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백수린 白秀麟

201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소설집 『폴링 인 폴』 『참담한 빛』 『여름의 빌라』, 중편소설 『친애하고, 친애하는』 등이 있음.

eternal.dreamer.writer@gmail.com

 

 

 

빛이 다가올 때

 

 

인주 언니는 나와 여덟살 차이가 났다. 다시 말해, ‘언니’라고 부르지만 유년시절을 함께 통과하거나 학창시절 경쟁하는 사이는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언니는 큰이모의 첫째 딸이었는데, 큰이모는 육남매의 맏딸이 지닐 법한 위엄과 자존심을 지닌 여자였고, 그래서 막내인 엄마는 큰이모를 대체로 선망하고 가끔 질투했다. 고등학교를 제대로 졸업하지도 못한 엄마와 달리 큰이모는 대학까지 다녔는데,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래로 줄줄이 딸린 세명의 남동생들을 공부시켜야 하니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회사에 취직해 경리 일을 하라고 했을 때, 큰이모가 자기는 교수가 되고 싶으니 대학에 가야 한다고 말했다는 이야기는 외갓집에서 무용담처럼 전해지곤 했다. 결국 교수가 되지는 못했지만, 큰이모는 입주 과외를 해서 등록금을 벌어 국립대에 다녔고, 동생들에게 용돈을 주었으며, 졸업식에서 할머니에게 학사모를 씌워드렸다.

인주 언니는 그런 큰이모를 닮은 것인지 사촌들 중에서 공부를 가장 잘했다. 게다가 언니는 효녀로 일컬어지기까지 했는데, 큰이모가 망막색소변성증이 발병해 시력을 점점 잃기 시작하자 큰이모의 눈이 대신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중학생 때부터 언니가 방과 후 친구들과 놀지도 않고 곧장 귀가해 큰이모와 같이 장을 보러 다니거나, 큰이모가 깨끗하게 마치지 못한 설거지나 청소를 다시 했다는 건 친척들 사이에서 잘 알려진 일이다. 일찍 철들어 반항하는 법 없이 큰이모와 큰이모부가 원하는 대로 늘 따랐다던 언니. 언니는 정말 놀러 나가지 않았을까? 놀러 가고 싶진 않았을까? 어렸을 때 내가 그걸 궁금해하진 않았던 것 같다. 나는 큰이모를 어려워했고 큰이모가 날 무시한다고 생각했는데, 큰이모가 나를 못 본 체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못 봐 그렇다는 걸 알게 된 건 꽤 크고 난 이후였다. 큰이모가 진단을 받은 건 언니 나이 여덟살 때였고, 눈앞에 보이는 풍경들에 본격적으로 구멍이 뚫리기 시작한 건 언니가 열두살 때부터였지만, 시력을 대부분 잃어 확대경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책이나 신문기사를 아예 읽을 수 없게 되기 전까지 큰이모는 친척들과 있을 때조차 눈이 보이는 연기를 꽤 오래 했다.

아무튼 남다른 가정사 속에서도 언니는 좋은 대학에 입학해 대학원까지 갔다. 그 사실이, 친척 어른들의 말이 언니에게 부여했던 후광을 더 짙게 해 나는 언니를 성인(聖人)처럼 함부로 범접하지 못할 사람으로 오랫동안 여겼다. 그런 언니와의 거리가 가까워진 건 내가 열다섯살 때, 엄마의 성화로 언니가 여름방학 한달 동안 영어 과외를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땐 주변에 대단지 아파트가 막 들어섰고, 아직 동네에 다른 세탁소가 생기기 전이어서 엄마 아빠의 세탁소가 유례없는 호황을 맞이하던 시기였다. 언니는 스물세살이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아직 앳됐을 나이다. 언니는 한국 고전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원에 진학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시력이 더 나빠진 큰이모가 약간의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그래서 여전히 학교, 집만 오가던 언니는 평소보다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아무것도 몰랐고, 영어 문제를 풀다가 지겨워지면 언니에게 대학생활 이야기나 연애담을 들려달라고 졸랐다. 그럴 때면 언니는 무척 난감해했는데, 언니의 삶엔 내 관심을 충족시킬 만한 흥미진진한 모험 같은 건 없었기 때문이다. 언니는 내가 나중에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글 쓰는 여행작가나 화가 같은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말하면 “넌 아마 어려울 거야. 첫째잖아. 첫째는 부모를 거슬러 살기가 힘들어”라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었지만—당시 언니의 그런 유의 말들은 안 그래도 커져가던 세상에 대한 나의 반항심에 기름을 붓곤 했다—그래도 나는 언니가 좋았다. 언니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게 『반 고흐: 태양의 화가』 같은 책을 사다주는 사람이었고, 나에게 “내가 몸을 흔들어도,/고운 소리 나지 않지만/저 우는 방울은 나처럼/많은 노래를 알지는 못해.//방울과, 작은 새와, 그리고 나./모두 달라서, 모두가 좋아.”1 같은 시의 아름다움을 가르쳐준 사람이었다. 게다가 달궈진 불판 위에 올려놓은 듯 마음이 늘 요란하게 달싹이던 당시의 나와 달리 언니는 얼마나 한결같이 차분해 보였던지. 나는 얼어붙은 겨울의 강처럼 고요한 언니의 어른스러움을 항상 동경했다.

