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라인 연재

54회

 

내가 J시에 머무는 동안에도 주말이면 서울에서 형제들이 차례로 아버지를 보러 왔다. 아픈 엄마를 집에서 살피고 있는 셋째 오빠만 제외하고. 형제들이 내려와 있는 동안엔 아버지가 잠을 잘 잘뿐 아니라 움직임도 활발해지곤 했다. 겉으로는 바쁜데 뭐 하러 왔느냐고 하는데도 아버지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온화해졌다. 특히 막내가 J시에 오면 아버지는 활짝 웃기까지 했다. 막내가 머무는 주말 동안 아버지는 집의 부실한 곳들을 수선했다. 잘 닫히지 않는 대문을 고치고 헐렁한 헛간 문손잡이를 아예 떼어내고 새것으로 달았다. 이제는 키우지 않는 개집에 달려 있는 철망을 정리하느라 아버지와 막내는 토요일과 일요일을 개집 앞에서 보내기도 했다. 막내가 아버지 또 어디요? 하면 아버지는 막내를 앞세우고 작은 대문으로 이어지는 담 저쪽으로 이제 곧 무너지려 하고 있는 돌을 다시 쌓았다. 막내가 다시 돌아갈 때 아버지는 신작로까지 막내를 따라나섰다.

―아버지, 이러다가 역까지 따라오시겄네……

막내가 들어가라고 해도 막내가 부른 택시가 도착할 때까지 신작로에 서 있었다. 택시 안에서 막내가 창을 내리고 이제 들어가세요, 하자 아버지는 몸을 굽히고 손을 뻗어 잘 가거라, 하며 막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막내를 태운 택시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아버지는 신작로에 서 있다가 어깨를 축 내려뜨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누구보다도 막내가 왔다 가고 나면 아버지와 내가 남아 있는 집은 더욱 적막해지곤 했다. 엄마가 집에 있었을 때에 형제들이 돌아가면서 집에 와 주말을 보낸 후 다시 돌아갔던 일요일 저녁의 쓸쓸함이 짐작되었다. 막내가 돌아간 후 나와 둘이 남게 되면 아버지는 막내와 함께 고친 대문을 다시 닫아보고 헛간 문고리를 잡아당겨보다가, 집에 왔는디 쉬지도 못하게 일만 시켰고나, 혼잣말을 했다. 다른 형제들이 왔다 간 후와 막내가 다녀간 후 아버지는 달랐다. 막내가 화정의 집에 잘 도착했는지를 확인하고 싶어했다. 이제 기차를 탔겠구나, 도착했겠구나, 전화 좀 넣어봐라 갸가 집에 잘 갔는지…… 아버지가 채근을 해서 내가 막내에게 아버지에게 잘 도착했다고 전화드려라,고 문자를 보내면 막내가 전화를 했는데 몹시 궁금해하던 거와는 달리 아버지는 잘 갔으면 되었다, 한마디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아버지가 왜 유독 너에게만 그러시지? 물으니 막내는 나를 늘 바래다주셨거든, 했다.

―어디를?

―내가 대학에 가느라 집을 떠난 후부터 J시 집에 갔다가 다시 서울 올 때면 아버지가 꼭 역까지 바래다주셨어. 그 시간이 한밤중이거나 꼭두새벽이라도…… 기차표 없이도 기차가 서 있는 데까지 들어갈 수 있는 입장권을 끊어 들어오셔서 내가 기차 타는 거까지 보고 그러셨거든. 최근까지도 그리 하셨는데 이제 못하시게 되니까……

―그랬어? 왜 그러셨지?

―나는 처음부터 아버지가 그렇게 해서 내가 막내니까 걱정이 돼서 그러신가보다, 했을 뿐인데 누나가 왜 그러셨지? 물으니 대답할 말이 없네, 글쎄 아버지가 왜 그러셨을까? 누나?

