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금희 金錦姬

1979년 부산 출생.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너무 한낮의 연애』 등이 있음. novelist79@hanmail.net

 

 

장편연재 4

경애(敬愛)의 마음

 

 

6. 살인은 연애처럼 연애는 살인처럼

 

상수는 그 새벽, 경애에게서 온 이메일을 열지 않았던 때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면 무엇보다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아니, 그럴 수 없을지도 모른다. 대학 때 상수의 선배 중에는 출가해서 스님이 된 사람이 있는데, 언젠가 상수가 형, 번뇌를 어떻게 없애요, 하고 묻자 선배는 못 없애,라고 단언했다. 아니, 그렇다면 대체 불공은 왜 드리고 108배는 왜 올리는가 싶어서 상수가 항변하려고 하자 선배는 좀 머뭇거리며 “야, 내 번뇌도 못 없애” 하고 고백했다. 그런 선배의 승복 안으로 나이키 로고가 새겨진 티셔츠가 슬쩍 보여서 상수도 더이상 묻지 않았다. 그러니까 인생은 손쓸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냥 포기해버려야 하는 것이었다. 마음의 번뇌와 갈등, 고통, 어떤 조갈증, 허기 같은 건 지병처럼 가져가야 하는 것이었다. 하기야 아프면 고쳐가면서 쓰는 게 몸이라고 하는데 마음이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대체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싶으면서도 상수는 경애가 이런 행동을 할 때 번뇌의 방아쇠가 탕, 하고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까 직역을 하자면 “얼어 있는 프랑켄슈타인”쯤이 될 수 있는 그 아이디를 통해 경애에게서 오는 이러한 답장 같은 것.

 

네, 언니 분이 편지에 써주신 그 많은 독설 잘 읽었습니다. 돈 받고 하는 일도 아닌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런 마음은 어떻게 폐기되는 건가요? 싹 다 폐기하라고 쓰셨는데 구체적인 방법은 언급이 없어서요.

 

첫 편지를 받은 날, 상수는 경애가 그렇게 설레어하며 문자메시지를 주고받고 전화하는 상대가 일찍이 경애를 그렇게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떠나버린 옛 애인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더구나 그가 여전히 결혼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말 그대로 무참한 슬픔을 느꼈다. 그런 이기적인 누군가의 착취를 사랑이라고 착각하다니, 그런 관계 속으로 자기를 몰고 들어가는 건 죄악에 가까운 일이야! 상수는 그래서 그 새벽에 자기도 모르게 경애에게 전화를 걸고 말았는데 그사이 잠이 든 경애가 여보세요,가 아니라 아 좀, 누구야, 하고 퉁명스럽게 받는 바람에, 경애씨, 제가 잘못 걸었습니다, 더 자요, 미안해요, 하고 끊고 말았다.

‘언니는 죄가 없다’ 페이지를 운영하면서 상수가 만난 여자들은 카테고리화할 수 있을 정도로 유사한 비극에 노출되어 있었는데, 그때마다 상수는 모든 잘못은 남자들의 빤한 이기심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상수가 10대였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런 남자들의 모습을 집단적으로 확인할 기회는 너무나도 많았다. 남자들의 이야기 속에서 여자들은 다른 신체는 없이 오로지 성기와 가슴만 지닌 존재처럼 여겨졌는데 그렇게 벗겨지고 지워진 얼굴들에 대한 시시덕거림이 은은하게 퍼져나갈 때면 상수는 내장기관 어딘가가 운동하면서 메스꺼워지곤 했다. 혐오스러웠다.

그래서 상수는 남자들의 사랑에 회의적이었는데, 그런 감정은 누군가를 아끼고 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권력관계에서 발생하는 피가학의 열도 정도로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상수가 이를 분명히 자각한 건 재수학원에서였다. 거기에서는 150명 정도의 남학생들이 숙식을 함께하며 공부했는데 마치 군대의 신병훈련소처럼 ‘생활조교’라는 사람이 있어서 일상의 규율을 정하고 통제했다. 6시 기상시간에 일어나기, 5분 안에 화장실 다녀오기, 15분 식사, 자율학습 시간에 자율적으로 새벽 2시까지 공부하기 같은 일반적인 규칙에서, 머리모양은 스포츠형, 계절별로 사전 등록한 상하 각 3점씩의 의류만 소유, 휴대전화 소지 금지, 일과 중 모자 착용 금지, 원내외 사적인 만남(대화, 신체접촉) 금지 같은 세세한 룰까지 조교가 입소생들의 생활 전반을 통제했다.

