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세번째 개학

이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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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나                           

팬데믹 상황이 이렇게 오래갈 줄 몰랐다는 고백을 할 여유는 없다. 팬데믹 속의 세번째 개학이다. 지난 일년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학교는 교육부 표현대로 ‘방역의 최전선’에서 전쟁과 다름없는 일년을 보냈다.

 

개학을 준비하는 학교는 시시콜콜해 보이는 문제로 매일 회의를 거듭했다. 적게는 수십명에서 많게는 수백명이 등교하는 상황을 상상하고 아이들의 동선을 짰다. 가령 접촉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현관에 발바닥을 붙이고 색깔 있는 테이프를 붙인다. 동선이 겹치지 않게 시간표를 모두 조정한다. “지구를 지켜요”라는 수업을 하면서 소독용 물티슈로 책상과 아크릴판을 닦게끔 지도할 일에 한숨이 난다. 초등학교 1~2학년의 전면 등교가 권장되면서 아이들의 급식 동선을 어떻게 짜야 하는지 고민하고, 우유급식이 실행되면 또 어떻게 할지 의견을 나눈다. 교과서는 무거워서 가지고 다니라기 어려운데, 사물함을 사용하자니 우르르 몰려가 신체접촉이 일어날 것이니 공간을 확보해 사물함을 이리저리 옮겨보기도 한다. 초등 1~2학년 전체 등교와 3학년 일부 등교를 가정해서 돌봄교실 시간표와 돌봄교사 배치도 다시 짠다. 이러한 업무가 모두 교사의 몫이다. 학교마다 사용하는 온라인교육도구가 달라 학교를 옮긴 교사는 그 사용법을 익히느라 시간을 보내며 교사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한다. 중고등학교도 마찬가지다. 2020년, 수능을 치르는 고3 중심으로 편성되었던 학교 방역수칙은 2021년에 초등 저학년 우선으로 변경되었다. 학교 대상의 방역수칙은 오류를 범했고 불평등을 낳았다. 2020년의 학교 방역수칙은 입시로 대표되는 평가가 중심이었다면, 2021년의 방역수칙은 돌봄이 중심이 된 셈이다. 교육이 기본이라면서 교육철학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학교는 학생을 비롯한 구성원들이 하루 중 가장 긴 시간을 보내는 삶터며, 일터이고, 배움터다. 다양하고 사사로운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난다. 학생들의 대화나 신체접촉은 자연스럽게 교육의 효과를 높이기도 한다. 공교육은 함께 어울려 배우는 교육공동체를 만들고 참여하는 시민을 길러내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 교육가치를 실현하려고 모둠활동, 체험학습, 참여수업을 시행했고, 자기 삶을 지킬 수 있는 시민으로 길러내고자 자치와 자율을 토대로 미래를 고민하도록 이끌고자 했다. 그러나 팬데믹은 이 모든 것을 가로막았다. 접촉을 줄이기 위해 서로 돕는 일이 조심스럽다. 엄격한 방역수칙을 준수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진다. 가르치는 사람들은 서로 상반되어 보이는 가치를 어떻게 교육에 녹여낼 수 있을지 고심하다가도 결국 학교가 고민해온 교육철학을 잠시 접을 수밖에 없다. 시급한 것은 온몸으로 인간의 본능을 막아내며 바이러스와 싸우는 일이 된다.

 

학교가 교육과 방역을 지키며 생활터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개학을 앞두고 염려한다. 학교 안에서의 방역수칙을 지키며 교육을 잘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끊임없이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학교에서 작년 한해 동안 고립되어 유튜브에 매달린 아이들을 어떻게 끌어안을 수 있을 것인가. 학생들뿐 아니라 교사들은 몇배의 과중한 업무에 지친 가운데에도 체력을 끌어올려 버티고 있다. 마음의 문제도 학교의 몫이다.

