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 수상작

임세화

임세화 林世華

1984년 대전 출생. 동국대 국문과 대학원 석사과정 재학중. farewell_i@hanmail.net

 

 

 

모래늪의 기억

 

 

종이컵을 내밀자 아이는 비칠비칠 뒷걸음질을 쳤다. 어른들은 겁에 질린 아이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킬킬거렸다. 나는 다시 한번 아이를 향해 컵을 받아가라고 턱짓을 했다. 도리질을 치며 내 눈을 노려보던 아이는 제 뒤에 선 엄마를 잡으려는 듯 공중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어른들은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면서도 내심 빨리 자신의 차례가 돌아오길 바라는 눈치였다. 내가 왼쪽 입꼬리를 비틀어 웃음을 지어 보이는 순간, 제 엄마의 치맛단을 붙잡으려던 아이는 사슴분이 깔린 흙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이가 울음을 터뜨릴 듯 입술을 옴짝거리자 어른들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대신 컵을 받아들었다. 나는 아이의 엄마가 아이를 안아올리는 모습을 흘끗거리며, 새로 받은 녹혈에 소주를 부어 휘휘 저었다. 어른들은 배식을 받는 초등학생들처럼 착하고 질서정연하게 컵을 받아들었다.

얌전히 누워 있던 갈록이가 마취기운에 젖은 혼몽한 눈을 껌벅거렸다. 벌써 스무 컵째였다. 아무리 튼튼한 사슴이라도 열 컵 이상을 뽑아내면 힘들어진다. 종이컵으로 반 컵씩 스무번을 따라냈으니 이제 갈록이의 피는 그만 뽑아야 했다. 나는 피를 뽑아내고 있는 아버지에게 눈짓을 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버지는 지혈제와 고무줄 대신 새 컵을 가져다대고 있었다.

“이건 한철 장사다. 너도 알잖니.”

어제부터 계속 일어나지 못하고 축사에 누워 있는 갈록이를 보며 아버지는 변명하듯 말했다. 나는 흙바닥에 엉덩이를 찧었던 아이처럼 입술을 씰룩거렸다. 조금이라도 돈을 더 벌기 위해 갈록이의 피를 콸콸 따라냈기 때문이 아니었다. 늘 주저하며 나를 어렵게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가 유난히 거슬렸다. 나는 뜨거운 볕에 벌겋게 익은 아버지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사슴농장에 온 후로 아버지는 늘 죄를 지은 사람처럼 굴었다. 숲에서 나는 작은 소리에도 흠칫흠칫 놀라고, 커다란 안경 속에 숨은 작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주위를 두리번댔다. 특히 턱을 괴고 멍하니 앉아 사슴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은 나를 더 답답하게 했다. 그런 아버지의 태도에 나는 자꾸 부아가 치밀었다. 뿔이 잘린 채 힘없이 늘어진 갈록이보다 더 기운없이 서 있는 아버지를 외면하고 나는 축사 밖으로 나왔다.

종이컵에 담긴 피를 보고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던 아까 그 아이가 제 동생과 뛰어놀고 있었다. 아이의 동생은 녹혈을 마신 덕분인지 발그레한 혈색으로 내가 가꾼 잔디 위를 미친 듯이 뛰어다녔다. 동생은 내가 아이에게 주었던 녹혈을 아침에 갓 배달된 우유 마시듯 벌컥벌컥 마셔댔다. 박카스가 섞인 녹혈에서 약간 달달한 맛이 났던지 윗입술에 묻은 검붉은 핏물을 혓바닥으로 게걸스레 핥아대기까지 했었다. 그래서인지 동생은 두살 터울이라는 제 오빠와 몸집이 비슷했다. 외려 동생이 오빠보다 우람해 보이기까지 했다.

아이들의 부모와 친척들은 파란 비치파라솔 아래 앉아 사슴육회를 먹고 있었다. 아이들이 발정난 사슴처럼 뛰어다니며 잔디와 꽃을 밟는 데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마 아이들이 적당히 먼 곳에서 놀다가 마침맞게 돌아와 자신들을 방해하지 않길 바랄 것이다. 아이들은 둘이서 하는 술래잡기에 금세 싫증이 났는지 잔디에 앉아 맨손으로 흙을 파내고 있었다. 아이들이 땅굴을 만들기 전에 나는 작게 소리치며 손짓으로 아이들을 불렀다.

아이들의 키는 새끼사슴과 비슷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절대 사슴을 꼬집거나 괴롭히면 안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농장에 오는 아이들이 대개 그렇듯 그들은 내 말을 대충 흘려 듣고 새끼사슴에게 다가갈 것이다. 마치 자기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처럼 사슴이 꼬리를 흔들고 자신들의 몸에 털을 부비며 사랑스럽게 안기기를 바랄 것이다. 그리고 화가 난 새끼사슴이 그들의 엉덩이나 가슴을 치받으면 울까 말까 고민하며 두리번거리다 애꿎은 사슴을 향해 경계의 눈빛을 보내고는 제 엄마에게 돌아갈 것이다. 나는 작은 울타리 곁에 있는 나무의자에 걸터앉아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아이는 제 동생의 등 뒤에 숨어 사슴을 훔쳐보고 있었다. 동생은 손을 뻗어 사슴의 등을 쓰다듬더니 점점 대가리 쪽으로 손을 옮겼다. 물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동생은 점점 과감하게 사슴을 만졌다. 내 기대와는 달리 지난달까지도 사람을 경계하던 새끼사슴들은 동물원의 동물들처럼 변해 있었다. 그들은 게으르고 무신경했고 순하게 굴었다. 나는 나태해진 사슴들을 경멸스럽게 바라보았다. 저렇게 자란 사슴들은 매년 뿔이 잘리고 피가 뽑히고 종내는 육회와 불고기가 되어 식탁에 오를 것이다. 동생은 불쌍한 생을 살다 죽을 것이 뻔한 새끼사슴의 등에 제 무거운 엉덩이를 올리고 있었다. 새끼사슴은 가느다란 네 다리를 부들부들 떨다가 푹 주저앉았다. 새끼사슴은 검고 큰 눈으로 날 원망스럽게 쳐다보았다.

