 고통을 안겨줘야 한다. 그래야만 당신도 느낄 수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읽는 당신을 원하지 않는다. 느끼는 당신을 원한다. 나는 아주 오래 느끼는 당신을 원한다. 당신은 아주 오래 느껴야 한다. 한번 더 사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오랫동안 말이다. 그래야 영이가 당신 마음속에 오래도록, 영이가 죽고 내가 죽은 뒤에도,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영이네 집에는 언제나 클로즈업된 긴장감이 감돈다. 그리고 그외엔 아무것도 없다. 영이네 집에는 욕과 술과 싸움이 있다. 엄마는 예쁘고 아빠는 멋지다. 그리고 영이는 귀엽다. 영이네 집에는 차도 있다. 영이네 집에는 집도 있다. 영이네 집에는 네 발 달린 욕조도 있다. 하지만 영이네 집에는 아무것도 없다.

 

영이는 길고 길게 죽고 싶다고 느낀다. 그러니까,

(11pt, 명조체, 오퍼씨티 25% 정도의 비명) 제발 죽여주세요.

 

술에 취한 아빠는 헤벌쭉 웃으면서, 자, 밥을 먹자. 엄마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그러자 엄마가 거칠게 아빠의 손을 밀쳤다. 순간 휘청했던 아빠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영이는 너무 놀라 두 눈이 쟁반처럼 커졌다. 엄마가 내려놓은 물컵이 식탁 유리와 부딪쳐 소리를 냈다. 그런데 식탁은 아주 조용했기 때문에 그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렸다. 술에 취해 예민해진 아빠의 두 귀가 놀라 펄쩍 뛰었다. 시끄러워 죽겠어, 어휴. 좀 조용히 좀 해애. 아빠는 짜증에 절어 쥐어짜는 목소리로 말했다. 야 이 개새끼야 내가 저녁 안 먹는다고 했잖아. 엄마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엄마의 말이 아빠의 귀를 덥석 깨물었다. 새까만 피를 흘리며 아빠는, 젓가락을 내려놓고 밥을 빨간색 전기밥통 속에 도로 넣었다. 밥통을 닫은 다음, 아빠가 엄마를 때리기 시작했다. 엄마의 비명소리. 살을 찢는 아빠의 주먹소리. 경련하는 엄마의 몸. 쿵쿵 울리는 차가운 마룻바닥. 이럴 때 영이는 일시정지한다. 순이가 왼손 집게손가락으로 일시정지 버튼을 꾹 눌렀기 때문이다. 영이의 눈은 길게, 아주 길게 뻗은 터널이다. 터널은 어둡고 무거우며 무엇보다 죽어 있다. 터널은 흔들리지 않는다. 조용히 뻗어 있을 뿐이다. 저 끝에 두 개의 작은 그림자가 흐릿하게 비친다. 영이의 터널은 멍하니 그 빛의 덩어리들을 비춘다. 그러면 순이는 터널의 끝에 있는 두 개의 그림자를 바라본다. 두 개의 그림자는 한순간 집채만해졌다가는 다음 순간 하늘 높이 날아가버린 빨간 풍선이다. 지루하게 주먹을 날리던 아빠는 주먹이 시려오는지 손목을 털며 두리번거리다가 빨간색 전기밥통을 발견했다. 엄마는 너덜너덜한 진홍색 잠옷을 왼쪽 어깨에 겨우 걸치고는 거실로 기어서 도망가고 있다. 아빠는 밥통으로 정확하게 엄마의 왼쪽 어깨를 내리쳤다. 그러고는 엄마의 두 발을 잡고 부엌으로 질질 끌어왔다. 밥통을 집어던지고 누워 있는 엄마의 옆구리를 걷어차기 시작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빠는 오른쪽 발로 엄마의 오른쪽 골반을 걷어차고 있다.

 

아빠가 비틀대며 밖으로 나갔다. 쾅 하고 문이 닫혔다. 엄마의 신음소리에는 욕과 울음이 진하게 섞여 있다. 엄마가 절뚝거리며 일어나 의자에 기대앉는다. 그리고 성한 오른팔로 식탁 위에 널려 있는 그릇을 싱크대를 향해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그릇이 싱크대에, 찬장에, 싱크대 뒷벽에 부딪혀 깨졌다. 그릇이 깨질 때마다 영이의 마음도 또 한번 깨졌다. 이번에 영이는 깨진 그릇이다. 순이가 얼음눈을 하고 조각나 흩어지는 영이를 바라본다.

