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 중편 특집
권여선 權汝宣
1965년 경북 안동 출생. 1996년 장편 『푸르른 틈새』로 상상문학상을 받으며 등단. 소설집 『처녀치마』 『분홍 리본의 시절』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비자나무 숲』 『안녕 주정뱅이』, 장편 『레가토』 『토우의 집』 등이 있음. puruntm@empas.com
당신이 알지 못하나이다
2002: 반바지
나는 오래전 어느 경찰서 조사실에서 있었던 장면을 상상한다. 상상한다고 해서 꾸며내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직접 본 것도 아니니,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그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몇가지 단서, 내 경험을 가지고 그날의 장면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이 장면만이 아니다. 나는 ‘미모의 여고생 살인사건’이라 불렸던 그 사건에 얽힌 세부, 장면, 정황 들을 14년 동안 꼼꼼히 생각하고 쓰다듬고 세공해왔다. 그러다보니 머릿속에 각인된 그 상황들이 내가 직접 보거나 겪었던 상황인 것만 같은 고통스런 착각에 빠져들 때가 종종 있다. 상상도 실제만큼이나 고통스럽다. 아니, 실제보다 더 고통스럽기도 하다.
소년은 십분 넘게 조사실에 혼자 앉아 있었다. 테이블과 의자 네개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방이었다. 벽에 액자도 걸려 있지 않고 테이블에 꽃병이나 재떨이도 놓여 있지 않았다. 뭘 해도 자연스럽지 않아 보이는 사람이 있는데 소년이 그랬다.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앉은 그의 눈빛은 졸린 듯 흐릿했다. 시선을 둘 곳이 없어 더 그랬을 것이다. 카메라 렌즈가 흰 평면 위에서 초점을 못 잡고 흔들리듯이.
형사가 들어와 소년의 맞은편에 앉았다.
“한만우!”
나지막하지만 상냥하지는 않은 목소리였다. 학생주임이나 담임이 처벌해야 할 학생을 호명하는 식의 딱딱한 말투. 그 호명은 단단한 적의가 되어 그의 가슴 한복판을 향해 날아갔다. 그 소리가 정확하게 실현될 참혹한 운명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학교 친구들은 한만우를 그런 식으로 부르지 않았지.
‘할망구’라고도 부르고 ‘만우절’이라고도 불렀지만 그의 가장 빛나는 별명은 ‘한오백년’이었다. 그 노래의 1절은 한만우로 시작한다는 게 아이들의 생각이었다. 하안만우우우 이 세상 야속한 임아, 하는 식으로. ㄴ 발음만 애매하게 처리하면 완벽했다. 그 별명의 호소력이 너무 강렬해서 만우절이나 할망구는 점점 도태되고 그를 부를 때면 다들 하안만우우우 하며 명창이 목 푸는 소리를 냈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나는 그의 존재를 몰랐다. 그는 고3이었고 나는 고1이었으니. 그럼에도 기억을 되짚어보면 학교 복도 어디쯤에서 그의 이름을 불러대는 애절하고 우스꽝스러운 소리를 가끔 들은 적이 있다. 그 유장한 부름 속에는 단단한 적의 같은 건 조금도 없었다. 그러나 그 사건이 일어난 후부터 그는 더이상 그렇게 불리지 못했다.
나는 가끔 예전 식으로 그를 불러본다. 하안만우우우,라고. 그러노라면 과연 이 한 많은 삶에 의미 같은 것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추상적인 삶이 아니라 구체적인 개인의 삶에 말이다. 그의 삶에도 의미 같은 것이 있었을까. 아니, 없었지. 없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삶에도 특별한 의미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한다. 그의 삶에도, 언니의 삶에도. 아무리 찾으려 해도, 지어내려 해도, 없는 건 없는 거라고.
형사는 소년에게 자기 말을 잘 들으라고 주의를 주었다. 이번은 지난번과 다르다고, 묻는 말에 잘 생각해보고 대답하라고, 그러지 않으면 네게 아주 불리해질 거라고. 소년은 형사를 쳐다보았지만 그 얼굴에서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했다. 소년은 둔하다. 하지만 첫번째 조사 때보다 왠지 형사가 더 무섭게 변했다는 것만은 느낀다.
