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권헌익 『전쟁과 가족』, 창비 2020

‘소리 없는 혁명’에서 빼앗겨버린 소리

 

 

고성만 高誠晩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 wikigarden@jeju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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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식민 냉전기의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은 근대 국민국가 건설을 둘러싼 두 정치세력 간의 각축이자 전지구적 내전의 성격을 띤 국제전이었다. 대치 전선은 한반도를 벗어나지 않았고 피난 행렬도 “남으로 혹은 북으로 떠나는 대이동”(19면)이었다는 점에서 내전으로 볼 수 있지만, 그 여파는 “초국적 가족”(116면)의 삶까지 바꾸어놓았다. 저자는 전작 『학살, 그 이후: 1968년 베트남전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의 인류학』(유강은 옮김, 아카이브 2012)에서 전투원의 죽음은 민간인과 달리 부당하거나(unjust) 비통하지(grievous) 않을 수 있다고 지적하지만, 폭력의 유산은 각국 병사들이 떠나온 그들의 고향마을과 가족/친족의 “친밀한 관계망”(18면)까지 위협하는 파괴력을 지닌 것이었다.

『전쟁과 가족: 가족의 눈으로 본 한국전쟁』(정소영 옮김)은 한국의 전후문학에서 재현되어온 다양한 인간군상의 기구한 전쟁체험을 가족의 눈으로 재해석하고, 안동과 제주를 비롯하여 한반도 각지에서 발휘됐던 ‘친족의 정치’를 섬세하고 풍부한 실증연구를 통해 고찰한다. 친족은 전쟁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인해 존재적·도덕적 위기를 경험하지만, 저자는 그들의 “관계의 세계”(6면)를 사적 영역에 가두어놓기를 거부한다. 폭력경험의 잔혹성, 경험 이후의 취약성(vulnerability)만을 부각해 역사적 행위자들을 나약한 존재로 의미부여하지도 않는다.

저자는 정치적 연대와 사회변혁을 요구하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공동체 안팎의 민주화와 사회적 각성을 촉구하는 실천적 행위를 주의 깊게 관찰한다. 친족을 정치적이고 공적인 개념으로 인식함으로써(26면), ‘관계’로 맺어진 그들의 입체적인 세계를 역동적으로 그려낸다. 그 때문에 이 책의 결론부에서 제시되는 “친족의 평화는 평화로운 사회의 이상과 동일하다”(265면)라는 경구는, ‘코리아’를 넘어, 파괴된 공동체의 도덕성과 인간정신을 회복하고 70년간 이어져온 전쟁의 유산과 전후의 지형을 재인식하는 후속 연구에도 시사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6장 ‘소리 없는 혁명’에는 1990년대 접어들면서 국가폭력의 역사가 공적 논쟁의 장에서 쟁점화되고 생존자 집단이 회복과 치유를 시도해가는 고군분투의 드라마가 리얼하게 그려진다. 저자는 민주화 이후 분출한 제주 4·3 희생자 유족들의 연대와 그 성과를 그들의 입을 빌려 ‘소리 없는 혁명’으로 표현한다. 갈등과 역경이 따랐지만, 지역과 국가, 나아가 “탈냉전의 세계에 대한 특히 아시아 차원에서 의미 있는 개입”(215면)으로 분석한다.

그럼에도 탈냉전/신냉전의 국제정치 문법이 ‘냉전의 섬’으로 남아 있는 한반도의 분단 상황에 그대로 적용되지 않듯, ‘소리 없는 혁명’에서 이탈되어버린 존재들이 이 책의 주요 논점 속에 등장하지 못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애도와 기억 행위에 대한 분석이 페이지의 마지막을 향해 갈수록 ‘소리 없는 혁명’에서 빼앗겨버린 소리들이 점점 더 상기되는(remembering) 것은 그 때문이다.

4·3봉기를 주도했던 세력들은 이 ‘혁명’ 과정에서 가장 큰 논란거리로, 그들의 불온성은 ‘혁명’ 자체를 좌초시킬 수 있을 만큼 위협적인 것이었다. 봉기 주도자들의 이력이 ‘혁명’의 공적 이해(헌법재판소와 정부위원회의 용어로는 자유민주주의적 기본질서와 대한민국의 정체성)와 충돌한다는 것을 이유로 그들이 공식 희생자로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완전한 해결’ ‘화해와 상생’ 같은 ‘혁명’의 대의명분은 그렇게 4·3 이후 수십년 만에 조심스레 삐져나온 소리들을 ‘소리 없이’ 봉쇄해버렸고, 빨갱이/폭도 낙인에 익숙한 그들의 가족 역시 ‘화해와 상생’을 모색하는 자리에 초대받지 못했다. ‘불온한 공동체’로서의 그들의 삶은 더 위태롭게 됐다. 공적 영역에서 애도의 권리가 박탈되어버린 그들의 가족에게 “집이나 마을에서 하는 실천을 공공의 세계에서 공개적으로 수행할 자유”(250면)는 주어지지 못하고, 그래서 집과 마을과 공적인 추모 공간은 별개의 것으로 인식된다.