엄마가 울음 섞인 욕을 내뱉는다. 엄마가 욕을 한 개 할 때마다 영이는 뇌가 한꺼풀 벗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영이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어서 이렇게 생각했다. 누군 욕할 줄 몰라서 안하나? 하지만 진짜로 말하지는 못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혼자 남은 엄마도 결국은 흉하게 흐느끼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영이는 엄마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왜냐하면 엄마는 욕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영이는 아빠가 너무나 밉다. 너무나 미워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이다. 커다란 아빠가 작은 엄마를 때리는 것을 보면 벌어져서는 안되는 일들이 참으로 쉽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 세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영이는 울며 끌어안을 오빠도 없다. 하지만 괜찮다. 그런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기 때문이다. 영이는 혼자라는 것을 공기처럼 당연하게 생각한다. 영이는 싸움이 끝도 없이 두렵지만, 고작 커다란 귀가 될 뿐이다. 저 두 사람이 없었다면 자기는 태어나지도 못했다는 것을, 영이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영이는 무턱대고 욕을 하지도 못했다.

 

영이는 창문을 보다가 비가 내리는 것을 발견했다. 아빠는 우산도 없이 나갔는데. 아빠는 어디로 갔을까?

 

영이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서. 국어시험 걱정 같은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누워서, 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는 것만을 하고 있었다. 그런 채로 십분이 지났을 때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 씨발년아. 이 개같은 년아. 넌 내가 그렇게 우습냐? 나와 이 쌍년아! 니 애비가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든? 아니면 니 에미가 서방한테 그렇게 하라고 가르쳤냐 쌍년아. 내가 왜 너 같은 년이랑 결혼해서 이런 지랄을 당해야 되냐? 너 같은 에미가 키운 딸년이 어떨지 지인짜 걱정된다. 저년도 똑같아. 저 씨발년도 지 에미랑 아주 똑같아. 아유, 이 개같은 년. 내가 아주 죽여버릴 거야. 쌍년아, 나와! 문 열어 이 미친년아!

영이는 사자한테 산 채로 살점을 물어뜯기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영이는 생각했다. 아, 난 이제 더럽혀졌다. 난 이제 채은이나 은영이 같은 애들과는 영영 달라져버렸구나. 나는 듣고 싶지 않은데. 듣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영이는 문가에 엎드려 두 손으로 무릎을 잡아뜯으며 빌기 시작했다. 빌고 또 빌었지만 삼십분째 들려오는 소리는 같았다. 하나님한테 빌지 않아서 그런가. 하지만 영이는 기독교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한테 빌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떡하면 좋은가. 하나님, 죄송하지만 내 기도 좀 들어주시면 안될까요? 들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시면 제가 교회에 갈게요. 가겠습니다. 정말로 교회에 가겠습니다. 온갖 생각들이 영이의 머릿속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영이는 점점 더, 아,춤이 참으로 아름답구나, 따위의 생각을 한다. 영이가 조금씩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수천만 명의 얼굴 없는 사람들이 짝을 지어 춤을 추며 영이에게로 다가온다. 춤이 지나가는 자리에는 모든 것이 소리도 없이 무너져내렸다. 꽃이 지고, 별은 깨지고, 풀도 검게 녹았다. 새끼를 밴 암사자가 입으로 새끼들을 토해냈다. 암사자는 토해놓은 핏덩이들을 허겁지겁 삼켰다. 그러자 수사자가 암사자를 잡아먹었다.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존재하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빙글빙글 미친 듯이 돌고, 아주 세게 껴안으며 영이에게로 다가왔다. 수천만 명의 엄마가, 수천만 명의 아빠가 영이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온세상이 다 무너져내렸다. 누렇고 아무것도 없는 땅에서. 엄마는 맨발에 진홍색 잠옷을 입고 있다. 엄마가 스텝을 밟으며 지나간 자리는 피로 흥건했다. 아빠는 갈색 슈트를 입고 있었다. 파란 지평선을 흙먼지로 덮으며 수천만 명의 아빠와 엄마가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다. 빙글빙글 돌면서. 엄마들과 아빠들은 점차 다가와 영이를 짓밟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다. 백 걸음은 금방 서른 걸음이 되었다. 서른 걸음은 영이가 눈을 한번 ‘깜빡’하자 다섯 걸음이 되었다. 세 걸음에서 영이는 눈을 감았다. 엉켜 있는 실들이 팽팽히 당겨지는 게 보였다. 실은, 끊어지는 중이다.