“지난번 조사에서 진술한 내용을 확인하겠다.” 형사는 볼펜으로 탁자를 신중하게 찍으며 물었다. “이천이년 유월 삼십일 십팔시경, 그러니까 오후 육시경, 스쿠터를 타고 치킨 배달을 가다 신정준의 차 옆을 지나갔다. 맞지?”
“아닌데요.”
“아니라고?” 서류를 확인한 형사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치떴다. “그렇게 진술한 걸로 돼 있는데?”
“배달 끝나고 들어가는 중이었는데요, 배달 가는 중이 아니고.”
형사의 눈이 제자리를 찾았다. 별거 아니군.
“근데 왜 여긴 배달 가는 중이라고 돼 있지? 아무튼 치킨 배달하고 들어가는 중에 신정준의 차 옆을 지나갔다. 그래서 차종이 뭐였다고?”
“네?”
형사는 소년이 일부러 자기 말을 못 알아들은 척한다고 생각했다.
“차종! 차가 무슨 차였냐고?”
“무슨 찬지는 모르고요. 찐한 회색 같은 건데, 뻔쩍뻔쩍하는 빛이 나고. 다 얘기했는데요, 저번에.”
“그러니까 저번, 아니 지난번 진술내용을 확인하는 중이잖아? 뻔쩍뻔쩍한 진회색 차량?”
“네.”
형사는 서류 속에서 사진을 한장 꺼냈다.
“이런 차 맞아?”
소년이 고개를 내밀어 사진을 들여다보고 형사를 보았다.
“맞는 거 같기도 하고.”
“딱 이 차는 아니어도 이런 종류 맞냐고?”
소년은 다시 한번 사진을 보고 형사를 보았다.
“맞는 거 같아요.”
“맞아?”
“네.”
“좋아. 잘하고 있어.”
형사가 사진 한장을 더 꺼냈다. 소년은 다시 사진을 보고 형사를 보았다.
“이게 니가 타는 스쿠터 맞아?”
소년은 곧바로 맞는다고 대답했다.
“좋아.” 형사는 서류를 들추는 시늉을 하며 결정적인 시간을 늦추었다.
“이제 중요한 대목, 확인 들어간다. 그때 신정준의 차 조수석에 김해언이 타고 있는 걸 봤다. 맞지?”
“네.”
“차림새가 어땠다고? 머리는 어떻고 옷은 뭐 입었고?”
“머리는 풀렀고요.”
“머리는 풀렀고, 그러니까 머릴 풀었다고. 안 묶고.”
“네.”
“또? 옷은?”
“옷은요…… 나시에다 반바지 입었다고……”
“나시에다 반바지 입었다고?”
형사가 말꼬리를 슬쩍 올렸다.
“네, 그랬다고……”
“음, 그랬다고? 색깔은?”
“네? 색깔요?”
도대체 한번에 제꺽 대답하는 법이 없다고 형사는 생각했다.
“옷 색깔! 나시하고 반바지 색깔.”
“몰라요 그건.”
“기억 안 나?”
“모르겠어요.”
형사는 소년의 말투에서 뭔가 숨기는 듯도 하고 애매하게 흐리는 듯도 한 기미를 감지했다. 드디어 낚아챌 때가 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년이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왜 그래?”
“나 가야 되는데 지금.”
“뭐?”
“몇시예요? 나 알바 가야 되는데 지금.”
소년이 탁자 위에 양손을 얹고 곧 일어날 듯한 자세를 취했다. 형사는 그런 소년을 말없이 쏘아보았다. 그때 형사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새끼구나 싶었을까. 탁자 위에 놓인 소년의 꽉 쥔 주먹을 내려다보며 벽돌 같은 걸로 사람의 머리를 내려치기에 적당한 손인지 가늠해보았을까. 신정준보다는 억세 보이는 손이지만 글쎄, 하고 고개를 저었을지 모른다. 윤이 흐르는 매끈한 머리칼을 가진 소녀의 동그란 머리를 내려치는 데 엄청난 악력이 필요하진 않으니까. 오히려 체격은 신정준이 더 좋았다. 신정준은 운동으로 단련된 근육질이었고 한만우는 중키에 왜소한 몸집이었다.
