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35회

   나는 읽어내려온 편지의 맨 윗줄로 돌아가 다시 읽었다. 다시 전쟁이 터진 것 같았는데도 견딜 수 있었는데 무엇 때문에 아버지는 다시 집으로 돌아온 것일까? 궁금해져서.

 

   서울에 도착한 며칠 후에 아버지가 본 것은 열넷, 열다섯살짜리 중학생이나 됐음직한 학생들을 향해 발사되는 총탄이었다. 백반집 주인에게 대학생 딸이 있었다. 학교를 마치고 오면 팔을 걷어붙이고 식당 일을 돕던 딸이었다. 딸은 점심때면 갈치조림을 담은 양은냄비가 열을 지어 올려진 조리대 위에 바삐 휘갈겨 쓴 메모지 한장을 남겨놓았다.

 

   “제가 데모하러 나간다고 하면 가둘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편지를 남기고 떠날 수밖에 없습니다. 눈앞에서 표를 바꿔치기하는데도 저항을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계속 부정선거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로 가는 데 첫번째 걸림돌입니다. 저는 투쟁하는 친구들 곁에 있겠습니다. 부디 제가 이해되지 않더라도 용서하시고 몸 잘 돌보고 계세요.”

 

   딸이 남긴 메모를 읽고 마음이 급해진 백반집 주인은 식당 문을 닫고 딸을 찾아 거리로 나가려다가 아버지 손을 붙잡고 같이 가자고 했다. 나이 먹어 눈이 좋지 않아 딸을 못 알아볼 수도 있으니 함께 찾아봐달라고. 아버지는 그곳이 세종로인 줄도 모른 채 백반집 주인을 뒤쫓다가 얼결에 시위대에 섞였다. 학생들만 있는 게 아니었다. 백반집 주인과 거리에 서서 대학생들이 선언문을 낭독하는 소리를 들었다. 학생들은 곧 구호를 외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학생들이 외치는 부정선거 다시 하라,는 구호를 아버지는 잘 알아듣지 못했다. 젊은이들이 그리 많이 모인 것을 처음 본 아버지는 여태 보지 못한 새 세상 구경을 나온 것 같기도 했다. 어디가 어디인지 아버지로서는 알 수 없는 거리에 시위대와 경찰이 치열하게 대치했다. 최루탄이 터졌다. 아버지는 줄 지어 서 있는 둥치 굵은 은행나무 중 한 나무를 붙잡고 그 아래에 쓰러졌다. 이어지는 공포사격 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사람들은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기를 반복했다. 백반집 주인과 어디에서 헤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공포사격이 아니라 실탄이 터지는 소리에 모두들 허둥지둥할 때 두 사람도 따로 몸을 피하고는 다시 서로를 찾지를 못한 채 밀려다녔다. 아버지는 직감적으로 여기가 말로만 듣던 경무대 근처구나,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급하기로 국민한테 총질을 하겠는가, 생각했다. 처음에는 학생들로 시작된 시위였으나 길가에 서 있던 시민들이 시위대에 섞여 들었다. 시위대열엔 끼지 않고 길가에 서서 박수를 치거나 환호성을 지르던 시민들이었다. 은행나무 밑에 쓰러져 바라보니 총탄 소리가 들리자 오히려 시민들이 더 모여들었다.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들기를 반복했다. 아버지는 몸을 추스르며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제 갓 태어나 강보에 싸여 있을 셋째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어디도 가지 말라고 했던 큰애의 근심 어린 얼굴도. 아내의 말을 잘 듣는 편인 어린 둘째는 개밥을 주고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총탄이 터지는 소리를 들으며 대열과 반대 방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전쟁통에도 살아남았는데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 대열에서 무사히 빠져나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순간의 아버지에겐 그게 구호였다. 최루탄이 터져 눈을 뜰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시위대와 반대쪽으로 나아갔다. 나아가면서 보았다. 총소리에 공포에 사로잡혀 사람들이 흩어져 달아나는데도 총을 쏘는 것을. 손에 쇠사슬과 각목을 든 괴한처럼 보이는 무리들이 거리에 쏟아져나와 학생들의 머리통을 내려치는 것을. 군중들과는 역방향으로 나아가다 갈라지는 골목으로 들어서려던 아버지는 멈칫했다. 각목을 든 깡패 같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여성이 얼핏 백반집 딸 같아서. 투쟁하는 친구들과 함께하겠다더니 왜 홀로 저런 무자비해 보이는 사람들 속에 에워싸여 있는지. 딸은 겁에 질려 뒤로 물러서다가 넘어져서 바닥에 손을 짚었다. 정신없이 사람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던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저기 좀 보라,고 소리를 쳤다. 아버지 혼자만의 외침일 뿐이었다. 백반집 딸이 괴한들에게 내몰리는 것에는 아랑곳없이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갔다.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만 생각하고 뒤로 내달리던 아버지는 바닥에 거의 드러누운 백반집 딸을 향해 다래야, 소리치며 돌진했다.