 

순이가 잽싸게 영이를 낚아챘다.

 

영이가 번쩍 눈을 떴다. 시야는 텅 비어 있었다. 실도, 깨진 별도, 엄마들도, 아빠들도, 아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영이는 단지 무릎을 쥐어뜯으며 문앞에 엎드려 있다. 순간 영이는 순이를 죽이고 싶어졌다. 진심으로 죽이고 싶었다. 나를 그냥 놔둬. 영이는 처음으로 순이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내가 미치게 그냥 놔둬. 내가 죽게 내버려둬. 오늘을 견디면 내일이 올 뿐인데. 또 같은 날이 올 뿐인데. 차라리 미쳐버리는 게 낫지 않겠니? 더이상 아무것도 모를 테니까. 아픈 것은 이걸로 충분해. 나는 이만큼 느꼈으면 됐어. 그러니까 나는 이만큼만 살래. 여기까지 살 거야. 더이상은 안돼. 순이야, 날 그냥 놔둬. 나는 하나도 안 고마워. 내가 어떻게 되는지는 내가 정해. 영이는 영이가 정해. 순이는 없어져! 넌 아무것도, 있지도 않은 거잖아? 니가 뭘 알아? 너한테는 눈물도 없고 너한테는 잠도 없고 너한테는 피도, 아픈 것도 없잖아? 그러니까 이제 꺼지란 말이야. 영이가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순이는 정말로 더이상 없었다. 영이는 어리둥절했다. 허전하고 산뜻한 느낌이 들었다. 아! 다음 순간 영이가 깨달았다. 순이가 사라졌다! 영이는 영이다! 영이의 영이도 영이다! 영이의 몸도 영이다! 나는 영이다! 영이는 너무 기뻐 짝! 하고 손뼉을 치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쉽게 끝난 일도 있었다. 영이가 고개를 돌리자 엄마들과 아빠들은 영이를 피해 벌써 저 너머 귤색 지평선에 닿아 있었다. 실망한 영이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밖은 까맣게 졌고 아빠의 목소리도 없었다. 영이는 죽은 듯 조용히 침대에 누워 빨리 열두시가 지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이제 겨우 아홉시다. 아직도 바다 한가운데. 온통 찰랑대는 검은 물뿐. 수평선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빠가 욕 하나를 채 내뱉기도 전에 엄마가 부서져라 안방문을 밀고 나왔다. 엄마의 발소리가 거실을 울렸다.현관문이 열렸다가 쾅 하고 닫혔다. 영이는 차라리 안도했다. 영이는 몸을 뒤집어 멍하게 천장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불을 끌어당겨 어깨를 가렸다. 그리고 울었다.

 