형사는 목을 가다듬고 지금부터 자기가 하는 말을 잘 들으라고 했다.
“니가 진술한 내용이 말이 안되는 게, 이거 보라고.”
형사는 두장의 사진을 소년 앞으로 돌려놓았다. 중요한 건 신정준의 차가 일반 세단이 아니라 렉서스 RX300, 즉 에스유브이 차량이라는 거다. 스포츠 차량이라 좌석 높이가 높다. 당연히 차창 높이도 높다. 그런데 네가 타는 배달용 스쿠터를 봐라. 네가 스쿠터에 앉아서 볼 수 있는 시야각은 렉서스의 차창과 평행하거나 조금 낮다. 여기까지 얘기한 형사는 이게 무슨 뜻이냐, 하고 소년에게 물었다.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형사가 친절하게 그 뜻을 알려주어야 했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너는 그 땅딸보 스쿠터에 앉아서 절대 조수석에 앉은 김해언이 반바지를 입었는지 긴 바지를 입었는지 볼 수 없다는 거야.”
말은 이렇게 했지만 형사는 절대 볼 수 없는지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저 짐작이었다. 그러나 소년의 놀란 얼굴을 보자 세게 한번 밀어붙일 필요가 있겠다 싶었다.
“그러니까 너는 신정준의 차에 탄 김해언이를 본 게 아니고, 차에 안 탄 김해언이를 본 거야. 그러니까 반바지 입었다는 걸 아는 거지. 신정준이 김해언이를 내려주는 걸 봤거나 아니면 그후에 봤거나, 어쨌든 너는 차에 안 탄 김해언이를 봤어. 얘기가 그렇게 되면……”
소년은 눈을 껌뻑이며 형사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형사의 말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자신이 처한 상황은 이해하지 못했다. 형사의 입가에 치명적인 적중을 앞둔 자의 긴장된 미소가 감돌았다.
“김해언이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사람은 신정준이 아니라 바로 너, 한만우가 되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
소년은 형사를 보았다. 형사는 소년이 또 자기 말을 못 알아들은 척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면 좀더 효과적인 충격을 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까 너는 김해언이를 둔기로 내리쳐 살해한 유력한 용의자가 되는 거라고.”
소년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네? 왜요?”
무엇을 해도 자연스럽지 못한 그의 제스처는 형사의 눈에 어색한 연기로 보였다. 못하는 놈은 뭘 해도 못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요라니? 너 지금까지 무슨 얘길 들은 거야? 니가 김해언이를 죽여놓고 신정준이 죽인 것처럼 목격자 행세를 했다, 이런 얘기 아냐?”
“아니에요. 내가 왜요? 내가 왜 죽여요 걔를?”
“그건 니가 알겠지.”
“난 말도 한번 안해봤어요 걔랑. 걔가 원래 말이 없대요.”
“누가?”
“다 그래요 애들이. 말 걸어도 대답 안한다고. 난 말도 안 걸어봤는데.”
이 말은 사실이었지만 형사는 그런 사실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웬 횡설수설이야? 야, 한만우! 그럼 김해언이 반바지, 이거 어떡할 거야? 봤다면서? 니가 나한테 설명 좀 해주라, 반바지 입은 거 무슨 수로 봤는지?”
형사는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이 녀석이 뭐라고 할 것인가. 스쿠터를 렉서스에 바짝 붙이면 혹시 하의를 볼 수 있었을까. 한참 만에 소년이 먹은 걸 토해내듯 힘겹게 말했다.
“봤는지 몰라요……”
소년이 말끝에 뭐라고 우물거렸지만 형사는 승리감에 도취해 듣지 못했다.
“봤는지 모른다? 하, 이제 와서 봤는지 어쩐지 모르겠다?”
“그게 아니고요.”
