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금희 金錦姬
1979년 부산 출생. 200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센티멘털도 하루 이틀』 『너무 한낮의 연애』 등이 있다. novelist79@hanmail.net
장편연재 3
경애(敬愛)의 마음
5. 없는 마음
산주가 경애를 찾아온 건 장마가 끝나가던 여름날이었다. 근처 까페에서 포인트가 적립되었다는 문자메시지가 도착했고 무심히 넘기려던 경애는 그렇게 휴대전화 번호를 눌러 적립할 사람은 산주밖에 없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산주가 결혼하고 나서 둘이서만 만난 건 거의 없는 일이었다. 대부분 사람들 속에 섞여 있었다. 그렇게 있으면 어떤 마음들은 아예 없었던 것처럼 생각되기도 했으니까, 안전했다. 산주와 경애는 그냥 함께 대학을 다닌, 이제 마흔에 가까워지고 있는, 어느 정도의 포기와 축적으로 ‘삶’이라고 할 만한 것의 얼개를 완성해가는 대학 동창일 수 있었다. 이따금 모임에서 만나 무언가를 먹고 마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문자메시지를 받은 경애는 산주에게 어디냐고, 혹시 까페 레이어에 있느냐고 물었다. 오라는 건 아니었어. 그냥 포인트를 쌓아준 거야,라는 답이 돌아왔다. 경애는 그 말을 믿지 않았지만 산주의 마음이 편했으면 하는 생각에서 그렇겠지,라고 답했다. 하지만 전화번호로 포인트를 쌓으면 경애에게 신호가 간다는 사실을 산주가 모르지는 않았을 거였다. 단지 산주에게는 변명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결혼한 자신이 경애를 만나고 싶어한다는 부담감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원래 상수와 점심시간에 새로 개업한 돈가스집에 가기로 했던 경애는 지갑을 챙겨 나가며 급한 약속이 생겼다고 양해를 구했다.
“누가 왔어요? 갑자기?”
“네, 좀 그럴 일이 있어요.”
상수는 얼마 전에 홍보 전단지에서 오려낸 반우동 무료 쿠폰을 내밀며 경애보고 쓰라고 했다. 자기는 그냥 회사 식당에서 먹으면 되니까. 경애는 상수가 지갑에 일주일 동안 보관해온 쿠폰 두장을 내려다보았다. 절취선을 따라 반듯하게 잘린 그 쿠폰은 얼마나 잘 넣어뒀는지 구겨진 데 하나 없었다. 경애는 돌려주며 괜찮다고 했다.
“박경애씨, 반우동이면 3000원입니다. 3000원.”
“괜찮아요. 팀장님 쓰세요.”
“아니, 친구랑 가면 되잖아요.”
“괜찮아요, 상관 안 해도 돼요.”
“아니 박경애씨, 이거 기한 있어요. 내일까지 써야 한다고요.”
“괜찮아요, 괜찮다고요.”
경애는 괜찮다고는 했지만 마음속으로는 자기가 여러번 하고 있는 ‘괜찮다는 말’에 대해 곱씹어보고 있었다. 자기가 지금 자신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떠나가 결혼까지 한 남자를 만나기 위해, 이렇게 다급하게 긴장하면서 나가려고 하는 건 정말 괜찮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할수록 경애는 왠지 그 쿠폰을 더더욱 받을 수 없어져서 나중에는 상수의 손을 단호히 밀어서 거부했다. 머쓱해진 상수는 싫으면 말아요, 하면서 손을 거두었다. 그렇게 까페로 가는 길은 흐리고 바람이 불었다. 경애는 그냥 차 한잔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하기 위해 애썼다. 친구들에게 이미 들은 말들, 산주 선배가 사는 데 문제가 좀 있나봐, 하는 말이나, 기획사를 아예 접었다던데, 서촌에 있던 그 공연장은 여태 운영하나, 같은 말이나, 처가 돈을 써서 사이도 좋지 않고, 하는 수군거림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산주 선배도 결혼할 때 좀 영리한 선택을 한 것이 아니겠어, 하는. 경애는 애들이 산주의 결혼을 그렇게 말하는 것에 문득 마음이 가다가도 그것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으려고 애썼다. 산주의 삶에 대한 그런 요약은 최종적으로는 경애에게도 좋을 것이 없었다. 6년간의 연애가 끝이 나야 했다면 그건 그런 세속의 셈법이 아니라 사랑 본질의 것, 슬프게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불연속의 속성이기를 원했다. 적어도 경애에게 이별을 통보할 때 산주는 경애의 선배이기도 한 그 여자를 선택하면서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어,라고 정확히 이야기했으니까. 그때 둘은 막 끓기 시작한 전골을 앞에 두고 있었는데 이윽고 경애가 왜, 왜 그런 일이 벌어졌지,라고 묻자 그렇게 되었어, 좋아하게 되었어,라고 다시 말했다. 내가 너를 우연히 좋아한 것처럼 그런 일은 그렇게 벌어졌어,라고.
