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목소리

 

 

사회적 책임과 공동체 정신

늦은 귀갓길에 한강을 지나면서 도시를 본다. 그렇게 정겹고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어둠과 탄식의 시대를 지나온 지식인들이 있었다. 저기 함선 옆으로 푸른 돛을 달고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꿈을 꾸었던 시대가 있었다.

지금은 잊고 사는 날이 많지만, 나에게 지식인은 때로는 생명이었고, 때로는 공동체였다. 1985년 깊고 검은 지하에서 진행되는 고문을 받을 때 그나마 무너지지 않을 힘을 주던 지식인은 생명을 포기할 수 없다는 마지막 자존과 관련된 말이다. 또한 1966년 김수영이 “지식인이라는 것은 인류의 문제를 자기처럼 생각하고 인류의 고민을 자기의 고민처럼 고민하는 것이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의 말이다. 그러나 세상은 변했고, 사람들은 많이 제 갈 길로 갔다. 나도 그중의 하나다. 그래도 지식인을 포기할 수는 없다. 그것마저 잃어버린다면 다 잃어버리는 것이 된다. 오래도록 중심이 되어온 것 안으로 들어가 안온하게 유지하면서 사는 일은 나의 태생이 아니며, 나는 낡은 것을 추슬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의 입장에 서왔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 비판의 입장에 선다는 것은 더 깊게 정제되고 더, 더 깊게 객관화된 사유를 필요로 한다. 편을 가르는 것이 그들이라면 진실과 선의를 제대로 세우는 것은 우리들이어야 한다.

『창작과비평』 2001년 여름호에서 김수영 선생의 산문과 설준규 교수의 문화평을 읽었다. 곁눈질로 챙겼던 통일과정에 대한 특집은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다.

설준규 교수의 글에서 꾸바 사람들을 본다. 콘트라베이스에서 흘러나오는 ‘부에나비스따 소셜 클럽’의 울림은 기나긴 삶의 여정과 닮아 있다. 나는 숨죽여 그들 꾸바 사람들을 보았으며, 그들의 눈가에 흐르는 지긋한 삶의 미련을 보았다. 그러나, 아무렇지도 않은, 상처도 아픔도 노래 안으로 바람처럼 먼지처럼 사라져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수영은 언제나 예사롭지 않다. 온몸에 날이 돋는다. 한번도 아무렇지 않았던 날이 없었으리라. 그의 글 「자유란 생명과 더불어」 「이 거룩한 속물들」은 칼날 위에 서 있다. 칼날 위에 서서도 나른하고 피곤한 안위를 잡고 서 있다. 먼저 자책하고 그러나 자학하지 않고, 비판하고 그러나 분명히하는, 녹슬지 않은 영혼이 살아숨쉰다. 생명이 살아숨쉰다. 그는 그가 예이츠에게서 본 ‘쉬운 싸움을 거부하는 사람의 불굴의 시심’을 갖고 있다. 그는 천생 지식인이다. 신경림 선생을 어느 자리에 모셨는데, 하시는 말씀이 “배 고프고 가슴 시리던 시절에 나이 어린 후배들 오면 없는 돈에 털털 털어서 밥 사주고, 술 사주고 한 게 다지요” 하셨다. 이것이 정답이다. 꾸바 사람들과 마포 어딘가에 살았을 한국의 김수영이 거기서 만난다. 사는 거 참 별것이지만, 사는 거 참 일순간에 별것 아니다. 김수영이 말한다. ‘더 큰 싸움, 더 큰 싸움, 더, 더, 큰 싸움’을. 그러나 허망하지 않고 정직한 싸움이다. 가끔 나는 『창비』가 낯설다는 생각을 한다. 『창비』가 오래도록 앞서의 싸움을 해줄 것을 부탁하고 싶다. 나 또한 사회적 책임과 공동체 정신의 기틀 위에서 살아갈 것임을 말씀드리고 싶다.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국회의원 김근태 gt21@gtcamp.or.kr

 

창비를 읽고 나서

창비의 정기구독자가 된 지도 여러 해째이다. 새로 도착한 계간지를 받아들 때면 마치 맛있기로 소문난 식당에 자리잡고 앉아 차림표를 받아드는 것처럼 느긋하니 입맛이 돈다.

가장 먼저 맛보는 것은 역시 소설이다. 직업상 ‘업계동향’을 파악하고 ‘현장감각’을 익히려고? 그것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이 소설 읽기를 좋아하는 소설 독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이 보이면 특히 반갑다. 솔직히 말해 가끔은 끝까지 읽을 만한 소설이 한편도 없어서 뽑기에서 ‘꽝’이 나온 기분일 때도 있는데, 지난 여름호의 소설은 모두 재미있었다.(꼭 내용이 재미있어서 ‘재미있다’고 하는 게 아니다. 이른바 문단이라는 곳에서는 ‘잘 썼다’ ‘좋은 작품이다’라고 확실한 의사표시를 하기보다는 ‘재미있더라’라는 다소 유보적인 표현으로 자기 기준의 여지를 남겨놓는 것 같아 나도 흉내내보았다.)