물론 상수는 언제나 그런 규칙의 파괴자였다. 뭔가 의지를 가지고 파괴한다기보다는 천성이 게을러서 어쩔 수 없이 그것에 반하게 되는 안타까운 고문관에 가까웠다. 재수생활이 오래되면서 상수에게는 점점 긴장이랄 것이 없어졌다. 11월이 되면 이놈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만큼 부당하게 특별한 하루, 수능 시험일이 오고야 만다는 사실마저 이 우울한 과체중의 삼수생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당연히 일어나야 할 시간에 일어나지 못했고 달려야 할 때 달리지 못했다, 음악을 들어서는 안 되는 시간에 음악을 들었으며 먹어서는 안 되는 시간에 먹었다. 불빛이 새어나가면 안 되니까 불을 끈 채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컵라면으로 젓가락질을 하고 있으면 그 MSG로 풍미를 한껏 살린 국물에 혓바닥의 온갖 미뢰가 자극되면서 비로소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감각은 남은 수능 날짜를 카운트해서 알려주는 학원의 대형 전광판이 아니라, 동일한 트레이닝복을 맞춰 입고 앉아 “관용이란 인간애의 소유이다. 우리는 모두 약함과 과오로 만들어져 있다” “인생의 위대한 목표는 지식이 아니라 행동이다” 같은 명언들이 지문으로 등장하는 사회탐구 문제 풀이 시간이 아니라, ‘라면’에 있었다. 오직 라면 국물만이 이 느글거리는 권태와 지리멸렬함 속에서 상수를 구원했다. 아니, 구원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또다른 구원이 있기는 했다. 일단 한동안은 구원이었다.

 

그해 여름, 새로운 생활조교가 부임했다. 해병대 신병훈련소 조교 출신에, 체육교육학과를 졸업한 그는 너무 근육질이라 몸이 마치 공사장에서 쓰는 ‘오함마’, 해머 같았다. 다른 선생들은 상수를 닦달하기는 했지만 워낙 상수가 들어먹지를 않고 안 그래도 꽤 괜찮은 집의 막내둥이였기 때문에 마치 사기접시를 퐁퐁으로 닦듯 조심조심 다루었는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상수가 늦잠을 자서 오전의 햇볕이 기숙사 침대까지 들어와 상수의 이마를 조용히 짚으면 뒤이어 그가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나옵니다!”라고 소리 질렀다. 그건 피아의 구분도 없고 능동도 피동도 아닌 애매한 상태의 동사였다. 하지만 얼른 바지를 꿰어입고 침대에서 내려와 운동장으로 얼차려를 받으러 오라는 뜻이라는 건 상수도 뭐 바보가 아니니까 바로 알았고 조교가 버티고 서 있는 이상 움직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느적느적 나가보면 거기에는 상수뿐 아니라 예닐곱의 학생들이 엉성한 대오를 이룬 채 서 있었다.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는 얼차려의 시작을 항상 그런 말로 열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으면 그는 그렇게 한마디를 던져놓고 가만히 기다렸는데 대기시간이 길어지면 결국 이쪽 손해니까 누군가가 마지못해 묻게 되었다.

“선생님, 뭐가요?”

“의지.”

그렇게 답하고 나서 조교는 다시 한번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중요합니까, 중요하지 않습니까?”

“의지 말인가요?”

“대학.”

그는 이렇게 굳이 묻지 않아도 되는 것을 질문으로 만드는 말버릇이 있었다. 딱히 상대의 대답을 기대하는 것이 아닌 줄 알지만 질문의 형식을 띠고 있으니 하는 수 없이 귀 기울이게 되고 뭔가 관심이 갈락 말락 하다 막상 답변을 듣게 되면 시시해서 헛웃음을 짓게 되는. 하지만 그런 하나 마나 한 대화는 이어질 얼차려를 위한 일종의 사전작업일 뿐이었고 그들이 어떤 대답을 하든 올 건 왔다. 일고여덟차례의 선착순 달리기나 철봉에 매달리기 혹은 토끼뜀 같은 것이. 쏟아지는 햇살 아래 그렇게 받는 벌은 참 괴롭고 귀찮았는데 이상한 건 막상 얼차려를 받기 시작하면 상수의 마음이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요동친다는 것이었다. 눈이 양옆으로 찢어지고 턱은 사각으로 단단했으며 피부가 까만 편인 그가 양손을 허리춤에 얹고 “실시” “그만” “복창” 같은 지시어로 상수의 신체를 조련할 때면 상수의 마음은 마치 팝콘이 터지듯 온갖 감정들로 터지곤 했다. 라면에만 열렬히 반응하던 여름 이전의 마음과는 달랐다. 거기에는 모멸감도 있었고 공포도 있었으며 분노와 혐오와 슬픔이 있었지만 아주 뚜렷하게는 분명 이상한 방식의 갈구가 있었다. 조교가 상수를 누르면 누를수록 이상하게 그를 향해 어떤 갈구가 일어서고 있었다.