경애는 여기서 연애는 끝이 나지만 산주를 잃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결별이 아니라 마음의 이동을 선택했다. 마음이 다른 마음으로 옮겨가는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어서 경애는 인턴으로 일하고 있던 무역회사를 그만두고 한 계절 동안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다. 아주 긴 여름이었다. 8평 임대아파트에 누워 있으면 매미들이 마치 파도처럼 연이어서 쌔— 하고 울다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놀이터에서 노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 겨우 고립감을 덜 수 있는. 설거지도 빨래도 요리도 하지 않는 일상에서는 오로지 오늘만 있는 것 같았다. 산주가 있었던 어제도 없고 산주가 없는 내일도 없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사이에서 되도록 현실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경애의 마음만 있었다.
그런 여름날 속에서 경애를 집 밖으로 나가게 하는 것은 맥주와 옥수수뿐이었다. 어느날 시장에 갔다가 옥수수가 나왔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경애는 이삼일에 한번씩 나가서 옥수수를 사왔다. 옥수수의 힘센 잎들, 동물의 것처럼 부드러운 수염, 그리고 아주 꽉 차오른 알갱이들을 보고 있으면 창으로 문득 들어오는 밤바람을 느끼듯 어떤 환기가 들면서 산다,라는 말이 생각나곤 했다. 경애가 이 방에서 하릴없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동안에도 여전히 저 밖에는 ‘산다’라는 것이 있어서 수많은 것들이 생장하며 싸우며 견디고 있다는 것. 다행히 그런 것들이 여전히 있어서, 사람들의 시선이 싫어서 아무도 만나지 못하는 여름의 낮을 보내다 경애가 슬리퍼를 끌고 시장으로 나가면 그 살고 있는 것들을 두 손 무겁게 사들고 어쨌든 돌아올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해서 경애도 아무튼 살고 있다는 것. 그런 마음이 들면 경애는 불현듯 약속을 잡아보다가도 낮이 되면 그래도 아직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생각하며 외출을 취소하곤 했다.
옥수수는 상온에 놔두면 쉽게 상했고 그러면 그걸 치워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경애는 뭔가가 자기 몸을 아주 무겁게 잡아당기는 듯한 무기력에 빠졌다. 연애를 상담하는 페이스북 페이지에 문득 편지를 쓰는 게 그나마 하는 일이었다. 경애는 주로 자기가 아는 산주에 대해 최대한 자세히 설명했다. 지난 6년 동안 봐온 산주에 대해 복기하면서 그렇게 적어 보내면 그 계정 속의 언니는 이런 짤막한 답장을 보내오곤 했다.
프랑켄슈타인프리징 님께, 우리는 끝장난 연애를 미화하기 위해서 기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어요. 하루에 한번은 거울을 꼭 보도록 하세요.
그런 약간은 무성의한 답변은 사실 누구에게나 들을 수 있는 정도의 것이었지만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은 여름에 그 연애상담 페이지는 경애가 소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대상이었다. 그런 답장을 받고 나서도 여전히 거울을 보기는커녕 세수도 제대로 하지 않고 하루를 보내고 있으면 다시 여름밤이 찾아왔고, 경애는 방 불도 다 꺼놓고 쇳쇳 하면서 옥수수를 찌고 있는 가스레인지의 파아란 불꽃들만 어둠 속에서 물끄러미 올려다보며 앉아 있었다. 그리고 다 익으면 여름인데도 단단히 얼어붙은 듯한 마음을 옥수수의 따끈한 온기에 녹여보면서 또다시 편지를 썼고 빠르면 새벽 무렵이 되어서 잠이나 자,라는 제목의 답신을 받기도 했다.