   ―너 여기서 뭐하냐!

   각목을 든 괴한들이 아버지를 쳐다봤다.

   ―얘 이름은 다래이고 내 동생인디…… 왜 이러시오?

   아버지는 바닥에 쓰러져 겁에 질려 있는 백반집 딸을 일으켜 세워 따귀를 후려쳤다.

   ―내가 뭐랬냐…… 오늘은 난리가 났으니 밖에 나가지 말고 집구석에 처박혀 있으라 했더니…… 귓구멍이 막혔냐!

   아버지는 큰 소리를 지르며 어서, 집에 가자,며 백반집 딸을 사납게 끌고 골목길로 들어섰다. 갑자기 등장한 아버지가 백반집 딸을 끌다시피 하고 길가의 미용실 골목으로 들어서자 저 새끼 동생 맞어 에이 ✕✕…… 욕설을 내뱉으며 깡패 같은 그들은 각목을 다잡고는 큰 도로로 다시 몰려갔다.

 

   아버지는 지옥에 떠러진 기분이엇다,고 쓰고 있었다.

 

   아버지 전 상서

 

   그동안 무탈하신지요?

 

   아버지께서 지난번에 말씀하신 한국과 여기 리비아 간의 대수로 공사를 한 곳은 저희 회사가 아니고 동아건설이라는 회사입니다.

 

   말 그대로 인류 최대의 토목공사라고 불릴 정도로 큰 공사였습니다. 끝난 게 아니고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지하에서 발견된 호수의 물을 지상으로 끌어올려서 이 나라의 사막을 농토로 바꾸겠다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처음엔 누구나 말도 안 되는 일로 여겼지요. 꿈에 불과한 일이라고요. 이 나라의 대통령 이름은 카다피인데 그는 기필코 말도 안 된다고 하는 일을 전세계에 입찰했고 우리 회사도 수주를 받아보려고 회사 내부에 전담반을 꾸려서 경쟁에 뛰어들었으나 실패했지요. 사실 전세계의 건설회사들이 참여한 수주경쟁이어서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결과가 한국 기업인 동아건설로 나와서 우리 회사의 수주 실패는 더욱 도드라졌습니다.

 

   아버지.

   우리 회사에서 수주를 놓치긴 했으나 여기 사하라사막에 대수로를 놓는 작업을 한 것이 한국 기업이라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대수로 공사에 참여했던 동아건설 쪽 사람들이 겪은 이야기들은 건설회사에 신화처럼 남아 있습니다. 총 공사 비용이 39억 달러였습니다. 그런 대규모 공사의 수주를 따낸 것에 기뻐했으나 일하는 현장에 와서는 열악한 작업환경에 절망했다고 합니다. 작업장이 아버지께서도 말씀하신 죽음의 땅이라 일컬어지는 사하라사막 한복판인데다 이 나라에서 확보할 수 있는 자재가 물과 시멘트와 골재뿐이어서 나머지 필요한 것들을 모두 조달해야 했는데 1단계 공사에서만 송수관이 24만 6000개가 필요했다니 상상이 되질 않습니다. 결국 그 송수관을 리비아에서 구할 수가 없어서 송수관 제작공장을 이곳에 세웠습니다.