소설 다음으로 보는 것은 특집이다. 훑어보고 나니 왠지 서운한 느낌이 든다.

가장 흥미롭게 읽은 것은 새롭게 발굴한 김수영의 산문. 김수영 산문의 일상적이면서도 역동적인 문체와 비꼬면서 잘근잘근 씹어주는 논리의 재미는 구태여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과장된 자조의 반복과 늘상 동원되는 뻔한 일상사가 은근히 지겨운 점도 없지 않지만 ‘김수영 산문집’은 요즈음도 이따금 꺼내보게 되는 책이다. 60년대에 쓰인 다른 작가들의 산문과는 달리 내용과 형식 모두 구태의연하지가 않아 여전히 유효한 텍스트임에 틀림없다. 이번에 발굴한 산문 중 「이 거룩한 속물들」은 내가 좋아하는 역설적인 글쓰기 방식으로, 앉은자리에서 두 번을 읽었다. 매문(賣文)에 대한 경고는 그가 늘 주장해왔던 내용이다. 적극 수호해야 할 무슨 ‘거룩한’ 명예가 있지도 않은 나 같은 사람이 매문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 된 것은 김수영의 산문에 영향을 받은 바 있다. 그럼에도 “죽지 못해 하는 거지, 정도로 말은 하지.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만도 아닐걸…… 그런 것만도 아닐걸……” 하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나오는 한편 뜨끔, ‘거룩한 속물로서의 자기의식’을 확인해야 했다. “간판이 너무 많은 종로나 충무로 거리에서 간판이 하나도 보이지 않게 되기까지 더 간판을 늘려라. 하나님은 오늘날의 속물의 근절책으로 이 방법을 시험하고 있고, 어느정도 효과를 거두고 있는 것 같다.”─35년이 지난 지금에도 김수영이 제기한 문제의식과 비관이 그대로 몸으로 전해져온다.

그런데 내가 여름호를 마지막 장까지 한차례 훑어본 다음에 다시 중간 부분으로 돌아와 「이 거룩한 속물들」을 또 한번 읽었던 데는 이유가 있다. 고은 시인의 「미당 담론」 탓이다. 정확히 말하면 거기 인용된 다음 대목이 나를 도로 김수영 산문 속으로 이끌었다. “김수영은 미당을 체질적으로 싫어한 이유가 셋이었다. 하나는 그 토속성이 견딜 수 없다는 것, 둘은 그의 늘어지는 서정성이었고, 셋은 그의 반동성이 역겹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두 시인은 많은 점에서 대조적이다. 4·19 정신을 대표하는 시인은 매문에 신경질적인 자조의 태도를 보였고, 다른 한 시인은 ‘무오류성’에 자신을 두고 권력 속에서 스스로를 ‘천치’나 ‘죄인’처럼 놀게 내버려두었다. 한 시인이 도시의 소시민이라면 다른 시인은 질마재와 신라의 ‘떠돌이’이다. 한 시인은 잔디밭 가의 유치한 철책, 창경원의 오색찬란한 ‘물감 전등’ 따위에 소름이 끼친다며 네거리를 장식한 유치한 미화작업에서 꽃향기 대신 똥냄새를 맡는다. 한편 다른 시인은 ‘유치한 미화작업’에 동조해 이름을 새긴다.(최근 나는 무역센터에서 산업역군을 칭송하는 미당의 시가 새겨진 커다란 입석을 본 적이 있다.)

김수영의 산문과 고은의 평론으로 인해 내 마음속에 두 시인의 대비가 뚜렷해짐과 더불어 잡다한 생각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문학의 권능과 책무, 현실을 대하는 스케일과 자의식, 신이 선택한 시인, 문학이 가진 본질적인 부정 또는 저항의 속성,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의 해찰, 원고 마감이 촉박함, 장마철 옷장 속,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오오 그리하여,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소설가 은희경 silverpaper@chollian.net

 

내 혈육 같은 『창작과비평』

1977년 나는 친구의 권유로 『창작과비평』을 정기 구독하게 되었다. 창간 연도와 견주면 10년 이상 지각생이었지만 나는 책을 읽어가면서 내용의 진지함에 매료되고 군데군데에서 놀라움과 충격에 사로잡혔다. 그것은 나의 통념을 깨부수고 무지를 일깨워주며 그릇된 상식을 바로잡아주었다. 세상에 이런 책도 다 있었나! 잡지를 구독하면서 나는 ‘창비신서’에도 눈을 떠 『전환시대의 논리』 『분단시대의 역사인식』 『민족문학과 세계문학』 같은 책도 읽게 되었다. 이 무렵 나는 군산제일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있으면서 동료들과 가끔 독서 이야기도 나눴는데 이때 창비의 책들은 단연 우리의 관심과 화제의 중심에 서 있었다.