“그게 아니야?”
“봤을 거 같아요…… 걔도.”
형사가 눈을 가늘게 떴다.
“걔……도?”
소년은 입을 다물었다. 더이상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말한 것마저 도로 삼키고 싶었다.
“너 상황이 지금 얼마나 심각한지 몰라서 그러나본데 얼렁뚱땅 둘러댈 생각하지 마. 지금까지는 너 혼자 봤다고 했어. 근데 또 누가 봤을 거 같다는 거야?”
“혼자 봤단 말은 안했어요.”
“혼자 봤단 말은 안했다? 좋아. 그럼 누가 또 같이 봤는데?”
“말해야 돼요? 말 안하면 안돼요?”
소년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그애가 뒤에서 살짝 붙들었던 허리 언저리에 느꼈던 따스함이 생생했을 것이다. 그 감촉을 상상하고 소년은 그때 형사 앞에서도 바보 같은 미소를 지었을까.
“이게 진짜 미쳤나?” 형사는 소년의 오이지 같은 면상을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너 똑바로 대답 안해? 지금 너, 지난번 진술을 뒤집고 있는 거야. 혼자가 아니면 누가 또 같이 봤다는 거야?”
소년은 윗입술을 실룩거리고 무슨 말인가를 할 듯했다.
“나……”
형사는 귀를 기울였다. 나…… 나씨 성을 가진 놈이란 말이지.
“가야 되는데…… 진짜.”
형사는 힘이 쭉 빠졌다. 소년에게는 상대방을 답답해 미치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이 녀석, 생각보다 저능인가, 아니면 저능 흉내를 내는 건가.
“너 똑바로 대답 못하면 오늘 중으로 못 나가. 아니, 내일도 모레도 못 나가. 영영 못 나갈 수도 있어.”
“안돼요. 우리 사장님 혼자 그 일 다 못해요. 가야 돼요 지금.”
“그러니까 누가 또 같이 봤냐고?”
소년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이름을 말했다. 형사는 이번엔 귀를 기울이는 대신 윽박지르는 쪽으로 갔다.
“이 자식이, 크게 말 안해?”
“태림……이.”
소년의 입에서 작은 침방울이 튀었다.
“태림……이?”
“윤……태림.”
“윤태림? 윤태림이 누구야?”
“삼반 애 있어요. 해언이랑 같은 반요.”
“여자야?”
소년이 대번에 그를 무시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 여자죠. 여학생반인데, 삼반은요.”
형사는 억울했다. 자기가 3반이 여학생반인지 남학생반인지 무슨 수로 알겠는가. 그러다 아, 김해언이랑 같은 반이랬지, 하는 생각이 나자 더 화가 치밀었다.
“근데 왜 그런 얘길 지금 해? 그럼 너 지난번에 위증한 거야. 위증죄로 확 집어 처넣는 수가 있어. 지금부터라도 똑바로 대답 안하면 혼난다. 그날 너하고 윤태림이 같이 있었어?”
“네.”
“왜?”
“태림이가 태워달랬어요.”
“뭐를? 스쿠터를?”
“네.”
“아, 미치겠네. 그럼 스쿠터를 너 혼자 타고 간 게 아니었어? 배달 가는, 아니, 배달 끝나고 들어가는 길이었다면서?”
“배달 끝나고 들어가는데요, 길가에서요 태림이가 손을 막 흔들면서 세우더니 태워달라고요. 자기 좀 급하다고 그래가지고요.”
“그래서 둘이 타고 가다가 신정준이 차를 봤다?”
“나는 정준이 찬 줄 몰랐어요. 아니, 정준이 누나 차랬어요. 쌤삥인데 정준이가 몰고 다닌다고, 태림이가 막 가라고 앞으로.”
“막 가라고 앞으로?”
“신호등에 걸렸을 때 그때 태림이가 가서 서라고 앞에.”
“어디 앞에?”
“정준이 차요.”
“왜 가서 서래 앞에?”
“몰라요 그건.”
“그래서 가서 섰어 앞에?”