처음에는 자기를 피곤하게 만드는 사람에 대한 꺼림칙함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가 그렇게 당연한 듯 상수를 윽박지르고 간섭할 때 지시와 명령으로 위계를 설정할 때 도리어 그가 상수에게 기숙학원의 어떤 사람들보다 특별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상수는 조교가 미웠지만 어느 자리에서 마주치든 신경을 바싹 쓰고 있었고 그가 탄식하듯 공상수 학생 참 안타깝지 말입니다,라고 한마디 한 날이면 마치 머신처럼 정해진 몇개의 단어들로 얼차려 시간을 꾸려가던 것과 비교해 이제 그런 기계적인 관계로는 해결되지 않는 어떤 감정의 교환 상태를 만든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을, 안 하던 운동을 하는 바람에 근육통이 온 가운데 줄기차게 하곤 했다. 그러면 상수의 방배동 집에 있는 그 숱한 사랑의 교과서들, 상수를 깨우치고 단련시켰던 그 수많은 영화와 소설들이 생각났고 그것들이 총동원돼 지금 상수가 느끼는 감정이 바로 애정의 또다른 형태라는 사실을 알려주곤 했다. 이것이 사랑이라니! 그런 생각이 들면 상수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도 놀라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때까지 상수는 피가 돌고 살이 있는, 그러니까 실제 형태의 몸이 있는 누군가와 사랑을 해본 적이 없긴 했지만 이런 형태는 아닐 것이었다. 하지만 아니다,라고 마음먹고 조교를 대하려고 해도 그가 상수를 뛰게 한다든가, 팔을 뻗게 한다든가, 뜀뛰기! 뜀뛰기!를 강제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 몸이 힘든 만큼 마음이 또다시 제어할 수 없는, 감정의 파티 상태가 되면서 뜨거워졌고 이 육체의 고통을 종결할 수 있는 사람은 생활조교뿐이니까 그를 향해 분노와 원망과 울분이 달려가다가 끝내는 자기가 이 관계에서 완전한 약자가 되어 그의 선처, 용서, 동정과 연민을 바라게 된다는 걸 투항하듯 동의해야 했다. 어쨌든 그는 특별했고 상수도 그가 자기를 좀더 특별하게 여기기를 바랐다. 그런 특별함이 자기 인생에서 기록할 만한 사건이지는 않으리라 부정하면서도 상수는 하지만 무릇 사랑이란 그런 권력의 격차 속에 환상처럼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상수가 다 젖은 솜이불처럼 무거운 몸을 침대에서 빼내지 못해 1교시 수업에 늦고 만 가을날, 상수는 어차피 받을 얼차려니까,라고 자신의 마음을 좀 숨겨가며 조교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운동장으로 나갔다. 오늘은 대체 몇바퀴를 돌아야 하나 상수는 생각했다. 까짓것 뛰지 뭐, 싶기도 했다. 살도 좀 빠진 것 같았다. 양말을 신기가 좀더 용이했다, 고개를 완전히 숙이지 않아도 발가락이 내려다보였다. 하지만 조교는 상수를 보고도 알은체하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운동장 스탠드에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상수는 그가 지시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니까 중요하지 않습니까? 있습니까, 없습니까? 물으면서 운동장의 어느 목적지를 가리킬 때까지. 하지만 조교는 마치 상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거기에 없는 사람처럼 자기 할 일만 하더니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응응, 그러니까 청량리? 청량리로 가면 되냐? 청량리지?라고 물었다. 청량리라니, 여기 용인의 기숙학원과는 얼마나 상관없이 들리는 지명인가.

“선생님, 늦었습니다.”

이윽고 침묵을 이기지 못해 상수가 먼저 말을 걸었다. 조교는 그런 상수를 바라보다가 “우리 뭐 약속이 되어 있었어요?” 하고 물었다. 상수는 ‘다’나 ‘까’로 끝나지 않는 그 생경한 어미의 문장을 마음속으로 한번 되새겨보았다. 있었어요? 하는, 상수도 쓰고 상수의 친구들과 강사들도 다 쓰지만 유독 이 해머 같은 남자는 쓰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청량한 문장을.

“제가 지각을 했거든요.”