1979년 나는 직장을 KBS로 옮겨 유신독재의 몰락과 처절한 광주항쟁을 바라보며 무력감에 빠져 세월을 보내던 중, 1982년 11월 이른바 ‘오송회 사건’에 연루되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고 우여곡절 재판 끝에 징역형이 확정되었다. 혐의내용은 그해 4월 19일 군산제일고 교사 5명이 학교 뒷산에 모여 4·19 위령제를 지내며 군사정권을 비판한 것이 주된 빌미였고 나는 5년 전 이 학교에 재직할 당시 교사들과의 독서 이야기가 북한 및 국외 공산계열을 찬양 고무했다는 이유로 얽혀들었다. 범행의 증거라고는 아무것도 없이 강압과 고문으로 쥐어짜고 조작해낸 말뿐이며 검찰이 법정에 내놓은 증거물은 나한테서 압수한 『창작과비평』 43호에서 56호까지 14권과 그밖에 몇권의 책들이었다. 저들은 처음 내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나더러 『창작과비평』의 중국 관계 논문 등 여기저기에 수없이 많은 줄을 그어대도록 하여 기어이 영장을 받아냈다.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은 『창비』도 발행되지 않았다. 그보다 창비는 80년 여름호까지 내고 중단되었다가 내가 교도소에서 나온 85년 5월 이후에 가까스로 통권 57호가 나왔으니 나는 『창비』 없는 세상을 틈타 감옥에 갔다온 셈이었다. 나는 『창비』 57호부터 지금까지 한권도 빠짐없이 구독하며 정히 보관하고 있다. ‘창비신서’도 대개는 갖고 있다. 창비사에서 발간된 책이나 출판사 이름만 보아도 혈육 같은 정이 느껴진다. 이렇게 나는 창비 체질이 되었다. 나는 『창비』와 나의 관계를 억지로 끌어댔지만 우리 사회에는 오래 전부터 『창비』를 사랑하고 『창비』에서 감화감동을 받아 지적으로 성장한 분들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창비』의 한없는 발전을 빈다.

전북 중등여성교육원 부원장 조성용

 

논단에 실린 「차별과 연대」를 읽고

외국인 노동자? 우리도 겨우 한 세대 전에는 그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외국인 노동자’였다. 세계의 여기저기 값싼 노동력을 공급하던 때가 있었다. 그때 우리가 겪었던 설움을 엉뚱하게 배설하는 게 오늘의 외국인 노동자 문제는 아닌지. 사실 그 이유는 여러가지 분석이 가능하리라. 인종주의─그것도 흰 피부를 열망하는 노란 얼굴에 의한─적 요소가 없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차별받는 자가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복합차별”일 수도 있겠다. 제대로 근대를 경험하지 못한 우리 사회 구성원들 의식에 내재해 있는 전근대적인 ‘배타적 위계의식’의 산물일 수도 있으리라. 절름발이 신세를 면치 못한 우리 근현대사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체질처럼 굳어버린 열등감의 뒤집어진 표현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면 그 알량한 집단적 졸부근성은 아닐까. 어느 것이든, 아니면 이 모든 것의 복합이든 그것이 약한 자에 강하고 강한 자에 약한 비열함이며, 인간다운 품성을 갖춘 개인, 성숙한 사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저열함임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우리 내부에서 일어나는 타자에 대한 차별과 적대,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겪은 현대사의 온갖 질곡들, 4·3사건, 보도연맹사건, 거창양민학살사건을 비롯한 한국전쟁 기간에 일어난 많은 학살사건들, 광주민중항쟁, 갈수록 심화되어가는 듯한 지역차별…… 이 모든 것이 우리가 외국인 노동자들을 차별하는 개인적·집단적 심리기제와 얼마나 다른 것일까?

