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 故 김수영 산문

 

 

해제

여기에 실리는 김수영(金洙暎, 1921〜68)의 산문은 현재까지 그의 전집(민음사 1981)에 수록되어 있지 않은 것들로, 미발표 유고가 아니라 김수영의 생존시에 이미 발표된 것들이다. 그와 그의 문학에서나, 60년대 사회문화적 상황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글들이지만 이 글들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어 이를 공개한다.

「자유란 생명과 더불어」는 1960년 4월혁명을 전후로 해서 씌어진 글이다. 5월호 잡지가 발간되기 위해 필요했을 원고마감 시한을 고려하면 4월혁명 이전에 씌어졌으리라 생각되는데, 이후 김수영의 현실인식의 변화를 보여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참고로 말하면, 이 글은 어떤 연구자의 김수영 작품목록에서는 시로 분류되어 있던 것이다. 「이 거룩한 속물들」은 현실과 타협하는 자기를 비판하고 시인이 지켜야 할 양심의 정도를 내내 강조했던 김수영의 역설적 글쓰기 방식이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산문이다. 그의 「도적」(1966.10.8)이란 시를 사후에 설명하는 것이라 보아도 좋을 텐데, 그 자신을 ‘초고급속물’이라 지칭하는 대목은 그의 양심론에 값한다. 「로터리의 꽃의 노이로제」는 당시 공화당에 의해 자행된 1967년 6·8 부정선거와 그 파장의 원인을 ‘인간의 부재’ ‘사랑의 부재’로 연결시킨다. 김수영 후기시의 주제인 ‘소음’과 ‘사랑’이 여기에서도 강조되고 있다. 부정선거에 저항하는 학생시위에 대해 “우리 사회에 아직도 시가 건재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진술하는 부분은 그가 일찍이 월북시인 김병욱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글에서도 강조한 바 있다. “진정한 시는 자기를 죽이고 타자가 되는 사랑의 작업이며 자세”라는 진술은 지금에 와서도 왜 여전히 김수영이 문제적일 수밖에 없는가를 암시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김수영이 당대의 번역가였다는 사실 또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사항은 그 스스로 말하는 현실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해 김수영이 외국 잡지와 서적을 끊임없이 탐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번에 찾은 네 편의 글은 그 작업의 결과물이다. 「신비주의와 민족주의의 시인 예이츠」와 「도덕적 갈망자 빠스쩨르나끄」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작품을 번역한 신구문화사판 전집에 작가론으로 수록된 글이다. 두 글 모두 두 사람의 문학적 일대기를 스케치하고 있는데, 그는 예이츠에게서 ‘쉬운 싸움을 거부하는 사람의 불굴의 시심’을 보고 빠스쩨르나끄에게서 ‘극도로 유동적이고 시흥적(詩興的)인 산문정신’을 본다. 김수영 산문 문체의 파동적 특질, 그리고 “더 큰 싸움, 더 큰 싸움, 더, 더, 더 큰 싸움”(「반시론」)이라고 반복하는 그의 절규가 여기에서 또다른 근거를 얻는 셈이다. 「안드레이 씨냐프스끼와 문학에 대해서」는 사회주의리얼리즘을 비판한 이유로 숙청당한 씨냐프스끼의 작품과 문학관을 소개한 글이다. 김수영이 소련과 사회주의권의 작가들에게도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예렌부르끄나 브레히트 등에 대한 언급을 통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죽음에 대한 해학」은 김수영이 편집위원으로 참여한 신구문화사판 세계문학전집에 실린 글로서, 그가 뮤리엘 사라 스파크의 장편소설 『메멘토 모리』를 번역하고 작품론으로 쓴 것이다. 김수영이 그의 문학적 생애 동안 집요하게 천착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죽음이라는 주제이고 라이오넬 트릴링의 영향 속에서 죽음을 현대시의 진정한 문제로 생각했다는 점을 고려하고 보면, 이 글은 그의 시의 비밀을 풀기 위한 또하나의 열쇠가 된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무거운 죽음을 해학의 상승으로 풀어내는 스파크의 강인한 정신이다. 참고로 말하면, 이 글은 영국작가 아이리스 머독과 스파크를 소개하고 있는 「새로운 윤리 기질」(1966.7)의 몇 단락과 동일하다. 착오 없기를 바란다.