이 때문에 “유족회가 모든 차원에서 벌어진 잔학행위의 모든 피해자를 대변한다는 단호한 입장을 견지”(229면)했다는 저자의 분석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유족회를 비롯한 이른바 4·3단체들이 ‘혁명’의 성공적 수행을 견인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의 성공(?)은 모든 피해자를 대변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측면이 있다. “제주도민 모두에게 삼춘”(252면)이라는, 친밀하지만 그래서 더 애매한 관계성이 여러 층위에서 복합적으로 구성되는 기억투쟁의 지형을 직시해야 할 우리의 눈을 가려버리는 것은 아닐까.

‘소리 없는 혁명’에서 여성들의 다양한 목소리도 소거되어버렸다. 가령 홀로 살아남은 딸이나 누이는 행방불명된 가족들의 사연을 증언하거나 유해의 신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혈액 DNA를 제공할 수 있지만, 돌연 입양되어온 양자의 존재로 인해 유족으로서의 법적/계보적 권리를 주장하는 상황에서 후순위로 밀려나야 하는 불안한 위치에 놓이게 됐다. 부계질서에 입각한 인위적인 가족의 재편이 초래하는 여성의 불안전한 위치는 냉전 폭력의 직접적인 유산이라기보다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에서 가족/친족의 도덕성을 최우선적으로 고려한 ‘관계’가 설정한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의 탓이 크다. ‘혁명’ 이후의 국가배상 프로그램이 구체적으로 진전되면 “여러 다른 형식의 가족갈등”(181면)이 터져나올 가능성은 더 커지게 됐다.

‘혁명’의 토대는 생존자들의 혈연적 유대로 얽혀 있다. 희생자를 공식화하는 법적/제도적 절차는 신청주의 방식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살아남은 가족이 없어 ‘관계’를 증명할 수 없게 된 이들의 부당한 죽음의 연원을 추적하는 문제는 ‘혁명’의 부차적 과제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군에 자원하여 육지에 나가 싸”움(202면)으로써 “불온한 인물로 취급되었던 조상의 지위를 회복하려는 노력”(236면)이나 사후의 혼례, 입양, 허묘와 같이 “위기에 대처하는 가족문화의 의미 있는 수단”(223면) 역시 “자식이든 손자든 한명”(126면)조차 없는 소위 일가전멸(一家全滅)의 경우에는 시도조차 불가능한 선택지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혁명’의 문법만으로 다종다양한 주체들의 각기 다른 사회적 처지와 다층적 기억에 접근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혁명’ 이후의 제주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고 있다. 『순이삼촌』(현기영 지음, 창작과비평사 1978)의 배경인 북촌리에서 동네잔치처럼 펼쳐지던 한밤중의 제사 풍경도 세대와 의식이 바뀌면서 조상신이 마을과 떨어진 도회지나 해외로 강신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제례 공동체의 민족별·국적별 분포 역시 다양해졌다. 하귀마을의 영모원은 올해부터 한국사 교과서에 소개되고 대통령도 다녀가면서 ‘화해와 상생’의 성지로 의미화하려는 욕망에 더욱 노출되었다. ‘초국적 가족’의 삶도 한층 다양해져서 성원들의 서로 다른 국적으로 인해 국가배상청구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예견된다. 일국적이고 피상적인 시대규정의 한계를 넘어 ‘혁명’의 성과가 장기적이고 글로벌한 차원의 논의로 확장되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탈식민 냉전기에 벌어졌던 비극적 폭력 이후 두 세대가 바뀌고 정상과 비정상 구분만으로는 수렴되기 어려운 다양한 가족 형태가 출현하면서 ‘가족의 눈으로 본 한국전쟁’은 어떻게 새로운 시각을 모색해야 할까. 이는 저자의 사상적 고뇌가 촉발시킨 문제의식으로, 동료·후학들이 외면해서는 안 될 고민이 되었다. 책을 덮고 나니 마음이 더 조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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