 

이제 회사를 은퇴한 큰오빠가 온다고 연락이 왔을 때 아버지는 시내에 나가서 큰오빠가 좋아하는 거라며 콩나물국밥을 포장해 와서 내게 내밀었다. 3인분이었다. 큰오빠가 콩나물국밥을 좋아했던가? 내가 계란물을 더 만들어 부은 콩나물국밥으로 저녁을 먹고 난 후 아버지가 먼저 식탁에서 일어나 마당으로 나가면 자연스럽게 큰오빠가 따라 나갔다. 두 사람은 앞마당 옆마당 뒷마당으로 막힘이 없이 연결된 집을 밤이 늦도록 돌면서 얘기를 나누었다. 일찍 집을 떠난 큰오빠가 J시의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두 사람이 하던 집돌이가 아직도 이어지고 있었다. 간간이 아버지가 웃는 소리가 들릴 때면 나는 아버지가 웃기도 하시네, 싶어 작은방 창가에 서서 두 사람을 내다봤다. 귀를 기울이니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 속에 내가 등장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큰오빠에게 그리도 헌이가 니 말을 잘 들응게 니가 이제 헌이한티 그만 집에 가라고 일러봐라, 하니 큰오빠는 있을 만하니까 있는 거니 크게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큰오빠는 아버지 허리에 팔을 두르고 끊이지 않고 무슨 이야기인가를 아버지에게 전했다. 아버지가 잠든 후에 내가 우사의 빈방 나무궤짝 안에 들어 있던 큰오빠와 아버지가 주고받은 편지를 읽었다고 하자 큰오빠는 그게 아직도 있냐? 하면서 웃었다. 그때만큼 편지를 많이 썼던 때는 일생에 없었다면서. 아버지와 큰오빠가 집을 빙빙 돌면서 나눈 얘기들을 내가 듣고 있었다는 걸 모르는 큰오빠는 집을 너무 오래 비워두는 것 아니냐며 자신이 아버지 곁에 있을 테니 그만 집에 가보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엄마가 올 때까지는 내가 여기에 있을게, 하자 큰오빠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엄마가 올 때까지,라고 발음하는데 콧잔등이 찡해지려 해서 나는 큼, 소리를 내며 학사모를 쓰고 있는 형제들의 사진들이 걸려 있는 벽을 쳐다봤다. 비어 있는 내 자리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는지. 그사이 엄마는 위 상태가 악화되어 병원에 다시 입원을 했다. 형제들은 엄마에게 악화된 상태를 알리지 않기로 하고 지난번 치료의 연장선상인 것처럼 말했다. 그런 중에도 엄마는 내게 자신이 다시 입원했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알리지 말라는 말들이 우리 가족 사이에 흘러다녔다.

 

어느날 아버지는 밤잠에서 깨어 아버지 침대 아래서 자고 있는 나를 흔들어 깨웠다.

―헌아, 어서 도망쳐!

아버지는 다급하게 아직 일어나 앉지도 않은 나를 몸으로 가리며 소리를 쳤다.

―여기엔 내가 있을 텐게 너는 어서 도망쳐.

아버지는 내 등을 떠밀기까지 했다. 두려움에 가득 차 몸을 떨면서도 나를 해치려는 무엇인가를 향해 손을 내젓고 있는 아버지를 등 뒤에서 껴안았다. 몸부림치는 아버지를 더 깊이 껴안았다. 꿈을 꾼 거예요, 현실이 아니야…… 아버지를 더 깊이 껴안자 아버지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아버지.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면 괜찮아져요, 아버지. 강압적으로 껴안았던 힘을 풀고 야윈 아버지의 등을 쓸어내렸다. 다시 침대에 눕는 아버지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노래를 불렀다. 아버지는 잠에 들면서 희미한 목소리로 엄마에게 알리지 말라고 했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섬집 아기는 아버지를 다시 잠들게 했다.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나는 왜 섬집 아기를 자장가로 알고 있는지. 어느날 아버지는 벌떡 일어서더니 내가 말릴 틈도 없이 현관문을 밀치고 마당으로 뛰어나갔다. 뒤따라 나갔으나 벌써 아버지는 대문을 두고 담으로 뛰어올라 한순간에 뒷집 밭으로 떨어졌다. 내가 달려갔을 때 아버지는 담 밑 밭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었다. 내가 다가가 어둠 속의 아버지를 흔들자 아버지는 내가 왜 여기에 있냐……고 물었다. 영문을 몰라하는 아버지를 부축해 비어 있는 뒷집 마당으로 나와 집으로 돌아와서 살펴보니 아버지의 발톱이 깨져 있고 걸어온 자리마다 피가 흘려져 있었다. 아버지 머리에는 검불이 잠옷에는 밭흙들이 여기저기 달라붙어 있었다. 약상자를 꺼내와 깨진 발톱을 소독을 할 때 아버지가 한 말은 엄마에게 알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내가 아버지가 이순신 장군이야? 엄마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게? 하자 발톱이라 통증이 더 심할 터인데도 아버지가 웃었다. 알리지 말라는 말들. 형제들은 엄마의 위 상태를 엄마에게 알리지 말자 하고, 엄마는 다시 입원한 것을 아버지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고, 아버지는 자신의 발톱이 깨진 것을 엄마에게 알리지 말라 했다.