형사는 슬슬 짜증이 났다. 소년의 이상한 도치법이 신경에 거슬렸고 자기 말조차 꼬이는 느낌이었다.
“네.”
“그래서?”
“그러니까요.”
“뭐가 그러니까야?”
“태림이도 봤을지 모른다고요.”
태림이도 봤을지 모른다. 이 말에서 형사는 소년의 위증을 확신했지만 나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날 윤태림은 신정준의 차에 누가 타고 있는지 궁금해서 한만우의 스쿠터를 타고 뒤쫓아가 그 앞에 가서 서라고 했을 것이다. 이 얘기는 그의 머리로는 도저히 지어낼 수 없는 미묘한 진실을 품고 있다.
“너 근데 왜 지난번에는 윤태림이 얘기 안했어?”
“그냥…… 싫은 것 같아서요.”
“뭐가 싫어?”
“스쿠터가요.”
“스쿠터가 싫어?”
“그니까, 태림이가요.”
“태림이가 왜 싫어?”
“스쿠터 탄 거요.”
“태림이가 니 스쿠터 탄 게 싫다?”
“네.”
“그럼 왜 태워줬어?”
“태림이가 태워달랬어요. 손 막 흔들면서. 내가 태워준다고 안했어요 먼저.”
“그래, 니가 태워준다고 안했어 먼저. 그건 알겠는데 그런 얘길 왜 처음부터 안했냐고?”
“아저씨는 몰라요. 걔는 절대 안 타요 그런 거.”
형사는 이쯤에서 미치고 싶었다.
“그러니까 니가 싫은 게 아니고, 태림이가 스쿠터 싫어한다, 스쿠터 같은 거 안 탄다 그 말이야?”
“안 타요 절대. 배달 스쿠터 같은 거. 태워달랬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요. 그때도 빨리 내려달래서 내려줬어요. 싫은 거잖아요 그건.”
“빨리 내려달래서 내려줬다? 그럼 급한 일은 뭐였대?”
“급한 일요?”
“막 세워서 급하다고 태워달랬다며?”
“안 물어봤는데요 그건.”
이런 얼간이를 보았나, 하고 형사는 생각했다. 얼간이 형사는 몰랐겠지만 스쿠터 타는 걸 창피해하는 여자애가 얼간이 소년의 배달 스쿠터를 얻어타고 신정준의 차를 추월하라고 한 다음 얼마 안 가 내렸다면 그애의 급한 일은 명백한 것 아닌가. 신정준의 차에 누가 함께 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 그리고 태림은 언니가 타고 있는 걸 확인했다.
형사는 고개를 저었다. 윤태림이란 애를 끌어들여 관심을 분산시켜보려 하지만 결국 이 골 빈 녀석은 여전히 제가 묻힐 땅을 열심히 파는 중이라는 생각이었다.
“근데 한만우. 너, 이것도 거짓말이야.”
“아니에요, 거짓말. 근데 나 가봐야 되는데 진짜.”
“아니긴 뭐가 아냐? 이거 백프로 거짓말 맞다고. 내가 윤태림이 불러서 조사는 해볼 건데, 거짓말을 하려면 앞뒤가 맞게 해야지. 너도 못 보는 걸 윤태림이 무슨 수로 보냐? 머리 풀어헤친 거랑 나시 입은 건 봤다 쳐도 윤태림이 걔, 여자애 키가 뭐 너보다 더 커? 더 커도 못 봐. 걔도 너랑 똑같이 반바지 못 본다고.”
소년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나 가봐야 돼요 진짜.”
“이 자식이 내가 하는 말을 똥구멍으로 듣나? 백번 말하지만 니 난쟁이 땅딸보 스쿠터에 앉아서는 무슨 수를 써도 반바지 못 본다니까?”
“네.”
“뭐? 네? 하, 이 새끼 봐라. 너도 못 본다는 건 인정하는 거지?”
형사는 마침내 강력한 확신을 얻었다.
“모르겠어요. 근데요……”
형사는 귀를 기울였다.
“자꾸 난쟁이 땅딸보, 그런 말 하지 마요.”
