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분단 너머의 한반도

 

거울 밖으로 나온 북한소설들

동시대 북한문학 읽기

 

 

오창은 吳昶銀

문학평론가, 중앙대 교수. 저서 『비평의 모험』 『모욕당한 자들을 위한 사유』 『절망의 인문학』 『나눔의 그늘에 스며들다』 등이 있음. longcau@hanmail.net

 

 

1. 『문학신문』에서 ‘카프’를 만나다

 

중국 옌볜(延邊)대학 도서관은 북한 자료를 중요도에 따라 분류해 엄격하게 관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료의 공개조건이 까다로운데, 중앙대 국제교류처의 공식 협조 요청과 옌볜대학 외사처의 도움으로 북한자료에 대한 접근이 허가되었다. 2018년 7월 10일, 옌볜대학 도서관 1층의 ‘신문열람실/사회과학서적서고’에 처음 들어갔다. 방학이라 이용자는 나 혼자뿐이었다. 실내 조명등도 꺼져 있었다. 그 넓은 서고 가득 쌓여 있는 중국어·조선어·한국어 책들이 무덤의 벽돌처럼 느껴졌다. 안쪽 깊숙이 들어가자 큰 거울이 하나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져 있었다. 1층 도서관 전체를 비추려는 듯한 거울의 어둠 속에 내 모습이 어릿하자 나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나는 얼른 거울을 외면하며 더 깊은 곳으로 스며들었다.

언덕을 넘어서니 광활한 녹음이 펼쳐진 듯한 느낌이었다. 자료들의 위치에 익숙해지자 방대한 자료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로동신문』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고, 『민주조선』과 『로동청년』도 보였다. 『조선일보』 도 있었다. 내가 찾는 『문학신문』은 안쪽 모서리의 맨 아래 칸에 숨바꼭질하듯 놓여 있었다. 『문학신문』은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기관지’로, 창간 당시에는 매주 목요일에 간행되었던 주간신문이다. 안타깝게도 1956년 12월 6일 창간호는 없었지만 1957년 1월 3일자부터는 비교적 온전하게 살펴볼 수 있었다. 1958년 8월 21일자를 읽을 때는 감정의 파도가 내면에서 요동쳤다. 두면에 걸쳐 ‘우리 문학의 빛나는 혁명적 전통 카프 창건 33주년’ 특집이 실려 있었다. 한설야·송영·윤세평·신고송·엄흥섭·박승극의 기고문들이 순식간에 나를 60년 전으로 이끄는 듯했다. 1925년 8월 24일, 카프가 처음으로 둥지를 튼 곳이 ‘서울 견지동’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도 큰 성과였다.

나는 2018년 여름을 온전히 옌볜대학 도서관과 옌볜 자치주 도서관에서 보냈다. 1990년대 초중반에 옌볜대학 도서관의 ‘조선문도서열람실’은 북한문학 연구자들에게 ‘자료의 성지’였다. 조명희·리기영·한설야·림화 같은 카프시대 문인들의 자료와 백석·리용악 등 월북 문인들의 자료가 이곳에 보존되어 있었다. 그 자료를 활용해 한국에서 문학선집과 작가들의 전집이 간행되었다. 내가 북한문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곳도 옌볜대학이었다. 1997년 석사과정 때 교환연구생으로 그곳에서 생활하면서, 북한문학사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천세봉의 『석개울의 새봄』(1955), 황건의 『개마고원』(1956), 윤세중의 『시련속에서』(1957)를 읽었다. 그때도 옛날 신문이 있는 열람실은 이용하지 못했는데 31년이 지난 지금에야 ‘자료의 성지’는 나를 온전히 품어주었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 『문학신문』을 읽으면서, 2010년대 북한문학의 텍스트적 원형이 1950년대 후반의 문학과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북한문학은 노동 중심의 서사, 비극이 없는 낙관주의, 개인주의에 대한 비판과 집단주의의 추구 등을 특징으로 한다. 1950년대 후반 『문학신문』에는 작가들이 노동현장에서 쓴 글들이 지속적으로 실렸다. 윤시철이 김책제철소에서 용해공들과 만나 쓴 오쩨르끄(르뽀, 실화문학)나, 강계식료공장에 대한 현지보도나 강선제강소 모습에 대한 보도 등이 그 사례다. 노동현장과 문학세계를 연결시킨 사회주의리얼리즘이 지금까지 북한문학의 전통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낙관주의적 세계관은 ‘우리식 사회주의’로 이어져 동구 사회주의권 몰락이라는 얼음 폭풍을 견뎌냈다. 주체사상에 대해 뭐라고 평가하든, 그 자부심은 1950년대 성공적인 전후 복구를 통해 형성되었다. 1956년부터 시작된 ‘천리마 속도’의 자부심이 ‘고난의 행군’ 시대를 거쳐, 김정은 집권 이후로는 ‘만리마 시대’를 향해 간다는 구호로 외쳐지고 있다.