 

큰오빠는 일요일 밤기차를 타고 돌아가면서 내게 긴 문자를 열몇번에 나눠서 연이어 보냈다. 기차가 오빠가 내려야 할 수서역에 도착할 때까지 썼을 것이다.

 

어머니가 없는 집에 내가 있으니 안심이야 되지만 내가 걱정이 된다고 큰오빠는 쓰고 있었다. 부모가 병들고 더는 늙을 수 없을 만큼 늙었는데도 마을 너머 철길로 기차는 지나가고 논엔 벼가 자라고 냇가의 수풀 속엔 백로들이 날아오르더라고. 아버지를 운동 삼아 걷게 해보려다보면 차가 다니지 않는 길을 찾게 되고 결국 논길을 걷게 되는데 그때마다 논에 세워진 우사 안의 개가 쫓아나와 짖어대곤 했다고.

 

커다란 검은 개 한마리가 논에 지어진 우사에 살고 있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짖긴 해도 전혀 경계심이 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아는 개였다. 아버지에게 저 개는 왜 저기에 사느냐고 물으니 소를 지키라고 매어둔 것이라고 했다. 들판에 우사가 세워져 있는 것도 이상한데 그 우사를 지키는 개라니. 처음 그 앞을 지날 때 누구네 집 우사냐고 물었으나 아버지는 전에는 월성 양반 논이었는데 지금은 누구네 논인지 모르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내가 산보하자고 할 때면 냉장고를 열어 고등어조림 남은 거 같은 거를 지퍼백에 담아 챙겼다가 들판의 우사 앞을 지날 때면 개 밥그릇에 부어주곤 했다. 그래서인지 개는 소들뿐인 들판의 우사에 종일 혼자 있다가 아버지의 기척이 느껴지면 멀리서부터 우사 바깥으로 나와 꼬리를 흔들며 아버지가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목줄에 매여 있어서 더 달려나오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면 개의 눈엔 반가움이 가득 차서 빛이 났다. 그 검은 개가 큰오빠를 보고도 짖어댔던 모양이었다.

 

큰오빠는 이어 썼다.

 

예전에 선배 한 분이 나에게 은퇴를 하게 되면 고향에 내려가서 이주일쯤 지내보라고 했네. 듣고는 곧 잊어버렸지. 그러다가 어제는 그 선배의 말이 계속 귓전에 맴돌았어. 은퇴했다고 달라질 일이 있겠나, 생각했지. 선배가 말한 것처럼 이주일을 연이어 묵어본 적은 없지만 부모님이 아직 그 집에 계시니 자주 가는 편이었으니까. 그런데 어제 문득 은퇴 후에 J시에 갔을 때의 내 마음이 짚어졌어. 은퇴 후에 J시에 내려가면 부모님을 보고 결혼식 같은 게 있으면 참석했다가 은퇴 전보다 급히 서울로 돌아오곤 했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가 이제 일터에서 물러난 사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J시를 떠나 서울로 가면서 나 스스로 길들인 습관들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지.

스무살 무렵에 J시를 떠나 사십오년 가까이 공무원 생활, 대기업 회사원 생활을 해오는 동안 내 몸에 밴 습관들 말일세. 아침 6시면 기상하고 생식으로 아침을 대신하고 7시 반 무렵까지 출근하는 습성. 나는 시골에서 자라서 대도시에서의 직장생활과 일상에 서툴렀네. 대책으로 무슨 일을 해도 준비하는 시간을 마련해놓곤 했지. 처음엔 무슨 약속이 생기면 길을 모르니 전날 그 장소를 미리 한번 가보기까지 했지. 약속에 늦는 실수를 하지 않으려고. 제대로 시간을 지키는 것이라도 바로 하고 싶었거든. 그렇게 살아왔어. 회사생활도 그렇게 했네. 출근시간은 9시였으나 아침 7시 반 미리 출근해서 9시까지 그날 하루에 해야 할 일들의 밑일들을 해내곤 했지. 스스로 정한 출근시간은 7시 반이나 퇴근은 정해지지가 않았던 게 내 일터의 생활이었지.