 

세기가 바뀌고, 나는 대학생이 되었으며, 언니와는 점점 더 마주칠 일이 없어졌다. 친척들의 경조사 때 오가다 마주치면 안부 인사를 주고받았지만 내밀한 이야기 같은 건 나눌 수 없었고, 언니가 비교적 이른 나이에 교수가 되었을 때도 따로 만나거나 하지 않고 축하 메시지를 보낸 것이 전부였다. 큰이모는 무척 기뻐했을 테고, 우리 엄마는 조금 부러워했지만 그때 나는 겨우 스물다섯살이었고, IMF 직후 고등학교를 다닌 많은 이들이 그랬듯 실용적인 직업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간호대학에 진학한 후 우여곡절 끝에 중환자실에서 일하고 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나는 마음만 먹으면 뭐든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을 거란 착각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돈 많이 벌어서 호강시켜줄 테니 걱정 마.” 내가 그렇게 큰소리를 치면 엄마는 하루 종일 세탁소에서 동네 사람들의 바짓단을 줄이느라 옷에 붙여온 실밥을 떼어내며 말했다. “시끄럽고, 얼른 졸업해서 시집이나 가라.”

큰이모는 내가 한국 간호사들 간의 위계질서와 과도한 업무량에 숨 막혀하며 해외 취업을 준비하던 그해에 돌아가셨다. 시력 때문은 아니었고 뇌출혈 때문이었는데, 장례식장에서 큰이모부도 이종사촌 오빠도 봤지만 지금 내게는 유난히 많이 울던 언니의 모습에 가슴이 무척 아팠던 기억만 남아 있다. 하지만 장례식이 끝난 이후엔 또다시 일상에 치여 언니와 연락을 더이상 주고받지 않게 되었고, 몇달 후 나는 결혼자금으로 모은 적금을 깨서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뉴욕의 간호사가 되기 위해 떠났다. 그때 내 나이는 서른세살이었는데, 뉴욕은 기회의 도시처럼 여겨졌고 한번 사는 인생인데 더 넓은 세상을 보며 근사하게 살아보지 않는 건 아깝다고 생각하던 내게 가장 걸맞은 도시처럼 느껴졌다.

언니와 재회한 것은 내가 뉴욕에서 에이전시 소속 계약직 간호사 생활을 한 지 반년 정도가 되었을 때였다. 언니는 느닷없이 내게 전화를 걸어와 안식년을 맞아 뉴욕의 한 대학 동아시아연구소에 교환교수로 와 있다고 했다. “네가 뉴욕에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 연락하는 건데, 이제야 알았네.” 우리가 맨해튼의 한 까페에서 재회했을 때, 나는 뉴욕 한복판에서 만나는 언니가 너무 낯설었고, 내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조금 더 늙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언니는 긴 단발에 금테 안경을 끼고 있었고, 베이지색 얇은 모직 코트 차림이었다. 그날 언니는 카드를 주며 메뉴를 대신 주문해달라고 말했는데, 점원이 언니의 영어를 알아듣지 못할까봐 신경을 쓰는 것 같았다. 미국에 도착한 지 한달이 넘어가지만 회화에 자신이 없어 지금껏 영어로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고 언니가 내게 고백한 건 대화가 어느정도 무르익었을 때였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언니는 한인 부동산을 통해 구한 아파트에 살고 있고, 그때까지는 연구소에 있는 한국 유학생들이나 교수들과만 어울리며 순두부찌개나 칼국수 같은 걸 사 먹었다고 했다. 언니는 영어권 나라를 방문해본 적이 없었고 영어권 나라는커녕 해외를 여행한 경험 자체가 매우 적은 듯했다. “가족끼리 패키지 여행으로 하이난 가본 거랑 학회로 연변에 가본 게 다야.”

“그럼 안 되지. 그렇게 한국 사람들하고만 어울리려면 뉴욕엔 뭐 하러 왔어?” 내가 그렇게 타박하듯 말하자 언니는 웃으면서 답했다.

“대학시절부터 친구들이 다들 어딘가로 떠났다 돌아오는 게 부럽더라고. 지금까지 못해본 것들이 꽤 많으니까, 이제라도 다 해보고 싶었어.”

그제야 언니가 해외 경험이 거의 없는 이유는 큰이모를 돌보는 데 전념했기 때문이었을 거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큰이모와 같이 여행을 다니기는 힘들었을 것이고, 친구와도 잘 나가 놀지 못했다던 언니로서는 큰이모를 두고 혼자 먼 곳을 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자 언니와는 다른 이유에서지만 대학시절 부모의 돈으로 쉽게 배낭여행을 가거나 어학연수생이 되어 떠나는 친구들을 부러워했던 마음이 떠올랐다. 언니의 심정이 아르바이트한 돈을 모아 호주로 워킹홀리데이를 갔던 내 심정과 비슷하다면 나는 언니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그날 까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허드슨리버파크를 거닐었다. 허드슨강 너머로 유리로 된 고층건물들이 초봄의 햇살을 받아 번쩍이고 있었다. 언니는 이제야 정말 뉴욕에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땐 나도 아직 반년밖에 뉴욕 생활을 하지 않은 처지였고, 에이전시 소속이라 시급이 정규 간호사보다 낮은데다 그나마 번 돈조차 초기 정착 비용으로 모조리 써서 뉴욕을 제대로 누릴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언니에게 지금껏 언니가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누리게 해주고 싶었다. 언니의 삶에 큰이모가 얼마나 많은 부분을 차지했는지 알고 있었고, 그런 큰이모를 잃은 걸 계기로 용기를 내 떠나왔으리라 생각하자 언니가 조금 안쓰러워져 도와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언니가 귀국할 때까지 십개월이 조금 넘도록 지속된 우리의 교류가 시작됐다. 그후 우리는 일주일에 한두번씩 만나 같이 미술관에 가거나 뮤지컬을 보았고 관광명소를 찾아다니며 시간을 보냈다. 언니에겐 돈이 있었고 주 3일밖에 근무를 않던 내겐 시간도 해보

  1. 카네꼬 미스즈 「나와 작은 새와 방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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