 

교육부는 지난 2월 25일에서야 EBS교육방송의 서버를 점검했다. 개학까지 업무일은 하루 반이 남은 상황이었다. 지난해 봄에는 온라인접속이 원활하지 않아 일방향 수업도 순조롭게 진행하지 못했는데 여름방학 이후에는 쌍방향 수업이 권장됨에 따라 학생들은 웹캠이나 개인기기를 사거나 빌려 써야 했다. 2020년 10월 교육부는 학생들의 온라인수업 만족도를 조사했다. 교사 자체제작 콘텐츠, 기존 EBS 등의 활용, 쌍방향 수업실행의 항목에 관해 4.0 만점 기준에서 가장 낮은 점수는 2.97점, 가장 높은 점수는 3.09점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정부에서 말하는 것은 모호하다. ‘만전을 기하겠다, 학교공동체에 맡긴다, 현행 학사일정을 방역당국과 협의하며 운영하도록 결정하였다.’

 

일년의 시행착오를 거쳤으나 학교는 별로 변한 게 없다. 학교 현장에서 겪고 있는 문제는 사실 학급당 인원수 조절로 상당히 개선될 수 있다. 수도권을 비롯한 대도시의 학교들은 과밀학급·과밀학교도 있다. 도움이 필요한 학생을 배려하고, 소외되지 않게 하고, 거리확보가 되려면 20명 이내가 적당하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과밀학급 외의 지역도 각 학급에서 원활한 수업을 진행할 수 있는 시설과 실무의 지원이 필요하다. 온라인기기 사용에 모든 교사가 갑자기 능숙해질 수 없고, 모든 학교가 시스템을 갖출 수도 없다. 기술이 모자란 교사에겐 상처가 되었고 학생들은 실망했다.

 

저학년 우선등교 정책은 돌봄 문제제기에 따른 것일 텐데도 돌봄을 전담할 제대로 된 구조개혁은 빠져 있다. 당장 어쩔 수 없는 학교 건물의 공간 문제도 한몫을 한다. 사각형의 획일적 교실과 쉬는 시간에 모든 학생이 한 줄의 복도로 쏟아져 나오는 구조는 방역에 취약하다. 교정기관과 다를 바 없는 통제와 감시, 줄 세우기의 공간이다.

 

학교는 복잡한 시대가 요구하는 대로 그 형태를 뒤틀며 견뎌왔다. 교육계가 시대의 요구에 대응하는 방식을 보면 민원대로 움직이며 민원을 회피할 수 있는 곳으로 달음질쳤다.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의 요구대로 흔들리고 무너진다. 교육부 단독의 문제도 아니다. 교육은 국가 전체의 것이다. 학교의 기본적인 구조는 늘 방치되었다.

 

교사들은 연금수령자라는 이유로 불안정한 노후를 걱정하는 시민들에게 손쉽게 비난받으며 정치적 난민으로 고립되어 있다. 팬데믹과 무관하게 교육당사자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진 적 없다. 현 정부는 학교현장에서 민주시민교육을 확대하는 정책을 펼쳐왔지만, 국가비상사태에 현장 당사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민주주의는 교과서 안에만 있다. 국가는 학교에 “버티라”라고만 한다. 목소리 없는 자들이 어깨를 걸고 버티고 있다. 헌신과 인내로 버티는 현장은 사람이 지치면 무너진다.

 

코로나 팬데믹은 사회의 민낯을 까발리는 재난답게 학교의 고질적인 문제를 끄집어내어 세상에 펼쳐놓았다. 적정한 교육예산 투입, 과밀학급의 조정, 비정규직 채용 문제를 비롯해 공동체의 부재로 학교에 떠밀려온 돌봄의 문제, 평가와 학습도구에 함몰된 고등학교 교육 등은 교육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오래전부터 지적해온 문제들이다. 학교에는 학교운영위원회, 학부모회, 학생자치위원회를 구성하도록 법으로 명시되어 있으며, 정부는 학교를 중심으로 사회적협동조합을 설립할 것을 권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모든 조직에 교사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가장 가까운 현장에서 삶으로 버텨내는 교육실행자들은 정치적 중립을 유지한다는 명목하에 고립되어 있다. 학교의 문제는 결국 교사의 노동인권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교육은 당사자들의 삶이 체화되기 마련이다. 권리와 책임을 나누지 않는 교육현장은 시민을 길러낼 수 없다. 재난을 겪고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미래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는 것처럼.

 

이하나 / 지역교육네트워크 이룸·문화공동체 히응 대표, 집필노동자 

2021.3.3. ⓒ 창비주간논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