나는 은퇴 후에도 6시면 기상했네. 먼저 퇴사한 선배들이 추렴해서 꾸린 사무실에 7시 반까지 출근하듯이 나갔지. 거기에 가서 맨 처음 하는 일이 화분에 물 주는 일이었는데도 나는 그렇게 했지. 앞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아직까지는 거의 매일 점심 약속이 있는 편이고, 그래, 앞으로는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는 일주일에 두번 강의도 나가고 은퇴한 회사의 자문 역할을 맡고 있기도 하지.

지난 사십오년은 만만치 않았지. J시를 떠난 후에 사흘 이상을 아버지 집에서 묵은 적이 없는 그런 삶을 살았지. 언제나 발등에 떨어진 일에 치여서 하루하루 일주일 한달 일년…… 세월이 그리 흘러갔어. 아니군. 몇해 전 여름을 보내기 힘겨우셨던 아버지의 지병이 악화되어 앰뷸런스에 실려 서울 병원에 입원을 하고 삼주일을 지내고 난 뒤에 다행히 안정권에 들어 퇴원을 하게 되었을 때 아버지를 모시고 J시에 내려와 며칠 지낸 적이 있긴 하군. 자네가 베를린인가에 가 있었던 그해의 여름이네. 형제들이 모두 일정이 맞지 않아서 내가 여름휴가를 아버지 퇴원에 맞췄지. 그날 어찌나 비가 내리던지. 원래는 자동차를 운전해서 J시에 갈 생각이었는데 비 때문에 기차를 타게 되었다네. 병들고 늙은 아버지와 그때 은퇴를 앞두고 있던 내가 나란히 앉아 고향으로 가는 기차를 탄 기분은 참으로 묘하더군. 아버지를 부축하여 기차 안의 화장실을 다녀올 때도 물을 편안히 마시게 해드리기 위해 빨대를 물병에 꽂고 물병을 기울일 때도. 기차가 서울역을 출발한 후 어느덧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든 아버지를 보고 있으려니 딱딱하게 굳어질 대로 굳어졌다고 여긴 내 마음 안에 균열이 일었어. 서글프고 허무했지만 그것만이 다는 아니었네. 맨 처음 내가 해본 것들이 스쳐 지나갔어. 스무살 무렵 처음으로 집을 떠나오던 그때의 마음, 공무원 시험 합격증을 받아들었을 때의 마음, 낮에 공무원으로 재직하며 입시를 치를 때의 마음, 어느 시절이던가, 리비아로 가서 첫 밤을 보냈을 때의 마음,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때의 마음들이 살아가기 위해 내 식대로 견고해진 나의 내부를 뚫고 올라왔어.

퇴원한 아버지를 모시고 내가 사십오년 전에 떠난 집으로 들어오는데, 어머니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나오셨지. 예전 같으면 달려나오셨을 것을 이름만 부르고 현관문에 의지해 서 있는 어머니의 눈에 우리 부자의 모습이 어찌 보였을까? 이제야 그 생각이 나.

처음에는 집에다 모셔다드리고 상경할 생각이었으나 두 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밤이 되었고, 다음 날에 떠나려 했으나 그동안 드셔온 약 양보다 늘어난 약 복용을 힘들어하는 아버지를 하루 더 지켜보자 하는 마음으로 눌러앉았고 다음 날은 어머니가 다닌다는 한의원에 따라갔다가 어머니의 부어오른 발을 보게 되었는데 그 발을 두고 올 수가 없어 하루 더 묵고…… 이러면서 일주일을 보낸 적이 있어.