그러자 조교는 상황 판단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러면 여름을 보내는 동안 이 운동장에서 내내 열띠게 진행되었던 그 작업에 착수해볼까 하면서 상수가 운동화 끈을 고쳐 매는 순간, 조교가 상수에게 “이제 안 해요. 제가 계약이 끝났어요” 하고 말했다. 그러면서 조교는 왜 그런지 좀 말갛게 웃었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순박하고 천진하고 어딘가 세상일에 좀 심드렁한, 깃털처럼 가벼운 20대의 미소가 그 얼굴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런데 그 순간 상수는 뭔가 당황스러운 느낌이었다.

“끝났다고요? 선생님?”

“수능 3주 남기고 누가 얼차려를 받습니까. 연필 하나가 책상에서 또르르 떨어져도 마음이 철렁한 마당에 왜 괴롭혀요. 이제 그런 시기는 지났죠, 없죠. 저도 뭐 임시직이었고요.”

상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강렬한 강도로 자기를 다그치고 닦달했던 것이 그냥 기숙학원과의 계약이 끝나면 사라지는 것이었다니. 그렇다면 대체 자기를 그렇게 조련할 수 있는 권리는 애초에 어떻게 생겨난 것이었나. 상수에게 실감되었던 그 숱한 감정들은 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수능시험 날 졸리면 안 되니까 늦잠 버릇 이제부터 꼭 고치시고요. 단백질, 비타민 같은 거 챙겨 먹고요.”

조교는 그런 조언과 시험 잘 보라는 격려를 마지막으로 상수의 시야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해머처럼 단단한 그 몸이 멀어질수록 상수의 마음에는 뭔가 ‘단도리’가 쳐지는 느낌이었다. 봉쇄되는 기분이었다. 가을을 맞은 운동장에서는 낙엽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축포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뒤로 상수는 혼자 쓸쓸히 거리를 걷거나 새벽 네다섯시에 깨어 우두커니 침대에 앉아 있을 때, 버스를 타고 가다가 옆좌석의 사람들이 크게 웃거나 자기들끼리 뭔가에 대해 열의 있게 대화할 때 그 가을의 오후가 떠올랐다. 자신을 그렇듯 풍성하게 하던 감정과 그것이 어느 임시직의 쓸쓸한 계약종료와 함께 간편하게 사라져버린 것에 대해. 그러면 늘 믿을 수 없다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시작된 것도 진행된 것도 종료된 것도 모두 마음의 일이었는데 그 마음을 흐르게 한 동력은 자가발전이 아니었다는 것, 황망한 가운데에서도 오직 그것만은 분명했다. 조교와 상수 사이에 있었던 위계가 일종의 권력의 위치에너지를 생산해 감정을 만들어냈다는 것. 그런 상수의 분석은 스스로에게 여러모로 이로웠는데 상처를 덜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그렇게 생각하면 불특정한 상실감으로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단번에 괜찮아지는 느낌이었다. 아주 말끔하게, 이를테면 고속도로 같은 것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했다. 그 길의 끝이 이제 막 도로를 포장한 콜타르의 냄새처럼 고약한 냉소와 허무 그리고 자기를 감싸는 모든 감정들에 대한 무한 회의로 이어져 있다는 건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래서 상수는 자신의 계정, ‘born-innocent’라는 언니의 계정으로 경애를 따끔하게 일깨우는 장문의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그것이 “그 많은 독설”쯤으로 정리된 것이었다. 더 구체적으로 해달라고? 상수는 불현듯 화가 나면서 그게 어떤 에너지를 불러일으키면서 경애를 그 바보 같은 짓에서 구해낼 수 있다면 그쯤은 밤을 새워서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밤만 새울 뿐인가? 아주 식음을 전폐하고도 할 수 있다, 회사도 연차 쓰고 안 나가버리고 불면의 연속된 밤을 보내면서 베트남이야 가든지 말든지…… 아니 그래도 직장은 직장이니까 파견은 가야겠지만 정작 경애는 불광동 어딘가에서 단잠에 빠져 있더라도, 자기는 질문을 받았으니까, 어떻게 폐기해요? 하고 물어왔으니까 아주 그냥 집중해서 쓸 수 있다.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들이 탭댄스를 추듯이 자판들을 옮겨 다니면서 고양이들이 우다다를 하듯이 활력 있게 언니로 살아온 칠년간의 노하우를 모두 동원해서 박경애씨 그건 사랑이 아니야!라고 알려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상수는 그 일을 미루고 있었다. 의욕이 넘치고 할 말도 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일단 그 전남친의 전화번호를 수신거부로 등록합니다. 그건 그냥 손가락을 움직여서 차단 버튼을 슬며시 누르기만 하면 돼요. 그러면 일단 그 착취의 그물망에서 반은 나온 셈입니다. 자니…… 어떻게 지내…… 어디야…… 이런 개소리를 더이상 늘어놓을 수가 없어요. 일단 그것부터 하면 됩니다. 얼른 나오라고 안 해요. 나 그렇게 성급한 성미가 아니에요. 못 나오는 언니들 많아서 내가 기다려주거든, 기다립니다, 내가, 박경애씨, 기다려요. 이런 생각들을 머릿속으로 쇠똥구리처럼 굴려가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다가 출근해보면 정작 경애는 상수가 붙여놓은 “물건은 팔되 마음은 팔지 않는다”라는 슬로건 아래 키보드를 타닥타닥 치며 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역시 박경애답게 출근과 동시에 업무 모드로군, 하고 생각했겠지만 이제 상수에게는 달리 보였다. 그러니까 지금 메신저로 그 어긋난 사랑의 상대자와 연락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뭔가를 찾는 척하면서 몰래 보면 누군가에게 쓰는 이런 문장들이 눈에 띄었다.

