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破鏡, 또는 근원으로부터의 출발

이인성·최인석·하성란의 최근작을 중심으로

 

황광수 黃光穗

문학평론가. 평론집으로 『삶과 역사적 진실』이 있음.

 

 

1

 

삶은 모순을 내포한 생명운동이다─이렇게 생각하면, 삶의 난제들이 얼마간 해소될 수 있을까? 우선 제논(Zenon)의 아이러니는 해결될 수 있을 듯하다. 움직이는 행위는 ‘운동’과 ‘정지’라는 모순의 일회적 통일성이기에, 화살은 날아가고 토끼는 거북이를 앞지른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운동과 생성을 미분하여 정지와 고정을 이끌어내려는 욕구에 휘말리기도 한다. 삶의 본질이 운동성이라면, 거기에서 어떤 접점이나 접면을 찾으려는 것은 무모한 집착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무슨 일에 맞닥뜨리면, 우리는 으레 사물의 경계부터 찾거나 시공간적 틀로 그것을 포획하려 한다. 이처럼 유구한 역사를 지닌 형상적 사유와 그에 바탕을 둔 행위에는 사물을 경계짓고 서열화하려는 욕망이 깃들여 있다. 이렇게 하여 굳어진 삶의 각질을 깨고 근원에서부터 다시 출발하려는 욕망이 우리의 글쓰기를 부추기는 게 아닐까? 그런데 근원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들뢰즈(G. Deleuze)의 말처럼 사건이 발생하는 지점이 표면이라면, 근원은 표면 자체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근원의 신화’는 깨어지지 않고 표면에서 부활한다. 그리고 표면의 안과 밖은 서로를 부정하지 않고 맞닿은 채 공존한다. 그러므로 문학의 방향이 어느 쪽으로 향하든 그것은 우리 삶의 공간을 의미로 부풀어오르게 한다.

계급의 전선은 사라졌지만, 그것은 역사와 우리의 의식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그것이 실재했다면, 그 지시대상이 달라졌거나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것은 이제 껍데기만 남은 텅 빈 개념처럼 보인다. 세상이 달라졌고, 우리의 관심이 그보다 더 미세하거나 보편적인 어떤 것─예컨대 ‘권력’이나 ‘욕망’과 같은─으로 이동함으로써 개념적 효용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달라진 내용은 문화산업과 미디어의 발달로 인한 대중문화의 폭발적 증식으로 특징지어지는 ‘소비사회’의 출현과 무관하지 않으며, 사용가치 못지않게 이미지를 소비하는 현상을 증대시켰다. 그런데 씨뮬라크르가 몇몇 이론가들의 적극적인 의미부여를 통해 화려하게 부활한 이후, 그것이 현실의 물질적 근원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인 양 오해하는 경향마저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우리는 현실이 기호들의 체계로 이해되고, 원본이 전면적으로 부정되는 상황에서 혼성모방(pastiche)을 실행한 작품의 이름이 우리 문학사에 버젓이 등재되는 현상도 경험하였다. 대중문화가 별다른 미학적 배려 없이 무절제하게 수용되는 경우가 늘어가면서, 키치와 구별되기 어려운 ‘가벼움’ 또는 ‘경박함’이 90년대의 문학판도를 휩쓰는 듯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 연대에 가벼움만 범람한 것은 아니었고, 문학사에 길이 남을 만한 작품들도 많이 생산되었다. 90년대는 가벼움에 못지않게 왕성했던 실험정신으로도 기억될 만한 연대였다. 이 글에서 부분적으로 언급되거나 인용되는 세 권의 소설집(이인성, 『강 어귀에 섬 하나』, 문학과지성사 1999; 최인석, 『아름다운 나의 鬼神』, 문학동네 1999; 하성란, 『옆집 여자』, 창작과비평사 1999)에는 삶의 근원성에 대한 진지한 탐색과 새로운 의미의 형성으로 나아가는 빼어난 작품들이 실려 있다. 우리는 이러한 작업에서 작가의 의식이 최초에 가닿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문제의식과 그것들의 전개ㆍ발전 속에서 어떠한 문학적 의미와 리얼리티가 싹트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2

 

이인성(李仁星)의 『강 어귀에 섬 하나』 첫머리에 실린 「유리창을 떠도는 벌 한 마리」는 ‘고요함’과 ‘어둠’이라는, 성글고 모호한 감각적 소여(所與)에 대한 묘사에서 시작된다. 먼저 그 ‘고요함’은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적요의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소리에 둘러싸임으로써 이루어진 것, 그래서 공간적 실체성을 부여받고 있는 것처럼 드러난다. “골목 어귀에서 들려오는, 카세트 테이프를 파는 리어카 행상이 늘상 틀어놓는 싸구려 노랫소리가, 꺼지지도 않았는데 귀 밖으로 멀리 밀려나 이 고요함에 단단한 껍질을 둘러친다. 고요함의 껍질은 소리가 딱딱하게 굳어 이루어낸 어떤 것인 모양이다.”(9면) 늘 들려오는 소리는 서술자의 의식에서 이미 고정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에, 그것은 ‘단단한 껍질’과 같은 고체성으로 그려진다. 그런데 “오늘, 또, 그 껍질은 쉽게 벗겨질 것 같지 않은 조짐이다. 흡사 거기 있기조차 않은 듯이 뿌옇게 앉아, 한없이 맥을 잃은 그녀의 모습이 그런 예감을 준다. (…) 저것은 그녀가 끌고 다니는 거의 병적인 고요함이다”(같은 곳)라는 대목에 이르면 그 ‘고요함’은 공간적 성격을 잃고 작중인물의 성격 또는 심리적 상태에 대한 은유로서 다가온다. 이인성은 아직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은 서술자의 시선과 의식을 통해 추상적인 개념에 물질적인 질감을 부여하면서 동시에 한 인간의 실존적 정서를 풀어놓는다. 언어보다 근원적인 물질적 요소와 의식의 접촉면에서 발생하는 이러한 효과는 우리를 이 소설의 공간 속으로 강하게 유혹한다.

‘어둠’의 묘사에서는 물질적 요소와 정서의 융합이 더 전면적이고 활성적이다. 빛을 빨아먹는 거머리! 끈적거리거나 축축한 물질적 성격과 함께 어둡고 텅 빈 결핍을 느끼게 하는 집 안과 거기에서 일하는 그녀의 심리상태를 거머리의 흡착성과 결합시키는 놀라운 상상력은 우리의 몸속에 어떤 생리적 반응을 일으킬 만큼 강한 느낌을 동반한다. “그 칼빛을 빼면, 그녀가 홀로 앉아 있는 저 대여섯 평의 넓이 속에서, 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