 

어젯밤에 동생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어. 아무리 아버지 옆이라 하나 동생이 거기 오래 있는 것이 걸리기도 해서 어쩌든 동생을 서울로 보내고 내가 남아 있어야지, 했는데 나는 이렇게 돌아가고 있다니. 어젯밤에 이미 약속을 네번이나 미룬 옛 친구를 내일 오후에 만나기로 한 걸 다시 미뤄뒀는데도 말이지. 잠이 오지 않아 집을 나가 혼자 마을을 걸었어. 수리조합에서 만든 도랑으로 흘러가는 물소리도 듣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에 퍼진 은하들도 보고, 논의 벼들이 바람결에 서로 스치는 소리도 들었어. 옛날 생각도 났어. 아버지가 집을 떠날까봐 불안해서 아버지를 졸졸 따라다니던 어린 나 말이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장남이라는 말을 듣고 자랐지. 맏형이니 반듯해야 한다고 했어. 동생들이 잘못된 길로 가면 맏형인 내가 이끌어줘야 한다는 말을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부터 들었지. 고백하자면 나는 그 말들이 두려웠어. 혹여 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나만 잘못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에 긴장이 돼서 의자에 구부정하니 앉아 있다가도 허리를 바로 펴곤 했지. 젊은 날의 아버지가 자주 집을 비울 때면 이대로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지 않으면 장남인 나는 어떡하나…… 고통스럽고 괴로웠네. 아버지가 집을 자주 비운 것은 빈한한 시골마을에 돈이 귀하니 돈을 벌어 오려는 것임을 아는데도 그랬어. 딱 한번 아버지가 실제로 우리를 그리고 집을 떠난 적이 있었어. 이제는 세상을 떠난 고모와 아버지가 살고 있는 동네에 찾아갔지. 고모가 학교에 나를 찾아와 손을 붙잡고 아버지 데리러 가자, 했어. 그때는 거기가 어디였는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나중에 생각하니 익산 어디였던 것 같아. 역 근처의 작은 셋방이었어. 우리의 소란스러운 기척에 방문을 열고 한 여자가 나왔어. 머리에 땀에 전 수건이 아니라 고운 머리띠를 두른 여자를 나는 그때 처음 봤지. 당장 큰일이라도 낼 것처럼 치마 한편을 치켜 올리고 나를 앞장세우고 그 셋방을 찾아갔던 고모가 고운 머리띠를 두른 여자를 숨을 가라앉히고 한참 바라보더라고. 내가 고모 손을 꼭 잡자 고모가 나를 이윽히 보더니 그제사 자네가 김순옥잉가? 목소리를 높여 물었어. 배운 사람이라면서 이게 무슨 짓인가…… 고모는 말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연탄불 위에 올려져 있는 솥을 들어서 엎어버렸네. 솥 안에는 갈치조림이 들어 있었지. 냄비 하나 없이 달랑 솥 하나뿐인 부엌에서 붉은 갈치조림 국물이 내 얼굴에까지 튀었지. 고모는 내 동상은 내가 데리고 갈라니 기다리지 말라며 다시 그 셋방을 나오는데 아버지가 앞에서 골목으로 올라오고 있었어. 고모가 아버지 앞을 가로막으며 그만 집에 가자,고 했는데 아버지는 고모를 밀치고 고운 머리띠를 두른 여자가 서 있는 셋방 쪽으로 올라가려고 했어. 내가 아버지, 부르며 아버지 팔을 꽉 붙들고 아버지를 노려보았네. 아버지가 인사나 하고 오겠다고 하는 걸 고모가 못 가게 막았지. 고모 손은 잡을 수가 없었네. 연탄불 위의 솥을 들어 올릴 때 화상을 입은 손에 붉게 물집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어. 아버지가 고모의 손을 살필 때 내가 말했지. 아버지가 지금 집에 가면 나는 평생 아버지 말을 단 한마디도 어기지 않겠다고.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던 그때의 일이 어젯밤에 생각났네. 그때 그 말이 어떻게 떠올라서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지 모르겠어. 사실 내 머릿속은 아버지가 없으면 장남인 나 혼자 어떡하나, 하는 두려운 생각뿐이었는데. 우리들이 이 마을을 떠날 때 탔던 기차는 어젯밤에도 여전히 그 철길로 지나갔어. 마을을 어슬렁거리고 있으니 마치 할 일을 마치고 돌아온 느낌이었지. 일 다 하고 무사하게 돌아왔다고 보고하러 온 기분도 들더만. 그런데 보고를 받아야 할 어머니는 아파서 서울에 계시고 아버지는 이제 자전거도 탈 수 없는 사람이 되다니. 나도 이제 은퇴까지 했는데도 이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아.