형사는 헛웃음을 웃었다.
“뭔 소리야? 내가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더 묻겠어. 너도 봤으니까 윤태림이도 봤을 거다, 그 얘기지?”
“네.”
“조사해보고 아니면 넌 죽었어.”
“가도 돼요 인제?”
“가봐, 가봐.”
형사는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하고 운동화를 직직 끌면서 조사실을 나가는 뒷모습을 못마땅하게 지켜보았다. 그리고 한참 동안 서류를 탁탁 탁자에 두드려 모를 맞추며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나는 형사에게 그런 버릇이 있다는 걸 안다. 꺼진 볼펜으로 탁자를 딱딱 찍는 버릇이 있다는 것도, 형사의 말투와 표정, 고릴라처럼 어깨가 올라붙은 자세까지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형사가 여러번 우리 집에 찾아오기도 하고 엄마와 내가 경찰서에 찾아가기도 했으니까.
그날 형사는 소년의 오이지 같은 얼굴과 신정준의 말끔한 얼굴, 소년의 싸구려 월드컵 티셔츠와 신정준의 아이비 버튼다운 셔츠, 홀어머니와 회계사 아버지, 반에서 20등과 전교 10등, 이쪽과 저쪽의 알리바이를 증명하는 사람들의 신뢰도 격차 등을 따져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범인이 누구인지보다 누구를 족쳐서 범인으로 만들어야 하는지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나는 오랫동안 레고 블록을 조립하듯 한만우의 두번째 조사 장면을 상상 속에 구축해왔다. 그는 총 일곱차례의 조사를 받았는데 그중 두번째 조사에 사건의 진실과 이후의 사태 전개 방향이 암시되어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가 두번째 조사장면을 상상할 때마다 번번이 디테일한 과잉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아주 작고 쓸데없는 레고 조각 하나가 불쑥 끼어드는 식이다. 그건 한만우나 형사와 무관한, 나 자신의 문제이다.
이번의 상상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형사가 소년의 꽉 쥔 주먹을 보면서 ‘윤이 흐르는 매끈한 머리칼을 가진 소녀의 동그란 머리’를 내려치는 데 엄청난 악력이 필요하진 않으니까,라고 생각했을 거라고 썼다. 윤이 흐르는 매끈한 머리칼, 대체 왜 이런 불필요한 내용이 섞여들었는지 모르겠다. 동그란 머리는 그렇다 쳐도 윤이 흐르는 매끈한 머리칼 같은 것은 벽돌로 가격당하는 데 있어 어떤 변수도 발생시키지 않는 조건 아닌가. 형사가 조사실에서 용의자를 취조하면서 이런 생각을 할 리는 없지 않은가. 물론 형사의 머릿속에 범행과 무관한, 언니의 시신이 지닌 눈부신 자태가 불현듯 떠오르지 말란 법은 없다. 실제로 그랬든 말았든 상관없다. 문제는 내가 상상한 취조 장면 속에 그런 종류의 과잉이 슬쩍 끼어든다는 사실이다. 나는 형사의 생각을 빌려 내 감각, 내 욕망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나는 아직도 그런 것들에서 벗어나지 못한 건가. 14년이 지나서도 그 희고 매끈하고 불필요한 조각에서. 내 얼굴을 조각보로 만든 그 과잉된 미의 조각에서.
언니는 누구나 한번 보면 잊기 힘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무 내용 없는 텅 빈 형식의 완전함이 주는 황홀. 하물며 열아홉이었음에랴. 그 아름다운 형식을 파괴한 자는 누구인가. 한만우인가, 신정준인가. 아니면 제3의 인물인가. 나는 이제 안다. 14년 전의 살인자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누가 아닌지는. 아니다. 살인자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 그런 짓을 했을 것이다.