 

안녕, 오늘도 무사한 아침이야.

무사하다는 것은 무한과 무수 사이에서 간신히 건져 올려진 낱말 같아.

막막한 바다를 떠다니는 작은 보트처럼.

 

이런 말을 쓴다면 역시 사랑이었다. 상수의 따끔한 이메일을 받고도 그 괴물 같은 감정을 진행해야 한다면 하는 수가 없지만 상수는 그런 촉촉한 말들이 견딜 수가 없어서 백스페이스키로 모든 말을 지우면서 적지 마요, 이러지 마요, 하고 말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경애가 자기를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현실에서 한번 시원하게 웃지도 않는 상수가 페이스북 공간에서는 살뜰하게 여자들을 챙기며—여자들을 챙긴다는 상황부터가 오해를 받기 알맞지 않겠는가. 그들이 고백하는 모든 사랑의 애환들을 들어주는 체하며 때로는 추잡한 관음증을 해결해왔다고 비난받지 않겠는가. 상수로서는 그저 그 마음들을 자기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질문들에 답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지만.

상수는 적어도 이 페이지에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무모함, 펼쳐질지 안 펼쳐질지 모르는 낙하산을 멘 채 중력이 이끄는 대로 기꺼이 몸을 맡기는 사람들의 용기 같은 것을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몸에서 아드레날린과 부신피질과 도파민 같은 것이 실제로 분비되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정말 표현은 좀 그렇지만 “몸”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사랑의 시작이 그토록 낭만적인 것은 이후 일어날 끔찍한 살인사건을 극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가장 서정적인 씬들을 앞부분에 배치하라는 트뤼포의 영화창작론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사랑 이후에는 잔혹한 파괴였다.

어려서부터 숱한 사랑의 탄생과 죽음에 관한 서사를 접한 덕분에 상수는 무수한 사랑을 경험했고 그러는 동안 사랑의 진위나 사랑 후의 죄 없음—에 대한 일종의 기술을 터득했다고 생각했다. 그런 기술과, 삼수 끝에 들어간 대학의 독서동아리에서 읽은 필독 인문서들을 적절히 조합해 내린 결론은 사랑이라거나 연애라거나 하는 것에 복무하는 이들이 일종의 노동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이었다. 다양한 통로로 물질 교환이 일어났으며 권력관계가 조성되었고 결국에는 어느 한편이나 쌍방의 착취로 관계가 종료되기까지 끊임없이 성실과 근면을 강요받았다.

누가 보면 연애를 냉소하거나 자기가 연애를 못하는 이유를 합리화하려는 가여운 노력에 지나지 않을 이 맹렬한 가설의 추동은 공상수 개인사의 최초의 연애, 김유정과의 연애가 발생하면서 오히려 강화되었다. 최선을 다해 자신을 보여주고 기꺼이 연애노동자가 되기를 지원했지만 돌아온 것은 오오사까발 인천행 비행기 안에서 받은 해고 통보였다는 것. 그렇게 내쳐진 뒤로는 끊임없는 대기의 시간이었다. 다행히 유정은 우리는 동료니까, 하면서 드물지만 함께 저녁을 먹어주기도 했으므로 그때를 기다리며 항시 대기하는 것이다. 폐쇄된 연애공장의 숙련공이랄까. 상수는 그의 이중생활 속에서는 자칭 타칭 연애의 숙련공이었으니까.

