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문제는 실감이다

『창작과비평』 2006년 겨울호 특집을 읽고

 

 

고봉준 高奉準

문학평론가. 평론집『반대자의 윤리』가 있음. bj06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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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의 마지막 몇년, 한국문학을 유령처럼 떠돌았던 ‘위기론’이 ‘종언’이라는 문제의식으로 되돌아오는 가운데, 최근 2000년대 문학의 새로운 ‘경향성’과 ‘징후’를 가늠하는 기획들이 문예지들의 지면을 채우고 있다. 경향성은 일정한 형태의 반복을 요구한다. 그것은 동일한 것의 반복이 아니라는 점에서 원환적 성격을 띠며, 하나의 ‘현실’로 환원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영속적이지도 않다. 이처럼 경향은 순간적이지 않으면서 영원하지도 않고, 지배적이지 않으면서 주변적이지도 않다. 그리하여 하나의 경향은 종종 다른 경향과 공존 내지 충돌하면서 상쇄되기도 하고, 반대로 극적인 상승효과를 발생시키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미래파’와 ‘경계 넘기’에 집중된 2000년대 문학에 대한 평가는 많은 경향성들을 일반화하거나 ‘새로움’과 ‘징후’를 동일시하면서 진행된다는 느낌이다.

『창작과비평』은 2006년 겨울호에 여름호 특집 ‘2000년대 한국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의 후속편을 배치했다. ‘후속편’이라 밝히고는 있지만, 아무런 예고 없이 불쑥 마련된 ‘연속기획’이라는 존재는 이례적이다. 여름호 특집은 “2000년 6월사건의 중차대한 의미”를 강조한 한기욱(韓基煜)의 총론 「한국문학의 새로운 현실 읽기」를 필두로 네 편의 각론으로 구성되었지만, 전체적으로 “총론의 의도가 각론을 통해 제대로 해명되지” 않았다는 평가이다(홍기돈, 『창작과비평』 가을호 379면). 한기욱과 황광수가 ‘분단’이라는 민족적 현실, ‘통일시대’라는 새로운 국면을 전제하는 반면, 각론에 참여한 김형중, 차미령, 신형철의 글에서는 그런 문제의식이 전혀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 특집에는 이른바 국민국가의 바깥을 사유하려는 문학적 실험에 관한 각론이 빠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불협화나 결여가 겨울호 특집의 직접적 계기는 아닐 것이다. ‘2000년대 한국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는 왜 겨울호에서 반복되어야 했을까? 왜 창비는 편집위원들을 대거 투입해서 여름호의 논의를 이어가야 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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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로를 묻다’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겨울호의 좌담은 2000년대 한국문학의 증상과 징후를 다양한 시각에서 검토하고, 나아가 21세기 한국문학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데 비중을 두고 있다. 그러나 ‘2000년대 문학이 읽은 시대적 징후’의 연장선에서 기획된 좌담 「우리 문학의 현장에서 진로를 묻다」는 제한된 시간, 지면, 구성원이라는 변수를 고려하더라도 좌담 특유의 긴장감에 이르지는 못한 느낌이다. 물론 2000년대 문학의 경향성을 ‘미래파’와 ‘경계 넘기’에 한정함으로써 경향의 복수성/이질성을 사상시켜버리는 여타 문예지들과 비교할 때 통일문학이나 노동시, 중견작가들의 문학적 성과에 관심을 표명하는 노력, 특히 한국문학의 외연을 남한의 자본주의적 현실에 국한하지 않고 한반도 전체로 확장하는 시야의 개방성은 높게 평가될 만하다. 그런데 “한반도 남녘 사람의 일상생활에 직격탄을 날린 쪽은 전자이지만 한반도 주민 전체의 장래에 더 결정적인 사건은 후자이고, 그런만큼 후자를 2000년대 문학의 기점으로 삼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주장(한기욱, 여름호 209면)은 정당한 것일까? 김영찬(金永贊)이 지적하듯이, 한기욱이 언급한 “어떤 작품들은 굳이 이러한 시대규정을 들이대지 않고도 분석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시대규정과 작품에 대한 분석이 긴밀한 관련성을 갖기보다는 괴리되어 있다는 느낌”(겨울호 197~98면)을 강하게 준다. 6·15공동선언이 분단현실에 ‘통일시대’라는 새로운 국면을 가져왔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러한 시대규정이 곧바로 우리 일상, 그리고 최근의 한국문학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은 좀체 실감되지 않는다. 