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모더니즘에 대한 오해에 맞서서

 

 

황종연­ 黃鍾淵

문학평론가. 동국대 국문과 교수. 평론집 『비루한 것의 카니발』이 있음.

 

 

1. 루카치의 판례를 좇는 리얼리즘론의 법정

 

문학에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은, 인간 문화를 지배하는 이분법적 대립이 일반적으로 그렇듯이, 차이의 통제에 의존하는 동일성 구축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리얼리즘론은 리얼리즘에서 모더니즘을 배제함으로써 리얼리즘을 정의하며, 모더니즘론 역시 모더니즘에서 리얼리즘을 배제함으로써 모더니즘을 정의한다. 전체성을 향한 지향을 강조하는 리얼리즘론은 그러한 지향에 역행하는 경향, 예컨대 경험의 단편에 몰입하는 경향을 모더니즘에 귀속시킴으로써 리얼리즘의 동일성을 정립하는 반면, 현실의 지각과 인식에 있어 주체의 계기를 중시하는 모더니즘론은 그러한 취지에 반대되는 통념, 예컨대 현실은 자명하게 주어진 객체라는 순진한 믿음을 리얼리즘에 전가함으로써 모더니즘의 동일성을 확보한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이분법적 대립에서 그 각각은 상대에 대하여 타자, 즉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려면 부단히 배제해야 하는, 그러나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또한 언제나 의존할 필요가 있는 타자이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은 서로 차별하고 종속시키는 관계에 있는 만큼이나 더불어 생존하는 관계에 있다. 따라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은 현대문학에 존재하는 상반되는 충동–––예를 들어 독일 표현주의 논쟁에서 ‘객관적 현실’에 대한 루카치(G. Lukács)의 요구와 ‘체험된 현실’에 대한 블로흐(E. Bloch)의 옹호로 표출된 충동—의 발현이라고 간단히 보아 넘기기 어렵다. 그것은 오히려 현대문학의 상반되고 모순되는 충동을 다만 끊임없이 상연하는, 결과적으로는 근대문학이 생성시킨 자기부정 또는 자기갱신의 다양한 움직임을 인식하지 못하도록 봉쇄한다는 혐의가 있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으로 현대문학을 범주화한다면 19세기 프랑스 리얼리즘 소설에서 20세기 미국의 생태문학에 이르기까지 문학의식의 저류를 이룬 낭만주의는 어떻게 되는가. 그 나름의 역사와 장르를 축적한 대중문학은 어떻게 되는가. 오랜 망각으로부터 되살아난 여성문학의 풍부한 유산은 어떻게 되는가. 인간문화의 모든 이분법적 대립과 마찬가지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은 상당히 수상쩍은 이데올로기적 구조이다.

사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현대문학을 양분하는 강력한 범주 구실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에 따라 문학작품을 분류하기는 그렇게 용이하지 않다. 예를 들어 플로베르(G. Flaubert)의 『마담 보바리』(Madame Bovary, 1857)는 ‘두 편의 『마담 보바리』’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리얼리즘 작품으로서의 성질과 모더니즘 작품으로서의 성질을 모두 가지고 있다. 또한 토마스 만(Thomas Mann)의 『마의 산』(Der Zauberberg, 1924)은 루카치에게는 비판적 리얼리즘의 전범이지만, 어빙 하우(Irving Howe)에게는 강력한 모더니즘 정신의 표현이다. 한국소설에서도 그와 유사한 예는 적지 않다. 조세희(趙世熙)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78)은 70년대 한국 산업사회의 모순을 파헤친 리얼리즘 소설로 읽으려는 사람과 낯설게 하기의 장치를 구비한 모더니즘 소설로 읽으려는 사람 양쪽 모두의 기대에 부응한다. 신경숙(申京淑)의 『외딴 방』(문학동네 1995) 역시 한 젊은 여성의 계급과 세대 공통의 집단적 경험의 증언이라는 점에서는 리얼리즘적이지만 진정성의 도덕적 이상에 붙들린, 그리고 그것에 적합한 언어를 찾아 고심하는 작가의 떠다니는 자기의식의 기록이라는 점에서는 모더니즘적이다. 이처럼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문학작품 분류범주로서 때때로 쓸모가 없다는 것을 감안하면 모더니즘의 출현을 리얼리즘의 연속으로 이해한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의 역사적 관점에 동의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 세속적 휴머니즘 문화의 발전과 연관하여 유럽 리얼리즘 문학의 역사를 정리한 명작 『미메씨스』(Mimesis: Dargestellte Wirklichkeit in der abendländischen Literatur, 1946)의 마지막 장에서 아우어바흐는 버지니어 울프(Virginia Woolf)의 『등대로』(To the Lighthouse, 1927)를 비롯한 모더니즘 소설에서 현실을 다양한 의식들의 반영으로 분해하는 기법과 같은 몇몇 문체적 특징을 찾아낸 다음, 놀라움과 두려움이 뒤섞인 착잡한 심정으로 그것이 유럽 휴머니즘 문화의 붕괴에 조응되는 새로운 형태의 리얼리즘임을 인정했다.