2006: 시
해가 설핏 넘어가는 중이었다. 나는 도서관 옆 계단으로 내려오다 맞은편에서 올라오는 베이지색 블라우스에 노란 스커트를 입은 여학생을 보았다. 전날 종일 내린 비로 널찍한 시멘트 계단은 햇빛을 받지 못한 가장자리 쪽이 짙은 회색으로 젖어 있었다. 젖은 계단가로 올라오는 여학생을 보고 나는 잠시 시선을 피했다가 다시 보았다. 시선을 피한 것도 다시 본 것도, 나로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어서였다. 여학생은 몹시 말랐고 피부가 노리끼리했는데 노란 옷을 입어 더 그렇게 보였다. 가까이에서 보니 블라우스에 스커트 차림이 아니라 아래로 갈수록 노란빛이 짙어지는 원피스였다. 그러나 나를 사로잡은 건 그녀의 옷이 아니라 얼굴, 아니 표정이었다. 표정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녀는 딱히 표정이라고 할 만한 것을 짓고 있지 않았으니.
그 무표정한 얼굴은 뭐라 설명하기 힘든 독특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젊은 여자의 얼굴에서 그토록 이상한 이미지들이 마구잡이로 혼합되어 있는 표정을 본 적이 없다. 그녀의 얼굴은 낯익으면서 낯설었다. 오래전에 본 얼굴이면서 한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고, 안다고도 모른다고도 할 수 없는 얼굴이었으며, 피하고 싶기도 하고 들여다보고 싶기도 한 얼굴이었다. 여학생의 얼굴은 못생기거나 흉측하지 않았다. 예쁜 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노란 옷을 입은데다 그녀 뒤편에 불그레한 노을이 지고 있어 그녀는 거대한 불꽃의 심지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화려한 이미지 뒤편에 미처 마르지 못한 계단 가장자리처럼 축축한 잿빛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시선을 느낀 여학생이 나를 쳐다보았다. 알은체하고 싶지 않다는 눈빛이 스쳐지나갔다. 그렇다면 나를 안다는 뜻이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내려오던 계단을 되짚어 올라갈 뻔했다. 그러나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싶다는 호기심이 더 컸다. 나는 널찍한 계단을 비스듬히 가로질러 그녀 쪽을 향해 갔다.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 순간 내 입에서 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다언이구나!
날 알아보네요,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정말 다언인 것인가. 해언의 동생 다언. 그녀의 말투도 얼굴만큼이나 낯설었다. 그럼, 알아보지,라고 대꾸는 했지만 그때까지도 나는 다언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그녀가 아닌데요 하면 얼른 내 실수를 사과하고 계단을 내려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진짜 많이,라고 내가 말했을 때 순간적으로 다언의 얼굴에 무슨 말을 할지 다 안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나는 급히 말을 바꿨다. 말랐구나.
다언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상희언니는 옛날 그대로네요.
언니라는 말과 옛날이라는 말이 나를 슬프게 했지만 가장 슬픈 건 다언의 옅은 미소였다. 다언은 이렇게 웃는 아이가 아니었다. 몇년 전만 해도 입을 활짝 벌리고 맑은 고음을 내며 언덕길을 내려가는 자전거의 종처럼 당당당당 웃던 아이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바쁘지 않으면 어디 가서 차나 한잔하자.
다언이 경계하듯 몸을 움츠리는 순간 손바닥에 팔꿈치 뼈의 느낌이 전해져왔다. 수술용 메스처럼 뾰족했다.