가령 지난 10월 북핵사태가 터졌을 때 한국의 부동산 가격은 어떠했는가를 돌아보면 이 ‘실감’의 지평은 한층 명확해진다. 이전과 달리, 분단이라는 현실은 점차 불가항력적 현상으로 간주되기에 이르고, 이로 인해 국민 대다수의 의식에서 ‘분단’은 더이상 현실을 구성하는 절박한 조건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6·15공동선언이 한반도 주민 전체의 장래에 중요한 이정표를 제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불행히도 실감의 차원에서 남녘 사람들의 삶에 깊이 영향을 미친 것은 IMF였다. 『문학동네』 좌담에서 ‘분단체제론’과 ‘민족문학론’이 희화화된 반면, ‘하위문화적 상상력’과 ‘혼종성과 탈경계적인 반미학’의 유희성·불온성이 한층 높게 평가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창비의 좌담에서 흥미로운 점은 2000년대의 문학을 “포스트IMF시대의 징후”로 인식하는 김영찬과 “2000년 남북정상회담 및 6·15공동선언”이 문학 환경에 중대한 변화를 초래한 분기점이라고 주장하는 김영희의 상이한 시각이다. 김영찬이 민족문학론이나 6·15시대의 문학이라는 창비의 입론 바깥에서 젊은 작가들의 “유머나 환상, 유희와 공상”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려는 반면, 김영희는 그들의 새로움을 2000년대 문학의 특징이나 성취와 동일시하는 태도를 문제삼으면서 6·15공동선언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한다. 또 하나, 시대의 변화를 시의 변화에 바로 대입하는 “성급한 인식론적 단절”을 ‘기원 만들기’로 평가하면서 “앞세대와 단절되면서도 역설적으로 이어지는 전통의 형성”을 강조하는 박형준(朴瑩浚)과 “시적 주체의 단일성이 회의된다거나 열린 주체의 모색”이라는 측면에서 젊은 시인들의 시적 다양성을 ‘가능성의 일환’으로 평가하는 이장욱(李章旭)의 시각차도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주체의 해체’에 관한 견해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논의는 더이상 진전되지 못한 채 중견시인들의 시적 성취에 대한 합의를 통해 희석되어버린다는 느낌이다. 결국 이 좌담은, 장르는 달랐다 할지라도, 연속성의 맥락에서 최근의 문학을 평가하려는 김영희와 박형준, 단절의 효과를 강조함으로써 2000년대 문학의 새로움을 평가하려는 김영찬과 이장욱의 원론적인 입장 차이를 보여주고 끝난다. 이러한 차이는 6·15시대라는 규정과 민족문학론을 둘러싼 논의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김영찬은 “민족문학론이 지금의 문학적 현실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비평적인 적응력과 효율성을 잃”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김영희는 “민족문학론 자체가 변화된 상황과 의미있는 문제제기에 대응”하면서 갱신을 거듭해왔음을 주장한다. 물론 김영찬이 민족문학론의 ‘기본정신’이 지닌 유효성마저 부정하진 않지만, “민족문학론이라는 이름을 내걸지 않더라도 그런 정신을 문학현장 속에서 펼쳐” 보일 수 있다는 발언은 완곡어법으로서의 부정과 다르지 않은 듯하다. 민족문학론의 기본정신이란 무엇인가? 딱히 민족문학론이 아니어도 “한국사회의 인간화를 위해 기여할 수 있는 문학”일 수 있듯이, “문학과 현실의 실천적 관계”나 “문학과 현실의 긴장” 또한 민족문학론의 기본정신 없이도 얼마든지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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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석(柳熙錫)의 평론 「통일시대를 위하여」는 “하나의 분단체제”와 “상극의 근대사”가 남북정상회담과 6·15선언으로 인해 본격적인 잠식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전제하며, 오늘의 남북현실을 ‘통일시대’로 규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한기욱의 총론을 공유·계승하고 있는 이 글은, “6·15통일시대 담론이 우리 시민사회에서 아직 충분히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음도 솔직담대하게 인정하는 자세가 요구된다”거나 “6·15공동선언이 설령 ‘최대의 금기가 돌연 최고의 성취로 둔갑하는 사건’이라 하더라도, 이를 IMF사태와 비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