 

그렇게 상수의 매일매일은 경애에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날들이었다. 하지만 경애는 그런 상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기가 지금 누구에게 자신의 비밀—옛 애인이라니, 기혼자라니!—을 털어놓은지도 모르고 태연하게 점심이면 시래깃국이나 동태찌개를 퍼먹으며 일에 관한 이야기만 했다. 그러면 상수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이런 말들을 에둘러 했다.

“경애씨, 요즘 무슨 영화 자주 봐요?”

“영화 안 보는데요, 그냥 유튜브나 봐요.”

“유튜브에서 뭐 보는데요?”

“코알라나 나무늘보 같은 것 보는데, 걔네 잠자는 거 찍은 세시간짜리 동영상이 있어요. 영상 보고 싶으면 그런 걸로 영상욕을 채우죠.”

“그런 거 보면 뭐 좀 재밌습니까?”

“나무늘보가 이렇게 사는구나, 하고 알게 되죠.”

“어떻게 사는데요?”

“시속 900미터로 살죠.”

경애는 양팔을 번갈아 들면서 어딘가로 기어가는 동작을 했다.

“그게 뭡니까?”

“나무늘보인데요, 시속 900미터로 움직인다더라고요.”

시속 900미터라면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상수는 했다. 아기가 아장아장 걷는 속도 아닌가, 아니면 눈에 보이는 뭔가가 아니라 무슨 분위기나 기미, 이를테면 계절 같은 것을 기다릴 때 느껴지는 속도가 아닌가. 겨울에 시달리다 시달리다 2월쯤이 되면 손꼽아 세어보게 되는 봄의 시작처럼.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런 감상적인 태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거 퇴행입니다. 문제를 피하는 거죠. 제가 영화를 좀 봤지 않습니까? 경애씨, 요즘 날도 날이니까 그런 거 봐요. 「에일리언」이나 「그렘린」이나 뭐 그런 것 있죠? 외부에서 온 생물체가 숙주 몸에서 커나가다가 죽게 하지 않습니까? 죽게 한다니까요? 결국 그렇게 착취하려는 것들이 많다는 말입니다. 조심해야 해요. 깜빡 속거든요. 경애씨가 좋아하는 그 프랑켄슈타인도 있잖아요. 은혜를 원수로 갚잖아요.”

상수는 그 사람 만나지 마요,라는 메시지를 은근히 영화에 빗대어 하려다가 경애의 아이디이기도 한 프랑켄슈타인을 언급하고는 눈치를 살폈다. 혹시 경애가 언니가 자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어쩌나 싶었는데, 경애는 골똘한 표정으로 콩자반을 집어먹다가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아니에요,라고 손을 흔들었다. 아니라고? 아니라니, 상수는 경애가 뒷말을 잇기도 전에 그 쿨하고 간단한 부정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실망스러웠다. 자신이 언니의 입을 빌려 해준 모든 제안, 감정의 폐기를 경애가 거부한 것처럼 들렸다.

“아닙니까? 어쩌려고, 어떡하려고 아니라고 하는 거예요?”

“프랑켄슈타인은 박사 이름이고요. 지금 팀장님이 떠올리는 그건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라고요.”

상수가 그랬나, 하고 머쓱해하자 경애는 하기는 다들 그렇게 생각해요, 그게 프랑켄슈타인인 줄 안다니까요, 하고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저 그런 영화 싫은데요. 뭐 세상일이 그렇게 쉽게 갈려요. 그 단순한 생각이 퇴행이죠. 살면서 조금씩 안 부서지는 사람이 어딨어요? 아무 사건 없이 산뜻하게 쿨하게 살자 싶지만 안 되잖아요. 망하는 줄 알면서 선택하고, 책임지기 위해서라도 기꺼이 부서지고. 상대를 괴물로 만들고 죄를 뒤집어씌워봤자 뭐해요?”

식당 아주머니가 와서 냄비를 가스불에 올려놓았다. 불꽃이 파랗게 돋았고 상수와 경애는 그 불꽃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 한동안 대화가 없었다. 상수는 경애가 말한 괴물이라는 단어를, 경애는 상수의 죽게 하지 않습니까, 하는 물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평소에도 상수가 쓰는 좀 과장되고 허둥대는, 열도에 차 있지만 어딘가 공허해서 듣고 나면 왠지 ‘냉무’의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그런 말들의 일환이었지만 그 가운데서도 분명하게 경애를 두드리는 부분이 있었다. 경애는 상수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자신을 걱정한다는 말인가. 자기가 힘들다는 내색을 하지도 않았는데. 하지만 그런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드러나는 건지도 몰랐다. 찌개 국물이 기포를 밀어올리면서 끓는 기세에 쑥갓이며 대파가 어쩔 수 없이 흔들리는 것처럼. 상수가 그러면 프랑켄슈타인이 아니면 그것의 이름은 뭐냐고 물었다. 경애가 그냥 피조물이에요,라고 하자 상수는 피조물의 정확한 뜻이 뭐더라 하면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존재 같은 거구나, 존재.”

