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전성태

 

전성태 全成太

1969년 전남 고흥 출생. 1994년 실천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소설집 『매향』 『국경을 넘는 일』, 장편 『여자 이발사』가 있음. jstroot@hanmail.net

 

 

목란식당

 

 

 

북쪽 아르항가이 초원에서 울란바토르로 돌아왔을 때는 시월도 다 저물어 있었다.

칭기즈칸 공항에서 여행객들을 배웅하고 나서 나는 평소와 달리 한동안 대합실에 앉아 있었다. 내 손에는 디자인이 똑같은 명함 열댓장이 들려 있었다. 외국계 보험회사의 점장들이 들려주고 간 명함들이었다. 그들은 올해 내가 맡은 마지막 여행객들이었다. 마치 나는 군에서 전역할 때와 흡사한 기분이었다. 나는 동기들과 헤어지고 나서 홀로 상봉터미널에 맥없이 앉아 있었다. 꼭 다시 만나야 하는 사람들처럼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았으나 12년 동안 다시 만난 동기는 한명도 없었다.

나는 공항을 나서면서 배낭에서 휴대전화기를 꺼냈다. 삼촌은 지난주에 교민들과 어울려 러시아 바이칼호로 떠났는데 일정대로라면 지금쯤 돌아와 있을 거였다. 삼촌을 생각하자 허탈감이 마치 외로움에서 비롯된 양 다소 기운이 났다.

“아, 잘 다녀왔냐?”

삼촌이 휴대전화를 받았다. 바깥인지 차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삼촌, 내가 없는 동안 지구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 아니죠?”

나는 짐짓 장난스런 목소리로 소리쳐 말했다. 삼촌은 잠시 대답이 없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나는 으레 삼촌에게 세상의 안부를 묻곤 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러는지 모르나 나에게는 여행에 대한 어떤 징크스가 있었다. 내가 여행하는 동안 세상에는 꼭 큰일이 한건씩 터졌다. 대학 3학년 여름방학 때 몽골로 어학연수를 왔는데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5년 전 가을 처음으로 가이드를 맡아 고비를 열흘간 돌아다니다가 오니 뉴욕 세계무역쎈터가 테러로 무너져 세상이 발칵 뒤집혀 있었다. 하다못해 지난해 연말에는 한국에 다녀온 사이 울란바토르의 범버거르 시장이 불타 사라지고 없었다. 그곳은 삼촌과 내가 평소 자주 이용하던 재래시장이었다. 내가 떠나 있는 동안 기다렸다는 듯 몽골 건국 이래 최대 화재사고가 발생한 거였다. 어찌 보면 내 신변과 상관없는 일들이라 내 여행이 사고를 불러온다기보다는 사고가 내 부재를 틈타 일어난다고 해야 옳았다. 그럴 때는 우주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우주인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삼촌은 그건 징크스가 아니라고 했다.

“네가 세상에 관심이 좀 많을 뿐이야. 세상은 한시도 조용한 날이 없거든.”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삼촌의 말처럼 내가 세상에 관심이 많다고는 할 수 없었다. 삼촌은 가끔 어느 나라에서 일어난 내전이나 쿠데타 소식을 알려오지만 그건 내게 연예인 아무개의 이혼이나 사망 소식만큼 감흥을 주지 못했다. 애초부터 삼촌과 내가 생각하는 세상은 다른지도 몰랐다. 한국 신문을 받는 날이면 나와 삼촌은 신문을 반으로 나누어서 읽는다. 정치면과 국제면은 삼촌의 차지이고 나는 연예면과 스포츠면을 본다. 간혹 사회면에 황당한 사건사고 소식이 있으면 삼촌이 발견해 알려주곤 했다. 오늘 삼촌은 틀림없이 북한이 지하 핵실험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올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도 CNN이나 교민신문을 통해 북한의 핵실험이 임박했다는 뉴스가 여러차례 나왔고, 핵실험 실시 소식은 보험회사를 통해 연수장소인 초원에 곧바로 전해졌다. 지난여름 여행 때는 북한이 미사일을 쏘았다고 삼촌이 심각하게 말했다. 삼촌이 거두절미하고 이야기해서 나는 실제로 깜짝 놀랐다. 보나마나 내 징크스가 들어맞았다는 예감으로 나는 “미사일을 쏴요? 어디, 서울로요?” 하고 호들갑을 떨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삼촌은 짧게 대답했다. “태평양으로.”

나는 오늘도 짐짓 놀란 척 반응해줄 요량이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냐고 말이다. 이윽고 수화기 너머로 삼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란에 옥류관 출신 요리사가 왔다는구나.”

“네? 목란식당이 어쨌다고요?”