그런 점에서 임규찬(林奎燦)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둘러싼 세 꼭지점」(『창작과비평』 2001년 겨울호)과 이어서 나온 윤지관(尹志寬)의 「놋쇠하늘에 맞서는 몇가지 방법」(『창작과비평』 2002년 봄호)은 주목할 만한 글이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 적대적이라는 통념을 극복해야 한다는 요구에 응답했을 뿐만 아니라 리얼리즘론과 모더니즘론의 대화를 촉진하는 논제들을 제시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글들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관계를 새롭게 보려면 당연히 필요한 사고의 전환을 기대한 만큼은 이룩하지 못했다고 판단된다. 예를 들면 임규찬은 나의 평론에 대해 논평하는 중에 장정일(蔣正一)과 최인석(崔仁碩)을 ‘비루한 것의 카니발’이라는 측면에서, 신경숙과 윤대녕(尹大寧)을 ‘내면의 탐구’라는 측면에서 묶어 논한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그렇게 묶은 작가들 사이의 “근원적인 차이를 무시한 채 단순히 스타일의 유사성이나 기법의 유사성으로 동일성의 논리를 구상”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장정일과 윤대녕의 한묶음이야말로 동일성의 범주에 해당하는 우리 시대의 한 유형”이라고 규정하고 “이들의 문학은 사회병리현상을 미적으로 변형한 단순재현물이라는 성격을 사회적으로 갖게 된다”는 주장을 편다. 임규찬이 나의 유형화 방법에 반대하는 이유가 되는 그 ‘근원적인 차이’란 요약하면 어떤 행위나 상황의 사회적 성격에 대한 지시가 있는가 없는가를 기준으로 하는 차이이다. 최인석 소설의 ‘기이함’은 장정일의 ‘기이함’과 달리 “사회적 모순이 집약된 사회(…)와 긴밀한 연결을 맺는다”는 것이고 신경숙 소설의 개인은 윤대녕 소설의 개인과 달리 “특수한 사회적 운명”으로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문학작품을 다루면서 스타일이나 기법보다 사회적인 의식이 더욱 ‘근원적인’ 문제라고 보는 것은 동의하기 어려운 리얼리즘론의 편견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당혹스러운 것은 장정일 소설과 최인석 소설에 숨어 있는 유사성을 드러내려던 나의 시도를 그토록 간단히 일축한 판정이다. 누가 보더라도 원한의 정치학과 (포스트)모던한 난동으로 확연하게 갈라지는 소설을 굳이 ‘비루하게 만들기’의 테마와 관련하여 묶어놓은 것은 ‘근원적인 차이’를 교란하려는 어떤 계산된 ‘책략’의 일환이 아니다. 나의 시도가 혹시 어설프게 보였을지 몰라도 리얼리즘의 동일성에 대한 임규찬 자신의 믿음을 잠시나마 유보하고 살폈더라면, 일반적으로 리얼리즘 계열과 모더니즘 계열로 분류되는 경향이 다른 소설을, 그러한 분류의 경계를 넘어 읽고 있다는 것, 그 두 계열의 소설이 90년대의 정치적·문화적 지형 속에서 교차하는 지점을 찾고 있다는 것쯤은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나의 작품읽기에 대한 임규찬의 비판이 상기시키는 것은 선언의 차원에서는 매번 갱신을 다짐하고 있지만 사고의 차원에서는 줄곧 보수(保守)에 머물고 있는 한국 리얼리즘론의 답답한 실정이다. 임규찬은 윤지관의 리얼리즘론이 80년대 리얼리즘론을 답습하고 있다는 요지의 비판을 하면서 “스스로 담지하고 있다는 리얼리즘론을 근원에서부터 재구축해야 할 필요성을 이 지점에서도 다시 절감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 성실한 반성의 언명을 그대로 믿어도 좋을지 문득 망설이게 만드는, “이미 ‘확립’된” 리얼리즘론에 의지한 비평적 사고를 그 자신이 하고 있다. 장정일과 윤대녕이 진짜 동일유형이라는 그의 판단은 너무나도 익숙한 루카치 공식이다. 장정일·윤대녕 소설에 ‘평범함과 기이함의 이분법’이 있으며 그들의 소설은 “사회병리현상을 미적으로 변형한 단순재현물”이라는 설명은 모더니즘의 세계관을 ‘퇴폐주의’라고 규정한 루카치가 그 근거의 하나로 자연주의에서부터 지속되고 있는 ‘병리적인 것에 대한 강박증’을 거론한 예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1 리얼리즘 지지자가 루카치에게 기대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양극화에 서양의 어느 비평가 못지않게 책임이 있는 그 스딸린주의 협력자의 판례를 여전히 기준으로 삼아 소설을 심판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리얼리즘론의 ‘과감한 환골탈태’란 기적에 가까운 노릇이며, 리얼리즘·모더니즘 이분법의 해소는 더더욱 그러하다. 임규찬과 윤지관이 리얼리즘론과 모더니즘론의 소통을 촉진한다는 취지에서 행한 모더니즘 비판 중에는 그 취지를 오히려 손상시킬지 모를 오해와 독단이 적지 않다. 나는 그들의 글에서 리얼리즘론과 대화할 필요가 있는, 그렇게 함으로써 보충할 필요가 있는 모더니즘론의 당사자로 호명된만큼, 그들의 생각과 차이가 있는 나의 생각을 명확하게 진술하는 기회를 가지고자 한다. 혹시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대립을 해소하기는커녕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지만, 또 나 자신이 수상쩍은 이데올로기적 구조에 갇혀 있음을 스스로 입증하는 꼴이 될지도 모르지만, 차이의 확인은 적어도 좀더 원활한 소통에는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2. 버먼은 살아 있다