“존재랑은 좀 다르죠. 있다는 것과 있게 되었다는 것의 차이가 있으니까.”

경애가 다시 젓가락을 들어서 김자반을 밥 위에 올려놓고 떠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물우물 씹어 삼키면서 10대 시절에 제 별명이, 피조였어요,라고 말했다. 피조물에서 왔어요. 상수는 그 피조라는 단어가 아주 낯설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어딘가에서 들은 듯했는데 어디서였는지는 헷갈렸고 다만 피조라는 단어는 이런 것을 분명히 연상시켰다. 아주 오래전 유행하던, 거리의 낙엽을 다 쓸고 다닐 듯 통이 넓고 긴 청바지를 입고, 머리스타일은 기장의 끝을 날카롭게 자른 이른바 ‘칼머리’를 하고 다니는, 이제 막 촌스러움에서 벗어나 ‘힙함’을 표출하려고 하지만 여러모로 받쳐주지 않아서 힙함이 아니라 어딘가 ‘불우’의 느낌을 주던, 예를 들면 1990년대의 어느 풍경을.

“사실 요즘 제가 피곤하기는 하거든요.”

상수는 자기를 휩싸는 어느 먼 기억에 붙들려 들어가다가 귀가 솔깃해졌다. 그 일을 직접 털어놓으려는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들은 그렇지 않았고 경애는 도리어 상수에게 무슨 고민이 있느냐고 물었다.

“지금 우리 일이 뷔페집 가면 있는 슬라이스 오리고기처럼 쌓여 있거든요. 근데 영 업무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아요. 베트남 가겠다고 하고 현지에도 통보하고 거기서는 우리를 기다리는데 조선생님도 이제 만나야 하는데 조선생님은 정작 가려고 할지 알 수도 없고 아무리 일년짜리 파견이라도 파견은 파견인데 똑바로 안 하면 회사는 책임을 물을 거예요. 그게 회사예요.”

상수는 그러니까 그런 이메일을 보내서 왜 정신 사납게 하나 싶어 화가 치밀어올랐다. 하지만 생각나는 말을 다 할 수도 없으니까 잠자코 찌개 국물을 삼키면서 마음을 달랬다. 경애는 상수의 속도 모르고 그래서요, 제대로 하자고요, 우리, 하면서 저녁에 있을 약속을 상기시켰다. 조선생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어떻게 해야 제대로 하는데요?”

“존중하기로 해요.”

경애가 약간 상수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뭘요?”

“조선생님 상태를요.”

“무슨 상태 말입니까?”

경애는 일영에게서 조선생이 심한 알코올중독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미리 상수에게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알코올중독으로 손까지 떤다는 기술자를 누가 쓰려고 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만 해도 경애는 조선생 마음이 상해서, 자신을 몰아낸 회사에 돌아오고 싶어하지 않으리라 걱정했지만 현실은 좀더 비정했다. 기술을 가진 손 때문에 돌아올 수 있지만 그런 손을 통제할 수 없어서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경애는 아직도 일영의 말을 믿지는 않고 있었다. 파업기간에도 언제나 볼펜을 잡고 일하는 사람으로 돌아갈 수 있게 준비되어 있던 손, 당장의 폭풍우가 아니라 삶을 더 집요하게 잠식할 안개를 경계하자고, 자기도 그러겠다며 경애에게 『파업일기』를 내밀던 그 손이 이제는 무언가를 붙들 수조차 없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지 않았으니까 아직은 변하지 않았다고 믿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그렇다면 상수의 마음을 믿어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상수라면 그런 조선생과도 함께 일하겠다고 결심할 수 있지 않을까. 상수의 마음은 어디인지 특정할 수는 없는 무언가와 무언가 ‘사이’에 있다고 경애는 생각했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가야 할 일이 있을 때면 긴장돼서 진정제를 찾아야 하는 나약함과 상사에게 정말 낙하산이나 할 수 있을 것 같은 요구를 당당하게 하기 위해 그 상사의 방문을 열어젖히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패기 사이에 상수의 마음이 있었고, 경애와 자신 둘만 있는 사무실에 매번 허황된 매출 목표금액을 적어보면서 회사가 이루면 우리가 이루는 겁니다,라는 유의 근면한 노동을 강조하는 문구들에 마음을 기탁해보는 것과, 어떻게 해서든 실적을 내려고 공장들을 찾아다니다가 결국 영업담당자가 원하는 것이 커미션이나 접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눈에 띄게 낙담하는 것 사이에 상수가 원하는 세일즈맨의 마음이 있었다. 결국 상수는 마치 추처럼 어떤 것과 어떤 것 사이를 오락가락하고 있었는데 경애는 그가 그렇듯 갈등하는 것에 고유한 윤리가 있다고 느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상수는 막무가내의 이기주의자나 꼴통, 심지어 고문관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마음의 질서가 있었고 다만 그런 자기윤리를 외부와 공유하는 데 서툰 것뿐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생의 통제할 수 없는 손에 있어서 그 ‘사이의 감각’은 발현되지 않을까.