님은 비로소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싸움을 시작한 것인데요. 그건 님이 님 스스로를 옛사랑의 유령으로부터 구해내는 일입니다. 패트릭 스웨이지와 데미 무어가 나온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 기억하나요? 언니는 그게 최상의 로맨스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그 두 사람이 죽음을 극복하고 재회해서는 아닙니다. 언니는 거기 나오는 유령은 사실 사라진 연인이라기보다는 그냥 실연 이후의 자기 마음이라고 생각해요. 어느 밤 당한 노상강도처럼 연애는 참 황망하게 끝이 나버리고는 하잖아. 그러고 난 뒤로도 유령처럼 우리를 잡고 놓아주지 않고 그런 마음은 ‘마음’이니까 전지전능하게도 온갖 방법을 이용해서 곁을 떠돌고 늘 우리의 대기에 숨어 있지. 프랑켄슈타인프리징(그런데 대체 왜 이렇게 아이디가 긴 거야?) 님이 말한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간 옛 애인이 여전히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잖아. 그런데 봐라, 그거 그 사람 아니고 그냥 님의 마음일 뿐이야. 그런 건 사랑이 남아 있는 게 아니야. 마음만으로는 뭣도 안 돼. 영화 클라이맥스에서 패트릭 스웨이지가 우피 골드버그 몸으로 빙의될 때, 그렇게 해서 둘이 포옹할 때 우피 골드버그가 아니라 패트릭 스웨이지가 등장해서 그 장면을 연기하잖아. 그것만큼 정작 사랑에는 영혼이 전부가 아니라는 현실을 알려주는 씬이 있을까. 자기들이 내세운 영화 주제를 스스로 뒤집는 셈이지. 아무리 십분 양보해도 몸은 패트릭 스웨이지여야 한다는 거잖아. 그리고 영화에서 여자는 늘 사랑한다고 말했다가 동감,이라는 대답을 남자에게 듣고 상처받잖아? 현실에서도 여름날의 삼선쓰레빠만큼이나 흔해빠진 유형의 남자들인데, 그런 식으로 자기 아우라를 유지하려는 남자들은 다 겁쟁이야. 섹스도 키스도 애무도 다 하면서 그 말 하나를 안 하겠다는 종자들은 그냥…… 아무튼, 님 아직도 그 남자나 그 남자의 새로운 연인의 트위터나 페이스북, 아니면 미투데이를 확인하면서 그 실존을 느껴보려 할 것 아냐. 네 곁에 머무는 그 사랑의 기억, 사랑의 현존, 사랑의 공기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런데 그럴 때 너가 찾고 싶어하는 건 이미 세상에 없는 것이야. 되돌릴 수 없어. 너가 오로지 차지할 수 있는 건 그런 사랑에 참여했던 너 자신뿐이야. 생각해봐, 영화의 마지막에서 데미 무어는 패트릭 스웨이지가 막판에 뭐 선심 쓰듯 사랑한다고 말할 때 그냥 ‘동감이야’라는 말로만 대꾸해주었어. 늘 사랑한다는 대답을 기대했다가 패트릭 스웨이지가 동감이라고 말하는 것에 상처받았던 여자는 사라지고 이제 그 사랑이라는 것이 타인에게 맞부딪쳐 화답으로 돌아오리라는 것에 마음을 걸지 않고 그냥 환영처럼 보이는 사랑의 기억에만 동감이라고 하는 것이지. 그러니까 님도 이제…… 이런 길고 지루한 답장을 읽으면서 경애는 아마도 언니는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상당히 낭만적이고 어딘가 과시적인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저 묻고 답하는 과정이 좋았기 때문에 딱히 도움이 되지도 않는 연애상담 페이지를 매일 이용했다. 그 페이지의 첫 화면에는 모토라고 할 만한 사랑 시가 적혀 있어서 여기를 운영하는 언니의 어떤 교양의 정도와 문화코드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했는데, 그 시는 이런 내용이었다.
사랑은 잔혹한 마피아,
너는 결국 내게서 모든 걸
다 빼앗아가겠지.
하지만 그런 가상의 언니의 말에 맞는 부분도 있었다. 경애가 산주와 그 여자의 SNS를 그러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지켜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자의 SNS 계정에는 그가 갖고 싶어하는 모든 것들—정갈한 쿄오또의 식당들, 고양이, 사회적 공헌을 게을리하지 않는 외국계 기업들에서 생산하는 목욕용품과 화장품, 외국의 식자재들과 유기농과 요가, 유년시절을 환기하게 하는 놀이공원이나 비스킷, 인디밴드의 영상, 전공인 프랑스의 소설 같은 것들이 끊임없이 올라왔다. 그리고 그 모든 예쁘고 환한 것들 사이에는 산주의 사진이 올라오기도 하고. 언니가 말했듯이 산주라는 대상, 산주의 다정함과 산주의 체취, 산주의 감촉과 산주의 목소리, 산주라는 실감과 산주의 살아 있음은 이제 환영과 같은 자신의 기억이나 타인의 SNS에서만 느낄 수 있을 뿐이었다. 없었다, 이제 경애의 현실에서는. 죽어버린 것이었다.