『문학신문』에 실린 기사들을 통해 당시 북한 작가들이 『현대문학』 『문학예술』 『자유문학』 『신태양』 등의 남한 문예지를 읽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리상현은 「남조선문학의 현상태와 전망」(『문학신문』 1957.12.19)에서 한흑구의 「보릿고개」(『현대문학』 9호)나 정한숙의 「화전민」(『신태양』 10호)을 거론하며 사실주의문학으로서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최소한 1950~60년대 북한 작가들은 남한문학을 읽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남한에서는 1988년 ‘납·월북문인 해금조치’ 이후에야 북한문학에 대해 비교적 자유로운 접근이 이뤄졌다.

 

 

2. 북한에도 좋은 소설이 있을까?

 

2018년 4월 27일 ‘판문점선언’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남한 민중과 북한 인민은 새로운 역사적 국면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판문점선언은 남북정상 간의 합의지만,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정착은 한반도 전체의 운명과 결부된 일이다. 그렇기에 남북한 공통의 언어를 다루는 작가들의 역할도 전환점을 맞이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납·월북문인 해금조치’ 30주년을 맞이하는 해에 판문점선언이 이뤄진 점도 공교롭다.

문학 텍스트에 스며들어 있는 정신적 내밀함이 남북한의 문화예술 교류에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북한사회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 북한문학을 읽는 것은 올바른 접근법일까? 남북의 작품들은 과연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만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에 대한 진지한 탐구는 결코 ‘낙관주의적 전망’과 연결되지 않는다. 근대문학사의 뿌리를 공유한 남북한 문학은 해방기를 거치면서 각자의 길을 걸어왔다. 창작의 물적 기반도 다르고, 사회가 설정하는 작가들의 역할도 상이하고, 독자들이 작품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도 크게 엇갈린다. 다만 남한의 독자가 북한의 역사소설을 읽을 때, 남북의 근원이 같다는 것을 깨닫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1950~60년대까지 연결되어 있다고 믿어왔던 남북문학은 이제 별개의 미학과 가치를 지향하는 이방인의 문학이 되었다.

북한사회에서 문학은 특별한 위치에 있다. 북한 대표 문학단체인 조선작가동맹은 노동당 선전선동부의 지도와 검열을 받는 중요 기구이다. 『조선문학』 『청년문학』 『아동문학』 『문학신문』과 같은 매체가 정기적으로 간행되고 있다. 사회주의체제는 언어의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중시하고 문자언어의 공식성에 대한 믿음이 강하기에 ‘문학과 미디어’를 국가기구에서 통제한다. 북한에서 출판된 문학작품은 공식 문학, 당의 문학이다. 북한에는 작가의 자유로운 창작에 의해 발표되는 개성적인 문학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활자화되기 전까지 검토와 토의를 거친 집체적 성격을 지닌 작품이 출간된다. 견고한 검열체계가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북한에는 현역과 현직이라는 두 부류의 작가가 있는데, 현역 작가는 북한의 대표 전문창작기관인 ‘4·15문학창작단’에 소속돼 활동하며 특별대우를 받는 작가를 일컫는다. 현직 작가는 별도의 직업을 지니면서 작품을 창작하는 작가를 가리킨다. 현역 작가는 모두 조선작가동맹 소속이기 때문에 더욱 엄격한 검열을 받는다.

4·15창작단 소속 작가의 작품이나 『조선문학』 『청년문학』 『아동문학』 『문학신문』에 실리는 작품은 작가의 개성보다는 동시대 북한사회가 요구하는 문학적 지향에 부합하는 경우가 많다. 조선작가동맹중앙위원회가 부과한 과업이나 당에서 요구하는 정책에 부응하는 작품을 창작해 발표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 뛰어난 작품은 있을까? 남한의 문학적 관점을 문학의 보편성으로 간주한 상태에서 ‘문학적으로 뛰어난 북한문학 작품’을 판별한다는 것 자체가 조심스럽다. 문학적 가치평가에는 어떤 문학이 좋은 문학인가, 문학의 보편성과 특수성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는가에 답해야 하는 책임이 따른다. 접근 방법을 바꿔보면 어떨까? 북한문학계가 좋다고 평가하는 작품은 어떤 것일까? 북한문학의 공식적인 평가에 따르는 것이니 이 질문에는 조금 더 쉽게 답해볼 수 있겠다.

나는 이 글에서 김정은시대에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 어떤 것들이 있는지 소개하고, 이들을 어떻게 읽고 해석할지에 대해 논의해보려고 한다. 기본적으로 북한문학은 낯선 문학이다. 이 글은 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