“손 말인데요.”

경애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의자에 기대어 상수를 한동안 건너보았다. 냄비에는 어느 러시아 근해에서 잡혀 꽁꽁 얼었다가 이제 경애와 상수 사이에서 토막이 나서 끓고 있는 동태가 있고 거기에는 무도 들어 있어서 가스불 위에서 아주 무르게 익어가는데 경애가 다시 한번 자기 손을 펼쳐 보이며 상수에게 손,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상수는 숟가락질도 멈추고 자기 앞으로 내밀어진 경애의 손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경애는 본인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지만 상수가 손을 내밀자 척 잡고는 악수를 하듯 흔들었다 놓았다.

그러고 나서 둘의 맹렬한 식사는 계속되었지만 상수와 경애는 그렇게 손을 잡았다 놓는 것만으로도 어떤 것이 교차되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상수가 자기가 경애에게 단호하게 말했던 죽게 하지 않습니까?라는 말에 대해 생각했다. ‘언니는 죄가 없다’의 그 수많은 이들이 매번 그렇게 말이 되지 않는 사랑에 빠져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결국 페이스북에 로그인하고 말하고 떠들고 일상을 챙기는 걸 보면, 죽게 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이미 죽게 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난 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러면 경애도 그 이기적인 옛 애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하든 스스로 살아남을 것이다, 좌초되거나 표류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어디론가 가닿을 것이다. 하지만,이라고 상수는 생각했다. 자신과 아무 상관 없는 일이라고 여기고 싶지 않았다. 이왕 알게 되었으니까, 경애가 일종의 SOS를 보냈으니까 연연하고 싶었다. 연연하지 않으면 오히려 자기가 어떤 상실감에 떠밀려 표류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식당에서 나온 경애는 자기가 손이라고 한 이유를 더 설명할까 했지만 조선생을 만나면 자연히 알겠지 싶었다. 들어가는 길에 상수가 까페 레이어를 가리키면서 시원한 거 한잔 살까요, 제가? 하고 물었다. 경애는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 한동안 그 까페는 갈 수 없을 것이었다. 경애는 자신이 산주 선배에게 더이상 연락하지 말라고 이야기했을 때 선배가 절규하듯, 화를 내듯, 비난하듯 했던 말이 아직도 아팠다. 결국은 네가 이런 선택을 하는구나, 하는 말이었다.

“어떤 선택, 내가 지금 어떤 선택을 하는데?”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서 나를 버리는 선택.”

경애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에게 이별을 통보했던 사람은 오래전 그 여름의 산주가 아니었던가. 그때 그들이 완전히 죽은 사람처럼 멀어지지 않고 안부를 물으며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경애가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경애는 그들의 연인 시절을 기억하는 애들이 던지는 생각 없는 농담들, 그러니까 경애를 가리켜 순정파니 지고지순이니 혹은 할리우드 스타일이니 하는 소리들을 견뎌야 했고 어쩔 수 없이 마주쳐야 하는 경애의 선배이자 산주의 새 연인인 유란과의 이런 대화를 각오해야 했다. 괜찮지? 하며 살피는 기색들, 너와 나쁘게 지내고 싶지는 않아,라고 말할 때 호의를 가장했지만 경애를 난폭하게 흔드는 듯하던 말들.

유란 선배는 어느 겨울 경애를 불러 함께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신 적도 있었다. 경애와 유란은 산주에 관한 화제는 애써 피하며 그들이 봤던 프랑스 영화 「잠수종과 나비」에 대해 이야기했다. 왼쪽 눈을 제외하고는 온몸이 마비된 남자가 등장하는 그 영화에서 주인공은 통제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