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김도언 金度言

1972년 충남 금산 출생. 1998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소설집 『철제계단이 있는 천변 풍경』이 있음. drybook@hanmail.net

 

 

 

고통의 관리

악취미들8

 

 

다음은 14년 전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네 권의 소설집과 다섯 권의 장편소설을 펴낸 올해 39세의 중견소설가 박성호가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술을 마시고 집에 돌아온 직후 주변 지인들과 가진 전화통화의 내역이다. 그는 서울 신촌 연대 앞의 돼지껍데기집에서 저녁 일곱시쯤 근 20년 만에 연락이 닿은 고등학교 동창을 만나, 함께 삼겹살 3인분을 시켜 소주 세 병과 맥주 세 병을 나눠 마시고는 열시 반쯤 헤어져 집에 들어왔다. 그는 집에 들어오는 길에 동네 편의점 미니스탑에 들러 참이슬 소주 두 병과 레종 담배 한 갑을 샀다―작가 주.

 

첫번째 전화, 발신 23:06

아, 저 성호예요. 네, 잘 지내시죠? 네네, 선배, 술 한잔 먹었어요. 많이는 안 마시고 정말 딱 한잔 마셨어요. 아유, 왜긴요, 선배 목소리 듣고 싶어 전화한 거죠. 선배 본 지도 꽤 됐고요. 그래 선배 어떻게 지내세요? 네, 다행이다. 그래도 다들 안녕하다니까. 선배 하는 일도 잘된다니까 참 기쁘네요. 요즘처럼 어려울 때는 뭐, 안정적인 직장, 안정적인 수입이 최고인 것 같아요. 별일은 없죠? 아, 그런데 난 선배 생각만 하면 너무 속이 상해요. 선배가 시를 놓지 않고 계속 썼으면 좋은 시인이 됐을 텐데…… (소주 한잔을 비운다.) 아휴,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에요. 저는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제가 요즘 시인들 시를 가끔 보지만 그게 어디 시예요? 선배가 예전에 시를 쓰던 때에 비하면 요즘 애들은 진정성도 없고…… 지금 술 마시고 있냐구요? 네, 그냥 밖에서 마시다가 집에 와서 가볍게 한잔 더 하고 있어요. 걱정 마세요. 취하도록 마시지는 않을게요. 네? 네, 누구요? 휘연 어미요? 아유 그 사람 얘긴 하지 말아요. 이미 깨끗이 정리가 됐어요. 정말 그렇다니까요. 전화 같은 것도 안해요. 아까 하던 얘길 하자면…… 저 말이에요, 선배 시 참 좋아했어요. 하하, 그럼요. 지금도 외울 수 있는 시도 있어요. 그거 있잖아요. 침묵을 인양하는 어둠의 영혼아, 어쩌고 하는 시. 그 시 제목이 ‘옐로 써브머린 까페’던가. 아, 아니구나. 아아, 맞어 맞어.‘고통의 관리’였어. 햐, 고통의 관리라는 말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근사해요. 정말 내가 지금 고통의 관리가 필요한데. 크큭 아무튼, 네네, 아무튼 저 선배 시 참 좋아했어요. 네네, 네 아 그래요, 다른 전화 왔으면 그것부터 받으세요. 네네, 전화 받으세요. 통화 끝나면 전화 좀 주세요.(소주 한잔을 비운다.)

 

두번째 전화, 발신 23:15

성규야, 형이다. 그래, 그동안 잘 지냈니? 응 그래, 술 한잔 먹었다. 응 날씨 엄청 더워졌지? 휴, 오늘도 너무 더워서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흐르더라. 네 얼굴 본 지도 꽤 됐네. 같은 서울 하늘 아래 살면서 정말 얼굴 보기 힘드네. 어머니한테는 전화 자주 드리니? 양평동 누나한테도? 응? 그래 전화 자주 드려. 형은 그렇게 못하지만 너라도 자주 드리라고, 알겠지? (소주 한잔을 비운다.) 응? 응 글 계속 쓰고 있어. 형이 하는 일이 글쓰는 일인데 그럼…… 응? 술? 그래 술 줄여야지. 응 술 줄여야 해. 그래 줄여야지. 그런 건 걱정하지 마. 난 아버지처럼 되지는 않을 거야. 자식, 그래 그래, 네가 내 걱정 해주는 건 고맙지. 응, 그래 네가 내 걱정을 다 하고. 흐흐. 이렇게 늦은 시간에…… 음 벌써 열한시가 넘었네. 아무튼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정말 미안해. 너 내일 출근해야 할 텐데. 그래도 니 목소리 한번 듣고 싶어서 전화한 거야. 그래 잘 지내고 응 또 연락하마, 참참, 성규야…… 아직 끊지 마. 응응. 성규야, 내가 이런 얘기 하는 게 좀 뜬금없겠지만…… 나 말야,(소주 한잔을 비운다.) 널 정말로 좋아해. 내 동생 성규를 말이야. 너도 내 마음 알지? 널 참 좋아해. 성규야, 제수씨한테도 안부 꼭 전하고. 무엇보다 제수씨한테 잘해야 돼 인마. 알았지? 그리고 어려운 일 있으면 형한테 전화해서 알리고 말야. 그래, 잘 지내. 이만 끊자. 그래그래, 술은 더 안 마실게.

