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정치와 시대와 삶과 닿아 있는 시를 기대하며

▶ 2000년대 들어서면서 문학장에서 시민적 주체성과 시인의 주체성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감에 대해 논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소설은 꽤 오래전부터 시대성을 공유하는 경향을 보인 반면 시는 특별히 공통된 주제를 공유하거나 시만의 키워드를 찾은 것 같지는 않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 지점에 대한 고민일지, 겨울호 특집 ‘시, 새로운 공동체를 향하여’에 실린 세편의 글은 시와 정치에 대한 사유를 다시 촉발한다. 먼저 송종원의 「시인과 시민, 어떻게 만날 것인가」는 그 답을 백낙청의 과거 ‘시민문학론’ 논의를 토대로 시인과 시민 사이의 상호주체적 관계에서 찾는다.

양경언의 「우리, 살아 있는 언니들의 시」에서 그 답으로 찾는 ‘언니’는 좀더 정치적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판을 다시 짜기 시작한 사람들, 폭력과 차별을 양산하는 구조에 질문을 던지면서 권력의 작동 방식을 건드리는 ‘언니’가 최근 시들에서 어떤 식으로 나타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거론된 시 중에서 특히 주민현의 「광장과 생각」이 좋았다.

“우리는 잠깐 수많은 인파 속에서/윙크하며 지나가는 신을 본 것 같아,”(「광장과 생각」 부분) 우리는 매일 혼돈으로 가득 찬 세상에 대체로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니까 몸을 내맡긴다.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고 싶지만 쉽지 않다. 이러한 혼돈 속에 양경언은 “그 긴장 속에서 무엇이 좋은 것인지를 계속해서 ‘생각’하는 과정”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그가 읽어주는 시를 따라가면, 시인들이 현실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시는 현실에 두발 딛고 사는 우리와 결코 괴리되지 않는다.

정우영의 「생활의 발견: 지금 여기의 리얼리즘 시인들」은 삶의 시를 펼쳐가는 시인들을 소개한다. 하지만 필자도 밝히듯, “내가 실감하는 시들이 더이상 시의 대세가 아님을” 삼십대 후반의 나도 느끼게 된다. 리얼리즘은 시가 우리의 ‘삶’과 맞닿아 있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방식일 터, 앞으로 정치와 시대와 삶과 닿아 있는 시들을 포함해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시들이 많아지기를 바란다.

백명숙 chianti0@naver.com

 

시인을 발견하고 기억하게 되는 계기

▶ 겨울호의 시들은 대체로 독특했고 한편으론 난해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서정시의 절절함이라든지 아련함이 묻어나는 시보다 독특한 형식과 소재로 쓰인, 실험적인 시가 많았다. 자주 접하지 않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읽으며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직설적인 시도 꽤 많았다. 날것의 시라고 해야 할까. 모험하는 것 같아 즐거웠다. 어지러운 비행이었다고 기억한다.

문보영의 시를 읽어보고 싶던 차에 『창작과비평』에서 처음 만나게 되었다. ‘독특하고 독창적인 시인만의 세계 구축과 언어’가 요즘 젊은 시인들의 특징이라 생각하는데 문보영도 이에 적합하다. 고차원의 상상력을 발휘해 그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모르는 게 있을 땐 공항에 가라」는 전형적인 시의 간결함에서 벗어나 있다. 우선 길게 이어진 문장부터 흥미로웠다. 그리고 몇번 읽다보면 치밀한 세계 구성에 놀라게 된다. 치열한 시적 고투가 느껴져서 왠지 자세를 고쳐 앉게 되었다.

박형준의 「철새 같은 이름으로 지나가는 가을」은 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구절과 제목이 거의 같다. 여운이 옅어지는 듯해 조금 아쉬웠다. 그만큼 마음에 든 구절이었나보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오는 목소리 같은, 노래 같은 시다. 박형준은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시인이다. 서정시는 진부하다고 여겨질 수도 있지만, 인간의 기본적인 감정에 충실한 시인 만큼 늘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정우신의 「일용직 토끼」는 문체부터 소재까지 다 마음에 들었다. 비관적인가 싶다가도 열정이 보이고, 그런 모순이 엉뚱하게 느껴지면서도 공감이 되어 빠져 읽었다. 시인의 이름을 기억해야겠다.