아빠는 뜰 안 감나무 아래 있었다. 옆에는 빈 술병이 보인다.아빠는 술병을 몰고 다니는 사람 같다. 나는 차라리 아빠가 술의 신으로 밝혀지기를 바라본다. 어, 나왔네? 아빠는 해쭉 웃더니 손을 뻗었다. 하지만 엄마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고 있다. 엄마는 아빠를 보지 않았다. 뜰 한편에 세워진 삽을 보고 있었다. 엄마는 삽으로 냅다 아빠의 뒤통수를 갈겼다. 아빠가 바닥에 쓰러졌다. 엄마는 있는 힘을 다해 삽으로 아빠를 때리기 시작했다. 엄마의 왼쪽 어깨는 훌륭하게 움직였다. 아까 분명히 밥통으로 제대로 찍혔는데 이상하다? 아무튼 아빠는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엄마는 계속해서 때렸다. 몇분이 지나자 아빠는 끔직한 목소리로 살려달라고 빌기 시작했다. 이마가 깨져서 피가 흐르고 팔과 다리에도 빨갛게 부어오른 삽 자국들이 생겨났다. 개새끼야, 이 개만도 못한 새끼야, 넌 개만도 못한 새끼야. 개새끼야, 살고는 싶냐? 그럼 짖어봐 이 개새끼야! 엄마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아빠를 삽으로 찍었다. 짖어봐, 개새끼야. 이 개같은 놈아. 엄마는 거의 흐느꼈다. 계속해서 죽일 듯이 아빠를 때렸다. 아빠의 머리에서 퍽 하는 소리가 났다. 아빠는 정말로 죽을 것 같다. 짖어보라니까 개자식아아! 오. 그러자 정말로 아빠가 짖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마치 개처럼! 당황한 엄마가 멈춰섰다. 나도 잠깐 멈췄다. 영이도 눈을 크게 떴다. 아빠는 정말이지 개처럼 짖고 있었다. 벌벌 떠는 피투성이의 몸으로, 두려움에 검게 번들거리는 커다란 눈으로 마구 짖어대는 아빠는 정말로 개 같았다. 엄마는 겁에 질려서 아빠를 더욱더 미친 듯이 때리기 시작했다. 그래, 이참에 아주 개가 돼라. 개랑 사는 게 너랑 사는 것보다는 낫다. 이 개새끼야. 엄마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삽을 내리치는 소리가, 아빠의 신음소리가, 나른하게 이어졌다. 점점 아빠가 내는 소리는 앙칼진 개의 비명소리가 되어갔다. 엄마는 이제 완전히 정신이 나갔다. 그건 피가 흥건한 기쁨이었다. 자세히 보면 엄마는 실 같은 미소를 띠고 있다. 엄마는 여덟번째로 아빠의 머리통을 내리쳤다. 개새끼. 아. 엄마는 팔이 저려왔다. 그리고 진심으로 아빠가 차라리 개였으면 하고 생각했다.

 

아홉번째로 내리치려는 찰나 엄마가 감았던 눈을 뜨자 그곳에 있는 것은 정말로 커다란 개 한마리였다. 황갈색 몸이 피로 흥건했다. 개는 혀를 쭉 빼고 아무런 방어도 하지 않은 채 눈을 반쯤 뜨고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엄마의 눈이 개의 눈과 마주쳤다. 흐릿한 검은 눈은 플라스틱 구슬처럼 아무런 촛점도 없었다. 엄마가 삽을 떨어뜨리고 뒷걸음질을 치다가 감나무에 부딪혔다. 엄마는 입을 쩍 벌리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엄마가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했다. 개새끼가 정말로 개가 됐네!

 

영이는 멍하니 천장을 보면서 엄마가 아빠를 때리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전부 다, 하나도 빠짐없이. 영이는 엄마들과 아빠들이 저 멀리서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서로를 꼭 껴안고 빙글빙글 돌면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저 멀리서. 멀리서. 가까이. 더. 좀더. 좀더 가까이. 그런데 갑자기 엄마가 미친 듯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개새끼가 정말로 개가 됐네!

개새끼가 정말로 개가 됐네!

개새끼가 정말로 개가 됐네!

개새끼가 정말로 개가 됐네!

개새끼가 정말로 개가 됐네!

 

영이는 밖으로 달려나갔다. 엄마는 감나무 아래 주저앉아 정신나간 웃음을 지으며 끝도 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커다란 황갈색 개가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었다. 영이는 아무 말도 안했다. 엄마는 계속해서 같은 말을 하고, 아빠는 개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어차피 영이의 말을 들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말이다. 말하는 엄마와 개 아빠. 그리고 순이가 없는 영이. 영이는 가만히 서서 저 멀리를 바라봤다. 어느새 영이는 수천만 명의 엄마와 수천만 명의 아빠가 다가오고 있는 황무지 벌판에 서 있었다. 엄마들과 아빠들은 벌써 영이의 코앞까지 와 있었다. 이제 영이는 아빠와 엄마의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엄마는 빨간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웃고 있는 말이었다. 아빠는 촉촉한 검은 코를 벌렁거리는 누런 개였다. 다음 장면에서, 빙글빙글 도는 엄마와 아빠는 벌써 저 멀리 멀어져 버렸다. 수천만 명의 엄마와 수천만 명의 아빠가 빙글빙글 돌며 짙은 주홍색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영이를 찾았다. 내 발끝에 닿은 영이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영이가 흙먼지 가득한 황갈색 땅에 혼자 누워 있었다. 남김없이 짓밟힌 영이는 빨갛게 웃고 있었다. 다음 순간 짙은 노을이 순식간에 영이를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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