김수영의 자료를 소개하면서 첨가해두고 싶은 사실이 있다. 그의 작품목록이 좀더 치밀하게 재작성되어야 하리라는 점이다. 예컨대 「민족주의의 A·B·C」 같은 글은 글쓴이가 ‘金洙永’으로 되어 있는데, 글의 내용이나 문체로 보건대 ‘金洙暎’의 글은 아닌 듯싶다. 좀더 확인해볼 문제이기는 하지만, 최근 들어 소홀해지고 있는 원전비평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朴秀淵/문학평론가 QKRTK@chollian.net

 

 

 

자유란 생명과 더불어

 

 

지성인은 원래 우리말로 바꿔 말한다면 ‘선비’라 할진대, 정의를 갈구하는 이유에서 자기 몸을 항시 항거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는 데 있을 것이다.

이번 3·15선거 결과로서 일어난 학생데모 사건을 위시한 마산사건을 보고 지성인이라고 해서 별달리 새삼스럽게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번 선거의 양상이란 것이 너무 악착하게 횡포하고 굴욕적이기 때문에, 이에 대하여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도록 가슴이 메어질 지경이다. 정치의 자유란 것이 현대사회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자유의 하나이고, 우리나라와 같이 민주주의 국가가 싹틀까 말까 한 것을 해도 보지 못하게 포장을 쳐서 질식시켜버리려는 마당에 있어서는 정말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다.

요즘 외국잡지를 보면, 소련 같은 무서운 독재주의 국가에 있어서도 예렌부르끄 같은 작가는 소위 작가동맹의 횡포와 야만을 막기 위해서 작가들의 단결을 호소했다 하거늘, 항차 인권의 최위기(最危機)에 처한 우리나라 지성인들이란 너나 할 것 없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다. 이번 3·15선거 전후에 하는 꼴들이란 하다 못해 시를 쓴다는 사람들까지도 권력의 편에 가담하여 명리(名利)에 급급하고 있으니 무섭기만 하다.

나는 정치문제에는 도대체가 왈가왈부하고 싶지도 않고 말해본 일도 없고 또 잘 알지도 못하지만, 이번 선거의 만행은 정치문제를 떠나서, 또는 지성의 문제를 떠나서 전국민에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분격하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생리적인 불구자이거나 ‘미라’이거나 혹은 허수아비일 것이며 대한민국의 백성이 아닐 것이다. 국민 된 자라면 어찌 엎드려 누워서 모른 체하고 있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미국의 시인 휘트먼이 말하듯이 자유란 것은 두번째나 세번째나 혹은 다섯번째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맨 마지막으로 생명과 더불어 없어지는 것이니, 우리는 그처럼 끝까지 싸울 수밖에 다른 길이 없는 것이다.

나는 이번 싸움〔抗拒〕이 우리의 싸움의 서막의 서곡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우리가 앞으로 건설할 빛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구상하여볼 때, 염두에 들어오는 무수한 고생다운 고생의 첫머리인 것 같다. 그리고 이런 싸움의 전망이란 것이 극히 암담한 것이고, 지성이 도저히 폭력화될 수 없지 않은가!

그렇지만 지성인은 그래도 조리있는 설득과 아름다운 이성으로 줄기차게 자기들의 맡은 각자의 천직을 고수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것은 무슨 데모사건 같은 것에 있어서도 정력이나 인내 이상의 그 몇배의 진실성이 없이는 되는 것이 아니다. 될 수만 있으면 조용히 아름답게 그러나 강하게 싸우고 싶다. 그리고 그렇게 싸우는 법을 일반 민중에게 깨우쳐주는 것이 지성인의 의무가 아니겠는가.

이번 학생데모 사건은 오히려 야당인 민주당을 앞서서 걸어가고 있음을 입증해주는 것이 되었으니, 야당은 눈앞의 목적에 편중하지 말고 좀더 가라앉은 방향으로 좀더 먼 곳에 목표를 두어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얼마나 뒤떨어졌는가. 학문이고 문학이고간에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이 벅찬 물질만능주의의 사회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정신의 구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지난호의 『새벽』지에 게재된 러쎌의 소설이라든가, 요즘 내가 읽은 모라비아의 『멕시코에서 온 여인』이라든가는 모두가 벅찬 물질문명에 대한 구슬픈 인간정신의 개가(凱歌)이었다.