구민지 cuttymj0929@naver.com

 

이제 희망을 찾아가야 할 때

▶ 백지연 평론 「생명, 노동, 돌봄의 문학」 중 권여선의 소설 「손톱」에 대한 부분이 인상 깊었다. 소설을 읽었을 때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평론가의 시선에서 다시 읽는 경험이었다. 어느 세대나 그 나름의 그늘이 있다고 생각한다. 윗세대의 역사적 아픔을 보는 것도 힘겹고, 내 세대의 짐을 짊어져야 하는 것도 버겁다. 다음 세대의 허우적거림을 보고 있자면 숨 막히는 죄책감이 밀려온다. 「손톱」의 소희는 내 다음 세대라고 여겨진다. 그들의 절망이 결국 나와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 나는 소설에서 절망만을 읽어냈다고 기억하는데 평론에서는 “이렇듯 소설이 비관 속에서도 놓치지 않는 강렬한 생존의 감각은 어둠 속에 가라앉은 노동의 시간을 전환하는 희미한 틈새가 되어주는 듯하다”라며 희망을 이야기한다.

소설란에 실린 김세희의 「프리랜서의 자부심」에서 주인공은 결혼 과정 중에 뜻밖에 엄마의 마음속 원망과 걱정을 읽게 된다. 세월이 빠르게 변한다고들 한다. 요즘 나는 내 기준으로 위아래로 오륙년만 차이가 나도 전혀 다른 세대처럼 느껴진다. 하물며 엄마 세대와 딸 세대는 말할 것도 없다. 소설 속 엄마는 자신의 삶에 비추어 딸을 재단하면서도 딸은 더 멀리, 자유롭게 나아가길, 그러면서 자신도 딸의 인생을 보며 좀더 자유로워지길 기대하는 것 같다. 다행히도 주인공은 자신의 삶을 부정하지 않는다. 프리랜서로서의 삶, 불안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고 또 잘 해나갈 수 있다는 믿음. 그 믿음을 깨닫게 된 작업을 마치고 당당하게 가정을 꾸리는 주인공을 응원하게 된다.

어쩌면 소설은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벼랑 끝에 선 이들을 떠미는 것이 아니라 뒤돌아서 더 넓은 곳으로 한걸음 다가오라고 손짓하는 일. 그들을 붙잡아 올 수는 없지만 진흙투성이인 들판이라도 함께 나아가보자고 손을 내미는 일.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묻던 때가 있었다. 이제 그 답을 찾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심진경 purity2005@hanmail.net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일지라도

▶ ‘논단’에 실린 세편 글과 ‘대화’를 읽으며 ‘5년’이란 시간을 되짚어보게 되었다. 5년, 대한민국 대통령의 임기다. 이 시간의 길고 짧음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겨울호에서 다룬 기후위기 극복과 체제전환, 민주주의의 발전, 지방소멸 문제 대응 등의 의제를 5년 안에 완전하게 해결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아무리 천재적인 인물이 나타나더라도 5년은커녕 15년, 25년이 지나서도 해결이 안 될지 모른다. 기후위기라는 게 과연 인간이 이제 와 돌이킬 수 있는 문제인지, 가짜뉴스와 맹목이 앞서는 곳에서 정말로 이상적인 민주주의가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수도권과 지방이 고루 발전하여 지역 간에 차별과 혐오가 사라지는 날이 올 수 있을지 상상조차 까마득하다. 하지만 어렵다고 해서, 불가능해 보인다고 해서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여겨지는 현실이지만 그걸 깨부수면 답은 저절로 나오게 돼 있다.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 좀 많은가”라는 강준만의 문장은 다소 무책임한 낙관처럼 보이기도 하다. 하지만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해답의 실마리가 될 것이며, 그만큼 단호한 해법을 시도하지 않고서는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없을 것이란 간절함이 담긴 말이 아닐까?

당면한 문제에 막막해질 때, 특집에 실린 양경언의 문장을 떠올린다. “지금 당장 이룩하고 싶은 미래의 형태를 통해, 지금 품고 있는 좋은 삶에 대한 바람을 통해 ‘우리’의 ‘현재’가 계속된다고.” 무엇이 옳은 일인지, 어느 쪽이 바른 방향인지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만드는 일이 되어주지 않을까. 어쩌면 책을 읽는 것 또한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일인지도 모른다.

소현지 letbebygone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