“당장 내려오세요, 꼬마 아가씨. 불쌍한 어린 사슴의 등에 올라타면 다음 생에 사슴으로 태어날지 모른다고.”

“난 사슴 좋은데. 일어나, 사슴. 이랴, 이랴.”

“……그래, 넌 꼭 사슴으로 태어날 거야.”

나는 새끼사슴의 가냘픈 등에서 거칠게 동생을 끌어내렸다. 동생이 땅에 떨어지며 사슴분이 섞인 냄새나는 흙이 분홍 스커트에 묻었다. 동생이 난리법석을 피우며 내 손에 끌려 내려오는 동안, 아이는 검지와 중지로 사슴의 등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이답지 않은 아이였다. 나는 요란하고 정신없게 구는 아이의 동생도 싫었지만, 곧 죽을 노인처럼 구는 아이는 더 끔찍했다. 나는 아이의 손목을 덥석 그러쥐고 한참 동안 사슴의 등을 되게 문질렀다. 아이는 요양원에 끌려간 노인처럼 무력하고 공포에 질린 낯빛으로 사슴 털을 부비는 제 손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럽게 뭘 만지는 거니?”

아이의 엄마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반바지 차림으로 휴가를 즐기고 있던 아이들의 엄마. 새끼사슴이지만 털에 사슴분이 덕지덕지 묻은 건 다 큰 사슴과 마찬가지였다. 그제야 나는 익숙해서 잊고 있던 냄새, 더운 날씨에 사슴분과 사슴의 체취가 풍기는 역한 냄새를 깨달을 수 있었다. 육회 양념에 섞인 고춧가루가 잇새에 낀 채로 아이들의 엄마는 아이들을 나무랐다. 특히 동생이 연한 분홍 스커트 아랫단에 잔뜩 분뇨를 묻힌 것을 보고는 불같이 화를 냈다. 나에겐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았지만, 아이들을 그곳으로 데려간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곱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한손에 삽을 쥔 아버지는 건너편 축사에서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는 손님들이 가져갈 녹용과 사슴고기를 포장했다. 그것들은 금방이라도 핏물이 뚝뚝 떨어질 듯 싱싱해 보였다. 아이스박스에 꼼꼼히 고기를 담는 아버지의 손놀림은 몹시 날렵했다. 노파가 한차례 손질을 끝내놓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이스박스 포장은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저울의 눈금을 응시하며 묵묵히 포장하던 아버지는 여러번 헛기침을 했다. 아버지의 어깨가 저울의 바늘처럼 너울거렸다. 나는 식탁에 턱을 괸 채 저울의 눈금처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기다리는 쪽은 언제나 나였다. 나는 아버지가 입을 뗄 떼까지 언제까지라도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그것이 우리의 규칙이었다.

아버지는 괜히 완성된 포장을 풀어 아이스팩을 더 넣었다가, 녹용을 조금 덜어냈다가, 포장 테이프를 덧붙이는 일을 반복했다. 먼저 입을 뗀 건 때마침 부엌에 들어온 노파였다. 뒤미처 입을 열던 아버지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턱을 괴고 있던 손을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바꾸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노파는 숙박을 하루 연장하겠다는 손님들의 말을 전했다. 대신 펜션의 객실료를 조금 깎아달라는 것이 요지였다. 아버지는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노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칠순이 넘은 노파는 그러나 노파라는 말과 어울리지 않게 고왔다. 분홍빛이 감도는 고운 볼과 굵고 새까만 머리카락을 지니고 있었다. 나는 노파와 대화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녀를 부를 일이 없었다. 마땅한 말이 없어 그저 노파라고 지칭할 뿐이었다. 퉁명스럽고 붙임성 없는 노파는 이 지방 토박이로 인근 농가들의 사정과 사슴농장의 생리를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에게 농장 옆에 펜션을 함께 짓지 않으면 망해버릴 것이라고 저주를 퍼붓듯 씨부렁거린 것도 노파였다. 어느새 노파가 없으면 농장 운영이 어려울 정도가 되어버렸다. 노파는 가족 아닌 가족으로 아버지와 내 곁에 머물렀다. 들어오라는 말도 나가라는 말도 없이, 아버지와 나 그리고 노파는 그렇게 가족도 계약관계도 아닌 이상한 동거를 하고 있었다.

노파가 나가자 아버지는 주방세제로 손을 닦기 시작했다. 피와 세제가 섞인 비릿한 냄새가 식탁까지 전해졌다. 개수대의 물을 틀어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 손금과 손톱의 틈을 정성스럽게 문지르던 아버지는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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