지성인은 눈에 뜨이지 않게 또 눈에 뜨이지 않는 성과를 위해서, 그러나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정신을 위해서 싸워야겠고, 그러한 무장이 항시 되어 있어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문화인이, 아니 3·15선거를 중심으로 해서 바람 속에 들어간 문화인이 어처구니없게 불쌍하기만 하다. 하나 어제까지 우리들이 싸워왔듯이 오늘도 우리는 싸워야 하고, 오직 내일의 승리는 우리의 것임을 나는 확신하다.

〔새벽 1960년 5월호〕

 

 

 

 

이 거룩한 속물들

 

 

소설이나 시의 천재를 가지고, 쓰지 못해 발광을 할 때는 세상이란 이상스러워서, 청탁을 하지 않는다. 반드시 그런 재주가 고갈되고 나서야 청탁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무릇 시인이나 소설가는 청탁이 밀물처럼 몰려들어올 때는 자기의 천재는 이미 날아가버렸다고 생각하는 게 좋다. 일껏 하던 놀음도 멍석을 깔아놓으면 못한다는 말의 ‘멍석’이 청탁이 되는 예를 글쓰는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한번씩은 느끼는 것이 아닐까.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매일같이, 매달같이 너절한 신문소설과 시시한 글들이 쉴새없이 쏟아져나올 수 있겠는가.

‘속물론(俗物論)’의 청탁을 받고 우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이런 얄궂은 생각과 쓰디쓴 자조의 미소뿐. 도무지 쓰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고, 붓이 철근같이 안 움직인다. 세상은 참 우습다. 그렇게 이를 갈고 속물들을 싫어할 때는 아무 소리도 없다가 이렇게 내 자신이 완전무결한 속물이 된 뒤에야 속물에 대한 욕을 쓰라고 한다. 세상은 이다지도 야박하다.

우연히도 어제 우리집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뜰 아래의 헌 재목을 쌓아둔 광의 바깥벽이 며칠 전의 비오던 날 무너져버렸다. 이 헌 재목은 다른 게 아니라 재작년 초겨울에 앞마당 밖의 양계장을 하던 자리에 세운 집이 무허가로 헐려서 뜯어낸 것들이다. 한 백평 가량의 공터를 빌려서 매년 토지세를 내고 양계를 하다가, 그것이 수지가 안 맞아서 여편네의 고안으로 그 자리의 일부에 이십평 가량 줄행랑 비슷하게 하꼬방을 드리고, 세를 주었는데, 땅주인이 노발대발하고 구청에 찔러서, 근 일년 동안을 승강이를 하다가 헐린 것이다. 그 비극의 재목을 처넣어둔 광의, 블록으로 싼 바깥길 쪽 벽이 헐린 뒤에도, 바쁘기도 하고 게으르기도 한 우리 부부는 그 담을 고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속에 든 기둥, 널빤지, 문짝, 서까래 부스러기들이 썩은 생선뼈처럼 그대로 바깥으로 꿰져나갔다. 단돈 십원에 벌벌 떠는 여편네의 생리로서 이 헌 재목이 아깝지 않을 리가 없다. 더군다나 이 재목은 생돈 이십만원을 곱다랗게 손해를 보고 남은 원한의 유산(遺産)이다. 그 재목이 하루 이틀 지나는 사이에, 예측한 대로, 도난을 당했다. 그중에서 제일 값진 현관 문짝부터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우리들은 그 담을 고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우리들은 웃고만 있었다. 개가 짖어도 나가보지를 않았고, 나가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러다 친구 Y가 집을 증축하겠다는 말을 듣고 우리집 재목을 갖다 쓰라고 했다. 이 친구가 바로 어제 이 재목을 가지러 왔다. 그래서 우리집에서 삼십리 가량 떨어진 금호동까지 재목을 싣고 갈 인부를 얻지 않으면 아니되었다. 여편네는 우리 동네에서 그중 가난한 아무개 아버지를 불러왔다. 한 리어카가 잔뜩 되는 나무를 골라내고 나니, 광이 허술해지고 통로까지 생기었다. 이 통로를 메우게 하려고 광 밖에 세워두었던 나무기둥들까지 집어넣어서 엉성하게 밖으로 난 구멍을 메우게 하고, 임시로 담이 헐린 곳에 가시철망을 치게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아무개 아버지가 가시철망은 치지 않아도 된다고 한사코 반대한다. 여편네는 자꾸 치라고 명령을 한다. 그러다가 몇차례 옥신각신을 한 끝에 아무개 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주인의 명령에 못 이겨서 가시철망을 친다. 그러자 바깥길에 동네 아이들이 몰려와서 구경들을 한다. 그 아이들 중에는 이 아무개 아버지의 어린애들도 끼여 있다. 그런데 이 아무개의 아버지의 어린애의 손을 잡고 있는 옥색 스웨터를 입고 있는 처녀아이가 며칠 전에 나무를 빼가고 있는 것을 나는 우연히 창 너머로 본 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우리 동네에서 제일 가난한 이 아무개 아버지가 수상하다고 생각한 일이 있던 나의 의심은 갑자기 눈을 크게 뜨게 되었다. 그래서 유심히 이 아무개 아버지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이 아무개 아버지는 별안간 날카로운 고함을 지르면서 자기의 어린것들과 옥색빛 스웨터의 처녀아이를 가라고 쫓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철망을 다 쳤다고 해서, 부엌 뒷문을 열고 나가보니 꿰어져나온 생선뼈의 한 귀퉁이에 쳐놓은 철망은 단 두 줄. 그것은 대포를 들고 오는 도둑에게는 거미줄만한 역할밖에는 못할 정도의 것이다. 나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 아무개 아버지가 재목을 싣고 간 뒤에, 혼자서 무너져 부서진 블록 토막을 주워 모아가지고, 거미줄 밑에다 엉성하게 쌓아올렸다. 이것은 도둑을 막거나, 도둑에게 호통을 치기 위한 방폐라기보다는, 도둑에게 애소하는 눈물의 제스처다. 물론 이런 허약하고 비겁한 제스처가─그것이 아무개 아버지이든 누구이든간에─도둑에게 통할 리가 없다.