 

사십오년 전에 J시를 떠날 때는 오로지 나의 미래만 생각했지. 내가 개척해나가야 할 나의 미래. 그 미래를 이제 다 살아낸 것인가, 싶어 고독하더만. J시에 올 때마다 나의 뿌리를 실감하지. 역전 시장통에서 콩 한 됫박을 앞에 놓고 팔고 있는 할머니를 보면 아직도 무슨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내 욕망이 누그러지지. J시가 아니면 내가 이런 생각을 할 수나 있었겠는가. J시는 은퇴를 했으면서도 아직도 6시면 깨어 사무실에 나가고 있는 나에 대해 생각하게 하지. 나는 일생 일 중독자였지. 나는 무엇이 두려워 은퇴를 하고도 쉬지를 못하는 걸까. 동생도 기억할까. 샛터에 갑현이라고 있었지. 말을 못 하는 부모를 둔 그 친구를 생각나게 한 것도 J시야. 내 기억 속에 그 친구는 일곱살도 안 되었을 때부터 부모의 말을 대신하고 전했어. 그의 부모가 할 말이 있을 때면 갑현이 함께 오곤 했으니 동생도 생각날 거야. 나는 갑현과 오래 친구로 지냈지. 갑현은 부모 말을 대신하느라 그랬는지 평소엔 거의 말을 안 했지. 나는 새나가면 안 되겠다 싶은 말을 갑현과 나누곤 했지. 그 친구는 청년이 되었을 때 그 말 못 하는 부모를 데리고 뉴질랜드로 갔어. 왜 하필 뉴질랜드로 가는지 물으니 거기 자연이 부모님과 맞을 것 같아서,라고 했네. 오로지 그게 그 친구가 뉴질랜드로 떠난 이유였어. 어젯밤에 들판을 걷다가 여기 사는 동안 그 친구가 단 한번도 얼굴을 찡그린 적이 없다는 것을 기억해냈지. 어젯밤은 그 기억을 붙잡고 나를 다독였네. 이제 부모의 보호자가 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그런데도 이렇게 마음이 무겁군. 이 무거운 마음을 어떻게 견뎌내야 할지 막막하여 이렇게 쓰고 있지만 동생의 대답을 듣고자 함은 아니야. 남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아는 나이 아닌가. 말 못 하는 부모를 데리고 먼 나라로 떠난 친구에 관한 기억이 내게 용기를 주는 어젯밤이기도 했지.

어젯밤 동생을 보고 있자니 동생은 여태 모르는 옛날 일 하나도 떠올랐어. 동생이 두번째 책을 냈을 때 생각나나? 그때가 아버지 회갑이었는데 동생이 그 책을 아버지에게 회갑 선물로 드렸던 거? 얼마 후에 아버지가 서울에 오셨었네. 지금은 없어진 종로에 큰 서점이 있었잖은가. 거기에서 동생이 독자 사인회 하던 날이네.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내린 아버지가 나에게 전화를 했어. 아버지가 나에게 종로서적에 가자고 했네. 거기서 동생이 사인회를 한다고 들었다며 가서 보자고 하셨네. 시골 아버지 입에서 종로서적이라는 말을 듣는 게 신선했지. 서울역 시계탑 아래에 서 있는 아버지를 만나 동생을 보러 종로서적에 갔었지. 5층이었던가. 책들 사이에서 사인을 하고 있는 동생을 아버지와 나는 숨어서 지켜봤지. 아버지가 동생이 고개를 들 때마다 책 매대 아래로 몸을 낮추며 숨는 것이 재밌어서 나는 푸하하, 웃음이 터지는데 들킬까봐 내 입을 가리는 아버지 눈엔 눈물이 고여 있었지. 그날 사인회가 끝나고 동생이 떠난 후에 아버지는 서점 매대에 남아 있는 동생 책을 한권 남겨놓고 모두 사서 들고 J시로 돌아가셨지. 나는 은퇴한 사람 아닌가. 다음 주에 내가 다시 내려올 것이니 이제 동생은 집으로 돌아가서 동생 일을 해. 그게 아버지가 원하는 일일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