 

세번째 전화, 발신 23:20

어머니, 네 성호예요. 네 잘 지내시죠? 주무셨어요? 어디 편찮으신 데는 없고요? 교회는 잘 다니시죠? 아, 저도 잘 나가요. 일요일 아니 주일마다 꼭 가요. 목사님한테도 종종 인사하고요. 걱정 마세요. 네네, 어머니 죄송해요. 제가 전화도 자주 못 드리고. 네 술도 줄여야죠. 성규도 그 말을 하던데, 하하, 어머니도 내 걱정을 하고 성규도 내 걱정을 하고, 이제 제 나이도 서른하고도 아홉인데, 하하 저는 계속 걱정만 끼쳐드리네요. 네 어머니,네네, 주무셔야죠. 네, 참 어머니, 제가 매달 50만원씩 용돈 부쳐드리고 있잖아요. 그거 통장으로 잘 들어가고 있죠? 네, 그거요. 어머니께 용돈 드리는 거요. 나 정말 생색내고 싶지 않은데, 그거 결코 쉬운 일 아니에요. 어머니도 아시죠? 네, 저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거라고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 적적하신데…… 아무튼 제가 정말 죄송해요. 네, 성미누나도 성규도 다 잘 있어요. 제가 한번 다 데리고 뵈러 갈게요. 네네, 이번 주말에라도 한번 내려갈까요? 난 내려갈 수 있는데, 성규랑 성미누나가 워낙 바쁘니 네네, 술 많이 안 마실 거라니까요. 네 어머니 죄송해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모든 게 다 잘될 거예요. 성미누나도 괜찮아질 거예요. 그래요,어머니, 얼른 주무세요. 네? 알았어요. 저도 지금 잘게요. 아휴, 걱정 마세요.

 

네번째 전화, 발신 23:25

선배, 네, 저 또 성호예요. 아 전화통화 끝나셨나보구나. 에이 그럼 전활 좀 해주시지. 네, 선배 전화 기다리다 못해 제가 한 거예요. 아까 무슨 말 하다 끊어졌죠? 네네, 아, 선배 시 얘기했었구나. 고통의 관리,하하, 난 정말 고통의 관리라는 말이 너무 마음에 들어요. 네네, 아 정말 선배 시는 대단했어요. 술요. 지금도 마시고 있죠.(소주 한잔을 마신다.) 네? 에이 선배 걱정 말아요. 아유 안 죽어요. 안 죽어. 선배도 나이 들었구나. 우리 예전에 어땠어요. 선배도 잘 알잖아요. 내가 누구예요. 박성호 아니에요, 박성호. 아 아, 선배 생각나죠? 우리 왜 거기 후문 쪽 야산에서 막걸리를 밤새 마시고 그대로 잠들었다가 다음날 깼을 때 벚꽃이 서럽도록 환하게 피어 있었잖아, 눈앞에. 그때 기억 안 나요? 하하, 선배 그때도 벚꽃잎에 취해서 무언가를 노트에 썼던 것 같은데, 그런데 그런 선배가 지금, 구청 과장님이라니. 하하, 선배 그때가 참 좋았죠? 그죠? 아, 씨팔 그런데 어느새 이렇게 나이를 먹다니. 정말, 정말 믿기지가 않아. 아 씨팔. 그땐 나 정말 순수했는데 말이에요. 나 말이에요. 참 순수했어요. 그죠? 참, 선배 내 동기 정태 알죠? 걔가 이번에 ○○대학 전임 된 거 아시죠? 아 선배도 아시는구나. 그래 그 소식을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 네네, 뭐, 축하할 일이죠. 정태 착실한 친구니까요. 하지만 선배 그 새끼가, 교수된 그 새끼가 행복할까요? 선배 그렇게 사는 게 행복한 일이에요? 씨발, 네네, 그래요. 축하할 일이긴 하죠. 그래요 정태도 고생했겠죠. 네네 교수들 밑구멍 빨아대느라 열라 고생했겠죠. 네네, 미안해요. 하지만 사실이 그렇잖아요. 어떻게 그런 이기적이고 약삭빠른 새끼들이 그렇게 출세를 하느냐구요. 네? 네네 그래요. 술 그만 마시고 잘게요. 그래요 선배도 주무세요. 그래요, 내일 출근하셔야 하는데 제가 공연히. 선배 그거 알죠? 제가 선배 정말로 좋아하고 있다는 거, 정말 좋아한다는 거…… 아시죠? 선배가 그거 모르면 정말 섭섭해요. 선배 그래요, 자요. 고마워요. 아 정태 그 새끼 씨발……

 

다섯번째 전화, 발신 23:42

여보세요. 희수씨? 응, 나 누군지 알겠어? 나 박성호야. 그래 박성호. 좀 놀랐지? 전화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인가. 응응 그래. 아, 무슨 일이냐고? 다른 게 아니고, 희수씨가 이번에 『○○문학』에 발표한 소설 봤어. 응 참 좋더라. 등단하고 2년밖에 안된 신인작가가 어떻게 그렇게 명민한 소설, 완성도 높은 소설을 쓸 수 있지? 응응, 그래 그 말 해주려고 전화한 거야. 흐흐 언제지, ○○출판사 망년회에서 만났을 때였나? 그래 맞지? 그래 내가 기억력은 괜찮은 편이야. 내가 그날 희수씨한테 말했지? 신인은 모든 걸 다 갈아엎겠다는 패기만 있으면 된다고. 그런데 이번 소설에서는 그런 패기가 느껴지더라고. 고맙긴 뭘. 별소릴 다 하네. 그런데, 말야. 희수씨는 생긴 거는 참 고운데 어디서 그런 강렬한 이미지들이 나올까. 정말 신기해. 난 그날 희수씨를 처음 보던 날 사실, 음, 처음 하는 얘긴데, 정갈한 매화나무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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