이런 어리석은 어제의 경험이, 속물론을 쓸 자격을 이미 상실하고 고민하고 지친 나의 머리에, 아주 아득한 옛날의 기억처럼 아물아물 떠오르는 것이 신비스럽기까지도 하다.

이렇게 지나치게 서론이 길어진 것도 역시 속물론을 쓰기 싫은 심정의 서투른 지연작전이라고 생각해주면 된다. 나를 보고 속물에 대한 욕을 쓰라는 것은 아무개 아버지를 보고, 자기가 도둑질을 한 집의 담에 가시철망을 치라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보다 더 어색한 일이 없다.

 

우선 나는 지금 매문(賣文)을 하고 있다. 매문은 속물이 하는 짓이다. 속물 중에도 고급속물이 하는 짓이다. 나뿐만 아니라 모든 매문가의 특색은 잡지나 신문에 이름이 나는 것을 좋아하고, 사진이 나는 것을 좋아하고, 라디오에 나가고, 텔레비에 나가서 이름이 팔리고, 돈도 생기고, 권위가 생기는 것을 좋아한다. 입으로야 물론 안 그렇다고 하지. 그까짓 것, 그저 담뱃값이나 벌려고 하는 거지. 혹은 하도 나와달라고 귀찮게 굴어서 마지못해 나간 거지, 입에 풀칠을 해야 하고, 자식새끼들의 학비도 내야 할 테니까 죽지 못해 하는 거지, 정도로 말은 하지.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만도 아닐걸…… 그런 것만도 아닐걸……

그러다가 보면 차차 돈도 생기고, 살림도 제법 안정되어가고, 전화도 놓고, 텔레비도 놔야 되고, 잡지사나 신문사에서 오는 젊은 기자들에 대한 체면이나, 다음 청탁에 대한 고려를 해서도, 다락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헌 잡지 나부랭이나 기증받은 책까지도, 하다 못해 동화책까지도, 말끔히 먼지를 털어서 비어 있는 책꽂이의 공간을 메워놓아야 한다. 그리고 베스트쎌러의 에쎄이스트로 유명한 A, B, C의 뒤를 따라 자가용차를 살 꿈을 꾸고, 펜클럽 대회가 빠리와 미국에서 언제 열리는가에 신경을 써야 한다.