 

   우리 회사가 한 일은 아니지만 사하라사막의 대수로 공사는 놀라운 기록을 많이 세웠습니다.

   동아건설은 1단계 공사를 무사히 마치고 2단계 대수로 공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 공사를 다 마치면 농작물을 경작할 수 있는 면적이 우리나라 땅의 6배쯤 되는 농지가 조성된답니다. 대단한 공사입니다.

 

   아버지.

 

   4·19 때 아버지가 서울에 계셨다는 것을 아버지 편지를 읽고 처음 알았습니다.

   제가 어릴 때의 일이라 책에서만 배웠을 뿐 실감이 없었는데 아버지께서 그때 그 현장에 계셨다는 말씀에 놀랐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백반집 딸 이름도 ‘다래’였나요?

   어머니하고 이름자가 같아서 놀랐습니다.

 

   아버지는 지옥을 보고 패배자가 된 심정으로 집으로 돌아오셨다고 했지만 저는 아버지께서 집에 돌아오셔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때가 아버지가 가장 오래 집을 비웠던 때였어요. 그때 서울에 계신 것이었군요. 저는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제가 서울에 집을 샀을 때 그때 아버지가 서울에 처음 오신 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집을 비우시면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가 너무 고단해 보이시고 동생들은 더 어려 보였어요. 아버지가 안 계시면 자다 말고 나가서 다시 대문을 잠그곤 했습니다. 어머니가 혹여 아버지가 한밤에 오실까봐 대문을 열어두시는 게 불안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저는 이제 트리폴리에서 떠납니다.

   아제다비아와 투브루크 사이에 500킬로미터의 도로공사 현장에서 근무합니다. 투브루크는 2차대전 때의 격전지여서 아직도 전차지뢰가 발견되는 곳이라고 합니다. 아버지. 롬멜 장군이라고 있습니다. 세계제2차대전의 영웅입니다. 제가 영화관에서 처음 본 영화가 롬멜 장군의 일대기였습니다. 히틀러의 충성스러운 장군이었는데 이 사막의 나라까지 와서 전쟁을 하고 모든 격전에서는 다 이겼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히틀러 암살 모의에 공모했다는 죄로 자살을 하거나 특별재판을 받아야 하는 운명에 처합니다. 롬멜 장군은 가족의 안전을 보장받고 집 근처의 숲속에서 죽는 것을 택합니다. 놀라운 이야기라 잊히지가 않았는데 투브루크가 그 롬멜 장군이 연전연승을 거둔 곳이라고 합니다. 언젠가 아버지와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눌 날이 오면 더 자세하게 얘기해드릴게요. 아직도 투브루크는 차를 타고 다니다보면 지뢰가 터져서 타이어에 빵구가 난다고도 합니다. 투브루크 현장에는 우리나라 인력이 100명이고 태국 인력이 600명, 방글라데시 인력이 400명이 있습니다. 제가 거기서 하는 일은 그들을 안전하게 먹이고 재우고 급여를 챙겨주고 의무실을 운영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력관리입니다.

 

   이곳 트리폴리에서 근무하는 것보다는 부딪치는 일이 많겠지만 사람들이 많은 현장이니 배우는 것도 많이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무엇보다 몸도 마음도 바빠질 테니 시간이 잘 가겠지요.

 

   그리고 아버지.