경애는 산주와 그 여자의 환하고 생기에 찬 일상들을 옥수수가 시들어가는 식탁에서 지켜보았다. 그들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특별히 잘못되거나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경애라는 누군가의 불행과 둘의 사랑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였다. 그저 그 자체로 시작하는 연인의 환희를 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럴 때면 경애는 언니의 말처럼 유령 같은 무언가와 싸우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아무도 없는 휑한 부엌과 엉망인 방 안을 둘러보면 거기 어딘가에 또다른 경애가 앉아 있다가 동감,이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럴 때쯤 안산에서 경애의 엄마가 연락도 없이 올라왔다.
경애의 엄마는 들어와서 경애의 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니까 세탁기를 돌리지 않아 아무 바구니에나 수북이 담겨 있는 경애의 지난 계절의 빨래들을, 여름이 왔는데도 그렇게 방치되어 있는 점퍼와 티셔츠, 양말, 장갑, 담요와 속옷들을. 그리고 누군가가 아주 구겨버린 것처럼 방 안에 웅크리고 있는 경애를. 경애의 엄마는 세탁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오전에 시작해 저녁까지 이어진 그 빨래는 세탁기를 일곱번 돌려야 할 정도로 많았다. 하지만 경애의 엄마는 그 일을 다음으로 미루지 않고 그날 다 해냈는데, 그렇게 해야 경애가 일어설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경애는 여러번 넘어져왔다고 경애의 엄마는 생각하고 있었다. 남편이 평생을 살아갈 반려자로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한 것이 경애가 겨우 돌이 되었을 때였다. 경애의 엄마는 폭력과 폭언을 피해 이혼을 결심했고 자기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다 ‘기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런 기술마저 없었으면 경애를 그 불행에서 건져내주지 못했을 거라고, 결국 미용가위와 롯드, 고무줄과 염색약, 드라이어와 고데기, 거울과 가운 같은 것들이 어려서 미용실에 앉혀두어도 한번 울지도 않던 그 아기를 구해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믿을 건 자신의 그 두 손밖에 없었다. 가위질하고 퍼머하는 이 기술, 이 무형의 것밖에. 하지만 자기가 그 기술이라는 것에 매달려 사는 동안 경애도 사실 믿을 거라고는 엄마의 두 손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그녀는 경애가 친구들을 잃고 우울증을 겪었을 때에야 깨달았다. 자기가 믿을 게 자신의 두 손밖에 없었던 것처럼 그 아기 역시 믿을 건 엄마의 두 손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경애의 엄마는 언제나 경애가 일어서는 아이라고 믿었고 꽃처럼 예쁘게 보내야 할 경애의 시간들이 오래되어 퀴퀴한 빨래처럼 방치된 채 흐르고 있어도 슬프거나 경애에게 뭐라고 한소리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게 힘든 순간이 왔을 때 말 그대로 힘들어지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픈데 아픈 걸 모르는 것도 병이 아닌가. 그냥 자기 딸은 아플 때 아파야 하는 사람이라서 그렇겠거니 여기면 속상해하거나 마음 부대껴야 할 필요가 없었다. 경애가 그 화재사건을 겪고 경찰서에 왔다 갔다 하고 학교에서 선생들에게 한마디씩 듣고 그게 동네 장사를 했던 경애 엄마의 귀에 들려올 때도, 퍼머를 하러 왔던 아줌마들이 그러게 돈만 벌지 말고 애를 좀 살펴야지, 한다든가, 벌써부터 술집을 들락거려서 어떡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경애의 엄마는 그런 소리 하려면 다시는 머리하러 오지 말라고 가위를 탁 내려놓았다. 상대가 아무리 사과해도 다시 가위를 잡아주지 않았다. 그러면 머리를 자르다 만 동네 여자들은 그렇게 들쑥날쑥한 머리가 창피해서 내 머리 어떡하느냐며 화내고 욕하다가 나가버리곤 했는데, 그런 여자들이 얼마나 무섭고 안 좋은 소문을 내든 경애 엄마는 자기 성질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가 그걸 부끄러워하면 내 자식은 죽는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자기라도 그러지 않으면 경애는 일어설 수 있었다. 그래서 경애 엄마는 미용실 벽에다 「누가복음」의 문장을 붙여놓았다.