나는 삼촌이 나름껏 농담을 하는 거라 생각했다.

“평양 옥류관에서 공훈 냉면요리사가 직접 나왔다지 뭐냐.”

삼촌이 심상하게 말을 이었다. 나도 덩달아 시들해졌다.

“지금 어디세요?”

“표구사에 가는 길이다. 피곤하지 않으면 목란으로 오렴. 함께 저녁이나 먹고 들어가자.”

표구사는 박씨라는 교민이 운영하는 갤러리였다. 그는 이민을 오기 전에 대전에서 표구사를 운영했고 삼촌과도 친분이 있었다. 그때는 삼촌이 한창 붓을 잡고 있을 때라 삼촌의 그림들은 주로 그가 표구했다. 몽골에 차린 갤러리는 의외로 잘되는 모양이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몽골 화가들이 작품을 싼값에 많이 내놨고 그중에는 더러 사회주의 시절의 명작으로 꼽히는 그림들도 있었다. 여행객들도 모사품 가격으로 괜찮은 작품들을 구입해 갔다. 또한 평양식당 목란에 전시해놓고 파는 북한 그림들도 그가 도맡아서 표구해주고 있었다. 박씨는 특별한 그림이 들어오면 삼촌에게 감수를 부탁해 가격을 매겼다. 삼촌은 그 일을 썩 내켜하지 않았다. 한때 잘나가던 화가로서 왜 자격지심이 들지 않겠는가. 나나 박씨나 삼촌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했다. 박씨는 삼촌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삼촌이 다시 붓을 잡도록 도와주고 싶어했다.

나는 삼촌이 정치적인 이유로 그림을 중단했다고 생각한다. 삼촌은 십여년 전 북에 다녀온 적이 있다. 아직 남북간에 민간교류가 본격화되기 전이었는데 서로 정치적으로 덜 민감한 부분을 미리 열어본 케이스였다. 삼촌에게는 특혜가 아닐 수 없었다. 제한적이나마 삼촌은 묘향산과 금강산의 절경을 스케치해다가 서울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그런 이유로 전시회는 꽤나 세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폭포와 계곡과 기암괴석을 담은 산수화들은 삼촌의 예전 작품들에 비해 새로울 게 없었다. 다만 그림 한점은 화단에 잔잔한 화제를 뿌렸다. 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북녘 처녀가 만추의 황톳길을 걸어가는 ‘마식령 처녀’라는 제목의 그림이었다. 전시된 작품 중 유일하게 물상으로 사람이 들어간 그림이었고 해석의 여지도 풍부했다. 한 소설가는 그 그림에 스토리를 꾸며서 산문을 쓰기도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시인 구상(具常) 선생이 젊은 시절 폐병에 걸려 그 마식령을 넘어 약수가 유명한 마전리로 요양을 떠났고, 혼담이 오가던 처녀가 그를 찾아 고갯길을 넘었다는 후일담이었다.

삼촌은 그 그림이 주목을 받자 내심 곤혹스러워했다. 나는 그 내막을 비교적 소상히 알고 있었다. 삼촌은 묘향산과 금강산 외에 다른 곳에서 목격한 사실을 그리면 안되었다. 입북에 앞서 남북 당국자가 합의하고 삼촌도 서약한 조건이었다. 따라서 삼촌은 반칙을 한 것이었다. 그 그림은 애초에 스케치북에 들어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정작 삼촌이 화폭에 옮기고 싶은 풍경은 금강산 가는 길에 목격한 그 처녀였다. 화가의 자의식으로 삼촌은 매우 고통스러워했다.

“야야, 그 황톳길을 지프로 넘어가는데 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은 처녀가 걸어가는 거야. 그 황톳길을 한 처녀가 넘고 있었다 이거야.”

주위에서 몇사람이 꼭 그려야 한다고 부추겼고, 나 역시 그중 하나였다. 나는 삼촌이 예술가로서 그 정도의 금기에는 저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시범사업이라 남북 당국자들에게 다소간 정치적 부담은 되겠지만 그림이 딱히 정치적 메씨지를 담고 있지는 않았다. 이를 문제삼는다면 결국 문을 열지 않겠다는 꼬투리에 지나지 않을 거였다.

마침내 삼촌은 결심을 굳히고 붓을 쥐었다. 그래도 마음이 불편했던지 그림을 끝마치고 제목은 바꿔 달았다. 원래 삼촌이 지프에 실려 넘은 고갯길은 마식령이 아니었다. 그 근처의 울림령이라는 고갯길이었고 그 처녀를 목격한 곳은 어느 폭포로 가는 샛길에서였다. 어쨌든 전시회는 무난히 끝났고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삼사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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