이런 악덕은 누차 말해두거니와,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이다. 그래서 나는 전법(戰法)을 바꾸었다. 이왕 도둑이 된 바에야 아주 직업적인 도둑놈으로 되자. 아무개 아버지 같은 좀도둑이 아니라, 남의 땅에 허가 없이 집을 짓는 아무개 아버지가 도둑질을 한 집의 주인 같은 날도둑놈이 되자. 그래서 하다 못해 무허가의 죄명으로 집을 헐리고 때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그 편이 낫다. 그 편이 훨씬 남자답고 떳떳하다. 즉, 나다.

이 내가 되는 일, 진짜 속물이 되는 일, 말로 하기는 쉽지만 이 수업도 사실은 여간 어렵지 않다. 속물이 안되려고 발버둥질을 치는 생활만큼 어렵다. 그리고 그만큼 고독하다.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고독은 나일론 재킷이다. 고독은 바늘끝만치라도 내색을 하면 그만큼 손해를 보고 탈락한다. 원래가 속물이 된 중요한 여건의 하나가, 이 사회가 고독을 향유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속물이 된 후에 어떻게 또 고독을 주장하겠는가.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속물은 나일론 재킷을 입고 있다. 아무한테도 보이지 않는 고독의 재킷을 입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재킷을 입고 있는 사람은, 이 글 제목대로 ‘거룩한 속물’ 즉 고급속물의 범주에는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은 이 나일론 재킷을 입은 속물이다. 고독의 재킷을 입지 않은 것은 저급속물이지 고급속물은 아니다. 고급속물은 반드시 고독의 자기의식을 갖고 있어야 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규정을 하면 내가 말하는 고급속물이란 자폭(自爆)을 할 줄 아는 속물, 즉 진정한 의미에서는 속물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아무래도 나는 고급속물을 미화하고 적당화시킴으로써 자기변명을 하려는 속셈이 있는 것 같다. 이쯤 되면 초(超)고급속물이라고나 할까. 인간의 심연(深淵)은 무한하다. 속물을 규정하는 척도도 무한하다.

속물은 어디에 있는가. ‘거룩한 속물’은 어디에 있는가. 양서점(洋書店)에 있는가. 양서방(洋書房)의 주인은 일본 고본옥(古本屋)의 주인에 비하면 어디인지 모르게 거만하다. 양서방의 카운터에 타이프라이터를 놓고 앉아 있는 좁다란 바지통의 사나이의 그 야무진 눈동자, 우리들은 이 배미사상(拜美思想)의 눈동자를 오늘의 지성이라고 착각하고 있지나 않은가. 그의 눈동자에는 나일론 재킷이 씌어져 있나. 혹은 신간 양서(洋書)를 진열해놓은 외국 대사관 도서실의 카드상자 앞에 앉아 있는 청년과의 대화, 지성적인 청년에게, “제임즈 볼드윈의 『조바니스 룸』이 있습니까?” 하고 물어봐 보아라. 그는 대뜸 경멸하는 표정으로 변하면서, “여기에는 『제임즈 본드』 같은 저급한 책을 보여주는 데가 아닙니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이것은 실제 얼마 전에 내가 당한 일이다. 이 말을 듣고 “네 그렇습니까” 하고 그대로 물러나왔더라면 멋이 있었던 것을 원래가 고급속물도 저급속물도 아닌 나는, 내가 찾고 있는 책이 ‘저급한 제임즈 본드’가 아니라 ‘고급한 제임즈 볼드윈’이라는 설명을 누누이 해주었다. 청년은 다시 발끈 화를 내면서, “그런 이름은 모르니까, 저 카드서랍을 찾아보세요!” 물론 카드서랍에 『어너더 컨트리』를 쓴 흑인작가의 옛날 소설 이름이 들어 있을 리가 없다. ‘B’자의 서랍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보아도 볼드윈의 옛날 소설은커녕 그의 근간 저서도 없고, 도대체가 정치가나 경제학자나 신학자나 드레스 메이커의 ‘볼드윈’도 없다. 이것은 도서관원만이 속물일 뿐만 아니라, 도서관 자체가 거룩한 속물이다.