아버지가 군에서 예편했을 때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아버지가 몇달가량 집에서 쉬는 동안 집안 분위기는 점점 어두워졌다. 왜 이렇게 되는 노릇이 없느냐고, 엄마는 툭하면 중얼거렸다. 김을 굽다가도 밥을 푸다가도 되는 노릇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내가 반에서 1등을 놓친 걸 알자 엄마는 손뼉을 치며, 대학 보낼 돈도 없는데 외려 잘됐구나, 하면서 누구 들으란 듯이 모진 소리를 쏟아냈다. 다행히 아버지가 수도권 소재의 중소기업에 취직한 덕분에 우리 가족은 강원도에서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11월말에 나는 흥분과 기대를 품고 서울의 한 고등학교로 전학했다. 남녀공학이었지만 학급은 남녀가 분반되어 있었다. 내 흥분이나 기대와 관계없이 나는 반 아이들과 친해질 기회를 갖지 못했다. 바야흐로 2학기가 끝나갈 즈음이었던 것이다. 체육부장인 담임은 나 같은 전학생을 배려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들은 바로는 주식투자에 미친 인간이라 했다. 아이들은 서로 단단히 약속이라도 한 것 같았다. 어떻게 단 한명의 아이도 내게 말을 걸어오지 않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뚫고 들어갈 여지없이 단단하게 굳어진 관계의 성벽 밖에서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나는 어느새 예전에 살던 동네와 학교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관사에서 학교로 내려가던 길, 잿빛 함석지붕을 무겁게 인 집들과 마당가 빨랫줄에 꽂힌 색색의 빨래집게들, 바람이 불면 바람개비 통이 방정맞게 돌아가던 파란 풍향계, 마을 중앙에 서 있던 커다란 떡갈나무와 그 오른쪽 가지에 어두운 솜뭉치처럼 걸려 있던 새집까지.
나는 떠돌이처럼 외로웠으나 오직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공부에만 열중하는 포즈를 취했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서 공부에만 열중하는 포즈를 취하는 게 불가능했으므로 나는 실제로도 공부에만 열중했다. 그해 겨울 혼자 등하교하던 서울 거리의 추위는 내가 겪어본 것 중에 가장 혹독했다. 나는 빨리 새 학년에 올라가고 싶었다. 틀이 잡혀 굳어지기 전의 말랑하고 유동적인 관계의 반죽 속에 뒤섞여 나만의 친교를 차근차근 맺어가고 싶었다. 그래서 겨울방학이 끝나고 3학년 진학을 앞두었을 때 반 아이들이 호들갑을 떨며 친구와의 작별을 슬퍼하는 모습을 유쾌하고 냉담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새로 배정받은 3학년 3반 교실에 혼자 동그마니 앉아 둘씩 셋씩 모여 속닥거리는 아이들을 보고서야 나는 왜 이렇게 되는 노릇이 없나 하는 절망감에 빠졌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지난 2년 동안 맺어온 관계의 밑천이 있었다. 나 혼자만 무일푼이었다. 하릴없이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한 아이를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눈이 크고 눈꼬리가 비스듬히 놓인 아몬드처럼 치켜올라가고 입술이 꽃잎처럼 붉은 아이였다. 그애의 예쁨은 보통의 예쁨이 아니라, 뭐랄까, 앵앵거리며 달려가는 구급차의 싸이렌처럼 다급하고 위태로운 예쁨이었다. 눈을 뗄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나는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아이가 날카로운 눈길을 보내고 있는 다른 아이를 보고서였다. 눈길의 대상이 된 아이는 줄곧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가 무심히 교실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는데, 그 순간 옆모습에서도 언뜻 엿보였던 아름다움이 나를 향해 활짝, 그야말로 낙하산이 펴지듯 활짝 펼쳐졌던 것이다. 나는 폭발이라도 일어난 듯한 작렬감에 휩싸였다. 그것은 결코 쉽사리 직면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이었기에 교실이란 공간이 갑자기 허구나 마법의 장소로 변해버린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놀랍고 어리둥절하여, 이 학급엔 온통 이런 애들뿐이란 말인가, 하고 주변을 돌아본 나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그게 다였다. 더는 아니었다. 충격적인 아름다움을 경험한 직후라 그런지 다른 아이들의 얼굴이 매우 조악하고 우중충하고 불균형해 보였다. 다행히 그 잡동사니 같은 평범함이 나를 현실의 세계로 돌아오도록 이끌었다. 나는 혐오감과 안도감을 동시에 느끼면서 그들을 바라보았는데, 그들 역시 나를 동일한 감정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담임을 맡은 늙은 수학교사가 들어올 때까지 우리는 무언가 핵심적인 것이 결여된 나머지들, 여집합 같은 존재감으로 우울하게 기가 죽어 있었다. 입술이 붉고 눈이 아몬드처럼 생긴 윤태림도 예외는 아니었다. 태림이 예쁜 것은 분명했지만 해언의 절대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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