   근무지를 옮기기 전에 서울로 이십일 정도 휴가를 갑니다. 그동안 휴가는 있었으나 일주일 정도뿐이어서 서울에 들어갔다 나오기에는 너무 짧아 포기했었는데 이번에는 들어갑니다. 일년 반 만에 부모님을 뵐 생각을 하니 가슴이 벅찹니다. 서울 집의 둘째가 이제 세살이 됩니다. 둘째가 말을 배우기 전에 제가 여기로 떠나와서 키는 얼마나 컸는지 말은 얼마만큼 하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처나 헌이가 가끔 보내준 사진을 보면 벌써 놀이터에 나가 뛰노는 것 같고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면 말도 제법 합니다. 지난번에는 둘째가 테이프 속에서 아빠 안녕하세요,라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아내가 시켜서 하는 거겠지만 제게 노래도 불러줬습니다. 노래 시작이 안녕하세요, 또 만났군요, 이래서 많이 웃었습니다. 아내의 편지에 의하면 둘째가 어디서 배웠는지 계속 안녕하세요, 또 만났군요,를 읊조리고 다닌다고 합니다. 집에 갈 생각을 하니 아버지께서 집을 떠났다가 돌아오실 때도 이런 마음이셨겠구나 싶고 그리워집니다.

 

   아버지.

 

   요즘에는 휴가 갈 때 둘째에게 어떤 선물을 사가면 좋을지 매일 생각합니다. 그애에게 선물을 해보는 게 이번이 처음이라서요. 비행기 모형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걸 구해볼까 하는데 이 나라에서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나는 것들 중에서는 세살 된 남자아이가 좋아할 만한 것은 없는 것 같아요. 문득 아버지가 집을 비웠다가 돌아오신 어느 겨울밤이 떠오릅니다. 아버지가 안 계시면 어머니는 저만 빼고는 동생들을 큰방에서 모여 자게 했습니다. 겨울이라 더 그랬겠지요. 모여 자면 두 아궁이에만 불을 지피면 되었으니까요. 가을 일이 끝나고 겨울 초입에 집을 나가신 아버지가 그때까지 우리들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양과자를 사가지고 오셨습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모두들 깨서 그 양과자를 먹던 밤. 롤이 말린 사이사이에 크림이나 팥이 가득 차 있던 케이크도 있었지요. 어머니는 제 것은 접시에 따로 골고루 담아주셨어요. 어머니는 늘 그러셨지요. 포도가 한송이 있으면 반을 뚝 떼서 따로 두시고는 이것은 큰형 것이니 손대지 말라고…… 지금 생각해보면 민망하지만 그런 일들이 잦아서 저에겐 자연스러운 일이라 그런가보다, 한 일인데 동생들에겐 그게 매우 큰 특혜로 보였던 모양으로 지금도 가끔 원성을 듣는답니다. 헌이는 가끔 제게 장남 힘들지? 하면서 어렸을 때 엄마가 복숭아 큰 거 오빠만 줬잖아, 옥수수도 알이 통통하게 잘 배긴 거 오빠 먼저 주고 국도 오빠 먼저 떠주고…… 그 대가라고 생각해, 하면서 웃곤 합니다. 그때 저는 아버지는 이런 맛있는 것을 어디서 사 오시는지, 매우 궁금했습니다.

 

   저도 아이들에게 기억에 남을 선물을 하고 싶은데……

 

   

   아버지께서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는데 아버지께서 집에 안 계셔도 어머니는 항상 아버지 밥그릇에 밥을 담아서 아랫목에 묻어두셨습니다. 밤에도 대문을 열어두셨지요. 바람이 많이 불면 열어놓은 대문에 돌을 괴어놓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모르셨을 거예요. 가끔 제가 다시 나가 대문을 꼭 잠가두는 것을요. 그런 밤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아버지가 집에 없다는 생각에 불안해져서 장남인 제가 무엇이라도 해야 했던 그런 밤이요.

 

   어머니께 안부 전해주십시오. 어머니는 몸을 돌보지 않고 거칠게 일을 하시니 항상 걱정입니다.

   또 연락 올리겠습니다.

 

   1991년 12월 4일

   아들 승엽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