 

리얼리즘·모더니즘을 다시 비평의 쟁점이 되게 만든 최근의 계기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그것을 둘러싼 담론싸움을 그만두고 작품으로 귀환하자는 최원식(崔元植)의 제안이다. 하지만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관계설정은 최원식의 ‘회통’론 훨씬 이전부터 민족문학론 내부에서 지속적으로 다루어지고 민족문학론의 정당화에 끊임없이 이용되어온 주제이다. 민족문학의 ‘세계문학’과의 연관을 해명하기 위한 담론의 중심에는 리얼리즘·모더니즘 대립문제가 놓여 있으며, 민족문학론의 주요 프로그램 중에는 리얼리즘에 의한 모더니즘의 극복이 들어 있다. 「리얼리즘에 관하여」 「모더니즘에 관하여」 「모더니즘 논의에 덧붙여」 등과 같은 80년대의 주요 평론에서 백낙청(白樂晴)은 ‘사실주의’와 ‘리얼리즘’ 구분법을 다듬는 한편 모더니즘이 자체논리의 전개에 의해 파산에 이르렀다고 주장함으로써 리얼리즘의 선진성을 믿는 자신의 입장을 확고히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백낙청은 최원식의 ‘회통’론이나 윤지관의 ‘통합’론이 생겨날 소지를 만든 사람이기도 하다. 아마도 그가 가지고 있는 리비스(F.R. Leavis)적 비평감각의 결과이겠지만 그는 “20세기초 모더니즘 운동의 실제 업적은 모더니즘의 이념과 구별되어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적어도 작품의 층위에서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경계 넘기가 가능함을 시사했다.2 하지만 그 경계 넘기는 결국 모더니즘의 업적을 리얼리즘의 이념으로 흡수하여 리얼리즘의 판도를 넓히는 일종의 제국주의적 팽창이다. 백낙청 이론의 지도 속에는 모더니즘이 그 고유의 영역과 형세를 유지하며 존립할 여지가 전혀 없다. 제국에 합병된 국가가 이미 국가가 아니듯 리얼리즘에 합병된 모더니즘은 이미 모더니즘이 아니다.

모더니즘으로부터 그 자주성을 박탈하는 논법은 마샬 버먼(Marshall Berman)의 모더니즘론에 대한 백낙청의 비판에서도 확인된다. 버먼의 모더니즘론은 냉전시대 영미학계에서 정전의 지위를 얻으며 이데올로기화된 모더니즘에 대한 추인이 아닐 뿐만 아니라 그 바탕에 급진적 개인주의와 휴머니즘적 맑스주의의 복합체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따라서 백낙청이 배격하는, 미국의

  1. Georg Lukács, The Meaning of Contemporary Realism, trans. by John and Necke Mander (London: Merlin Press 1963) 30면. 이 책의 독일어 원제는 ‘리얼리즘에 대한 오해에 맞서서’(Wider den mißverstandenen Realismus)이다. 임규찬과 윤지관의 루카치에 대한 신뢰는 아무래도 지나치다. 윤지관은 앞의 글에서 “루카치를 20세기 모더니즘을 배격하고 19세기 리얼리즘을 옹호한 인물로 정리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이자 오해이다. 오히려 그는 리얼리즘 정신으로 당대에 지배적이었던 모더니즘의 혁신을 도모한 모더니즘의 진정한 친구였다”고 쓰고 있다. 루카치가 ‘모더니즘의 진정한 친구’라니! 1930년대 독일문학의 표현주의운동에 대한 루카치의 비판은, 그 대표적 문건(「표현주의의 위대성과 몰락」, 루카치 외 지음 『문제는 리얼리즘이다』(홍승용 옮김, 실천문학사 1985)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듯이, “모더니즘의 혁신을 도모한” 충고가 아니라 독일 파시즘의 사상적 선구자에 대한 공격이었으며 반(反)파시즘 투쟁을 위한 인민전선구축 작업의 일환이었다. 루카치는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을 ‘건전과 퇴폐’ ‘인간주의와 야만주의’ ‘건강한 예술과 병든 예술’ 같은 용어로 일관되게 양극화했다. 자신은 건전한 정신이자 휴머니스트라 확신하고 상대는 정신병자이자 원조(元祖) 파시스트라고 매도하는 사람이 어떻게 ‘진정한 친구’인가. 리얼리즘·모더니즘 통합도 좋지만 도덕적 분별은 지켜야 한다.
  2. 백낙청 「모더니즘 논의에 덧붙여」,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II』(창작과비평사 1985) 464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