 

속물의 특성은 겸손하지 않은 것이다. 일본에서도 얼마 전에 십일층인가의 고층건물을 지은 사람을 상대로 그 건물의 뒤에 사는 사람이 햇빛을 막아서 그늘이 진다는 피해로 오랫동안 소송을 걸었다가 진 일이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문화인이라면 옆의 집에 그늘이 지는 것을 보고 집까지는 헐 용기가 없더라도 미안한 생각쯤은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신문소설가나 방송작가들을 보면 그늘이 진 옆의 집에 미안한 생각을 품기는커녕, 왜 나만큼 큰 집을 못 짓느냐고 호통을 치면서, 쓰레기와 오물까지도 아침저녁으로 내리쏟는다. 유독 신문소설가나 방송작가뿐이 아니다. 이런 그레셤의 법칙은 문화단체와 예술단체의 이름으로 교수의 이름으로 학장의 이름으로 아나운서의 이름으로 신문기자의 이름으로 날이 갈수록 더 성해가기만 한다. 유능한 아나운서와 유능한 사회자는 대담자나 회담자나 청중을 리드해간다는 미명으로 무시하고 모욕하는 사람이다. 유명이 유명을 먹고, 더 유명한 것이 덜 유명한 것을 먹고 덜 유명한 것이 더 유명한 것을 잡아누르려고 기를 쓴다. 이쯤 되면 지옥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회의 대제도(大制度)는 지옥이다. 이 지옥 속의 레슬러들이 속물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속물이다. 아무것도 안 붙인 가슴보다는 지옥의 훈장이라도 붙이고 있는 편이 덜 쓸쓸하다. 아무 목걸이도 없느니보다는 개의 목걸이라도 걸고 있는 편이 덜 허전하다. 하나님이시여, 이 ‘테리어’종들에게 구원을!

구원은 무대를 바꾸어놓아야 한다. 사회자가 나쁜 게 아니라 사회자가 서 있는 자리가 나쁘다. 사회의 연단과 마이크의 위치를 관중의 뒤쪽에 놓아야 한다. 관중이 안 보이는 곳에. 그러나 시끄러운 것은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한 놈이 하던 목소리가 관중이 안 보인다고 사회자가 수시로 바뀌더니 나중에는 사회자가 관중보다 더 많아진 나라가 있다. 이것을 고치려고 어떤 나라에서는 천장에다 사회석을 만들기도 하고, 마룻바닥 밑에다 유리를 깔고 집어넣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천장과 마룻바닥 밑은 관중의 고개가 너무 아프다고 해서 다시 끌어내려서, 이번에는 사회자를 중심으로 하고, 다시 옛날의 약장수나 요술쟁이들이 하는 식으로, 둥그렇게 모여앉도록 했다. 민주주의의 방송망과 텔레비망이다. 그러나 역시 속물들은 여전하다. 하지만 일루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모두 다 속물을 만들어라. 모두 다 유명하게 만들어라. 간판이 너무 많은 종로나 충무로 거리에서 간판이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되기까지 더 간판을 늘려라. 하나님은 오늘날의 속물의 근절책으로 이 방법을 시험하고 있고, 어느정도 효과도 거두고 있는 것 같다.

 

쓰기 싫은 글을 억지로 여기까지 쓰고 나니 피곤하기만 하다. 하기는 피곤을 느끼는 것도 하나의 약(藥)이다. 미국의 오늘의 모든 폐해는 이 피곤을 모르는 데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을 흉내내기 시작한 지 아직 얼마 안되는 우리들은 언제 피곤을 배울까. 우리들은 아직도 배가 고픈 단계에 있다. 피곤도 배를 제대로 채우고 나서야 느끼게 될 것이니까. 앞으로도 한참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 친구들 중에는 라디오 드라마와 유행가를 거의 도맡아 쓰고 있는 친구로 속물을 극복한 위대한 속물이 있다. 신문의 역사소설을 근 십권이나 쓴 선배 중에도 이런 분이 있다. 이쯤 되면 속물도 애교다. 그런데 이런 분들의 나일론 재킷을 분간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고, 어찌나 시간이 걸리는지, 요즘에는 그 감별까지도 포기하고 있다. 이제 나도 진짜 속물이 되어가나보다.