모든 사람이 아이를 위하여 울며 통곡하매 예수께서 이르시되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그 죽은 것을 아는 고로 비웃더라 예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불러 이르시되 아이야 일어나라 하시니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나거늘
경애 엄마가 집을 치우는 동안 경애는 그냥 침대에 누워서 엄마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경애 엄마는 깨끗한 수건 한장 없는 서랍장을 뒤져보다가 밖으로 나가서 수건과 속옷을 사왔고 경애를 일으켜 세워 욕실로 보냈다. 그리고 콩나물국을 끓였는데, 경애가 언제나 좋아하는 건 맑게 끓여서 식힌 콩나물국이었다. 그러려면 멸치국물을 내야 했다. 그 비릿하고 짠내가 나는 것이 끓으면 이상하게도 바다 생각이 나고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경애는 말했다. 씽크대 앞에 서서 경애의 엄마는 그들이 함께했던 저녁들을 떠올렸다. 미용실 곁방에서 늘 조용히 엄마가 일을 끝내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일곱시가 되면 문을 열고 가게를 살피던 아이. 경애가 엄마, 언제 밥 먹어? 하고 물으면 비로소 쉴 수 있는 시간의 시작이었다.
경애가 들어간 욕실에서는 물줄기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우는 소리가 들렸다. 경애가 남자친구와 헤어졌다는 건 경애 엄마도 알고 있었다. 엄마 나 회사 그만뒀어,라고 전화했을 때 이미 경애에게 또 넘어질 만한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신기하게도 그런 것들은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엄마.”
경애가 욕실에서 불렀다. 경애 엄마는 욕실 문 앞에 앉아서 왜, 하고 물었다.
“아무것도 하지 마. 그냥 앉아 있다 가. 엄마 힘든데 아무것도 하지 마.”
“집을 이 꼴로 해놓고 그런 말이 나오니.”
경애 엄마는 뭔가 마음이 무너지는 기분을 이기기 위해 일부러 핀잔을 주며 말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 우리 아무것도 하지 말자.”
경애 엄마는 경애가 씻는 것, 머리를 감고 이를 닦고 세수를 하는, 누구나 하루에 한번쯤은 귀찮아도 후다닥 해내는 그런 일마저도 너무 무거운,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남들에게는 자신을 방치하는 것이고 자신에게는 최선인 그런.
“그래, 아무것도 하지 말자. 엄마도 안 할게. 엄마도 그냥 누워 있을란다.”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올려놓았던 냄비의 불을 끄자 좁은 집은 조용해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머리까지 다 감아서 말개진 얼굴의 경애가 이윽고 욕실에서 나왔다.
까페에 나가보니 산주는 여름 날씨에는 어울리지 않는 꽤 두께감 있는 점퍼를 입은 채 까페에 앉아 있었다. 둘은 마주 앉아서 커피맛이 좀 어때, 빵을 더 시킬까, 하고 대화를 이어갔는데, 그 사이사이의 침묵을 빗소리가 간신히 메워주었다.
“요즘은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르겠어. 마치 우주를 유영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어떤 알 수 없는 중력이 있어서 다리가 둥둥 떠다니는, 현실감 없는 느낌.”
한참 앉아 있던 산주가 마침내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왜 그런 점퍼를 입었어? 그런 날씨는 아니잖아. 덥지 않아?”
“왜냐고?”
산주는 자기를 한번 내려다보더니 매장을 한번 둘러보았다.
“이상하게 요즘은 정신이 좀 없어서, 그런데 덥지 않고 서늘한데? 너는 춥지 않아?”
경애는 가만히 산주를 지켜보았다. 산주가 마치 잠에서 깬 사람처럼 좀 어리둥절하고 뭔가를 간신히 생각하는 듯한 얼굴로 다른 테이블의 사람들을 쳐다보는 것을. 그렇게 남들을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자기가 얼마나 필요 이상으로 두터운 점퍼를 입고 있는지, 마치 무언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처럼 지나치게 웅크리고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산주는 자기가 왜 매장을 그렇게 둘러보았는지마저 모르는 사람처럼 별말 없이 테이블 위로 시선을 내렸다.
경애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로 가서 베이글을 주문했다. 최대한 오래 시간을 끌면서 크림치즈의 종류를 골랐다. 울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우는 자신은 상관없지만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산주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곱씹을 것이 두려웠다. 왜 산주가 힘들 때 나를 찾아와서 그 얘기를 하고 싶어할까,라고도 생각했다. 기쁜가, 득의만만한가,라고도 날카롭게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맹세코 그렇지 않았다.
경애는 여태껏 산주의 그렇듯 무기력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그건 무언가가 산주를 아주 깊숙이 찌르고 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산주는 언제나, 가장 가난할 때조차 당당했던 사람이었다.
경애가 처음 산주를 만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