〔동서춘추 1967년 5월호〕

 

 

 

로터리의 꽃의 노이로제

시인과 현실

 

 

수도 서울의 곳곳의 로터리와, 광화문에서 중앙청 앞까지 뻗친 길 한가운데의 잔디밭 위에 채송화니 한련이니 장미이니 국화이니 샐비어꽃이니 다알리아니 하는 꽃들이 심어지기 시작하고 있는 지가 오래다. 그전에 중앙청 앞길의 같은 잔디 위에 학생들이 만든 치졸한 선열들의 동상이 세워졌을 때는 신문이나 잡지에서도 적지 않이 시비의 대상이 되었고, 결국 그것은 철거의 운명을 보게 되었는데, 이번의 각 로터리의 유치한 미화작업에 대해서는 저널리즘이 이것을 지적하는 것을 한번도 본 일이 없다. 그런 자질구레한 일에 무얼 그렇게 신경을 쓸 필요가 있느냐고 하면 그만인 것도 같지만, 나는 워낙 소인이 돼서 그런지 신경과민이 돼서 그런지,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가도 꺼멓고 뻘건 흙이 내솟은 긴 네모꼴이나 바른 네모꼴의 벌거벗은 흙 위에 피워놓은 어린이들의 소꿉장난 같은 꽃들을 볼 때마다 치가 떨릴 정도의 분격을 느끼게 된다. 그 어울리지 않는 불쌍한 꽃들은 지나가는 차량들의 다이너모의 먼지를 있는 대로 다 뒤집어쓰고 울고 있다. 우리들까지 왜 이렇게 욕을 보이나. 누가 우리들을 보아준다고 그러나. 우리들도 아침저녁으로 밥을 먹어야 할 텐데 누가 그 밥을 주나. 그 밥을 제대로 줄 돈이 있는가. 그런 돈이 있으면 공중변소라도 짓지…… 나를 보아줄 만한 사람은 자연히 배부른 사람들뿐일 텐데, 그런 사람들은 자기네 집 정원에 없는 나무가 없고 없는 꽃이 없다. 이렇게 그 꽃들은 울고 있는 것 같다. 그중에서 좀 유식한 꽃들은 이렇게 중얼거릴 것이다.─우리들을 이 기계의 고도(孤島) 속에 유형시킨 유사 이래의 모욕을 준 자가 누구냐. 우리들은 너희들의 삭막한 기계의 사막 속에 어울리는 생물이 아니다. 외국 손님들을 위해서 특히 이런 영광된 자리에 뽑힌 행운을 감사하게 생각하라고? 우리들을 심느라고 수고한 사람들과 앞으로 아침저녁으로 밥을 줄 시녀노릇을 할 불쌍한 영세 실업자들에게 돈벌이를 시켜주니, 그것만 해도 얼마나 좋은 일이냐고? 외국 손님들이 우리들 같은 볼품없는 꽃들이 미스코리아로 뽑혔다고 욕을 할 줄 알지만 그런 오버쎈스를 집어치우라고? 사실은 우리들을 일부러 이렇게 유치한 꼴로 심었다고? 너무 똑똑한 꼴로 심으면 외국 손님들이 경계를 하고 돈을 안 주니까, 이렇게 초라하게 심어서 동정도 받고 경멸도 받는 것이 돈을 끌어내기가 오히려 쉽다고? 부정부패가 있는 나라는 부정부패가 있는 나라에게만 안심하고 돈을 준다고? 그러니까 우리들은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그러나 그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지! 그렇게 경멸을 받아야 돈이 나온다면, 꽃 대신에 똥이라도 깔아놓는 게 좋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로터리를 지나갈 때마다 꽃 대신 똥을 보고, 꽃향기 대신에 똥냄새를 맡는다. 이런 사소한 일 같지만 무시할 수 없는 착오의 난쎈스가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다. 시민회관의 창문 밖에 장식해놓은 유치한 철책, 그것과 똑같은 돈화문의 잔디밭 가의 철책, 자유쎈터의 정원에 심은 장미꽃, 사방의 고층건물에 눌려 날로 빈약해져 보여가기만 하는 덕수궁의 연못 앞의 철책, 창경원과 조선호텔의 지붕의 오색찬란한 물감전등 등등…… 모두가 소름이 끼치는 일들이다.

요, 2,3년 내로 시단에서는 소위 ‘참여시’라는 것의 논의가 무슨 새삼스러운 일처럼 성행하기도 했다. 얼마 전에 S대학에서 ‘현대시는 왜 안 읽히느냐’는 제목에 대한 심포지엄이 있다고 해서 가보았는데, 연단에 올라가기 전에 학생들의 틈에 잠시 앉아 있으려니까, 뒤에 앉은 학생들의 대화 소리가 들려오는데, 소위 현역시인이나 현행시(現行詩)에 대한 이들의 원망이 대단하다. ‘무어? 김수영이란 치가 있나? 야, 막 까주라 까줘!’ 하고 씨근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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