어떠한 형태의 차별도 정당하지 못하다. 차별은 차별당하는 자를 파괴하고 차별하는 자를 불구로 만든다. 차별의 층위와 종류가 다양하고 클수록 그 사회는 그만큼 더 병든 사회다.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냉대는 우리 사회가 치료가 필요한 병든 사회임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에 지나지 않는다. 『창비』의 임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우리 자신을 향한 분노와 성찰을 촉발하는 일이라면, 우리 사회의 환부를 진단하고 치유하는 일이라면 이제야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 주목하는 것은 그다지 빠른 대응은 아닌 듯하다. 늦으나마 관심을 기울이게 되어 다행으로 생각한다. 앞으로 『창비』를 통해 좀더 심도있는 논의가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아울러 이와 비슷한 우리 사회의 쟁점들을 총론 또는 원론이 아닌 구체적 각론 수준에서 적절한 싯점에서 다루어주길 바란다.

김천 직지사 승려 흥선  

 

창비문화기행을 다녀와서

나는 3월부터 황토 살림집을 짓기 시작하면서는 어떤 때는 한주일 내내 손바닥만한 우리 마을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은 때도 많았다. 기를 쓰고 이번 2차 창비문화기행에 끼워달라고 청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이렇게 지내다가는 올 한해 바깥공기 한번 못 마시고 넘기겠다 싶었던 것이다.

6월 2일 아침 현대백화점 야외주차장을 출발하여 김밥도시락을 하나씩 건네받고 보니 정말 여행간다는 실감이 났다. 작년 1차 문화기행에 참여했던 사람들로 구성된 ‘창우파’의 오상수님을 비롯하여 몇몇 분이 보였다. 전날 시골에서 상경한 나는 의자를 뒤로 젖히고 느긋하게 잠을 청했다. 다리도 쩍 벌리고 고개도 꺾고 침까지 흘리며 맘 푹 놓고 일상에서 온전히 벗어나버렸다.

수백년을 견디고 선 고택과 지금 당장의 푸른 산 맑은 물이 하나로 교차하는 병산서원을 시작으로 우리 일행은 발길 닿는 곳마다 유월의 물빛 싱그러움을 만났다. 이튿날에 간 봉화의 청량사는 특히 기억에 남는다. 빽빽하게 줄지어 선 청량산의 거대한 열두 암봉이 병풍처럼 가람을 에둘러 감싸고 있어 누가 보아도 금세 연꽃을 떠올리게 되는 이 험한 골짜기에 원효대사가 절을 지은 이유가 몸으로 느껴졌다. 높지 않은 등산길이 전날 밤 술에 전 몸을 일깨워주었고 가볍게 흘리게 된 땀방울은 ‘청량’사라 그런지 기분을 ‘청량’하게 하였다.

아쉬움. 어떤 이는 모든 일에 아쉬움을 후식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80% 이상을 채우지 말고 부족함을 온기로 남기라고 하였으니 돌아오는 길에 나 먼저 훌쩍 충청도 증평 부근에서 내린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같이 간 현기영 장석남 나희덕 선생님께서 손수 싸인해주신 책을 특별히(?) 간직하고 있다. 감히 읽지도 않고 장롱 속에 모셔두었다, 아직. 하하…… 창비 식구들의 수고와 봉사. 저 멀리 동해바다 울릉도, 남도 순천에서 참석한 열성. 엊그제 사진과 학위논문집을 보내주신 이규환님, 수시로 전화를 해주는 박윤옥님, 허우범님, 내가 전한 ‘풍경소리’를 곱게 받았던 잊혀진 이름의 사람 등등 문자로만 머물던 『창비』가 사람간의 따뜻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창비』가 되는 여행이었다. 첫날 밤에 있었던 『창비』에 대한 평가와 평소의 바람에 대한 토론은 창비를 더욱 두텁게 사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창비문화기행에 또 참여한다면 기억을 많이 하려 하기보다는 더 많이 느끼는 시간을 갖고 싶다.

전희식 nongju@dreamwiz.com

 

「미당 담론」을 읽고

고은 선생의 「미당 담론」으로 지상(紙上)이 요란한 것을 보고 인편으로 『창비』를 구해 단숨에 읽었다. 한마디로 절실한 글이었다. 결코 ‘옛 스승’을 고의로 비하하거나 인신공격을 하기 위한 글이 아니었고 정확한 분석과 큰 아픔을 가지고 쓴, 실로 고은 선생만이 쓸 수 있는 글이었다. 왜 이런 글이 비판을 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고은 선생은 세상이 아는 대로 예술지상주의에서 변신, 민족사의 살 아픈 현장에 뛰어들어 온몸으로 문학과 실천을 함께해 유신시대의 고초를 겪었고 ‘5·17의 군인들’에게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극한의 고통까지 이겨낸 우리시대의 순수와 열정이다. 감옥 안에서도 짓이겨진 몸으로 무서울 정도의 문학정진을 했고(고은 선생이 수감되어 있던 대구교도소의 어느 방에 나도 잠시 있었는데 그때 교도관에게서 들은 이야기이다), 그 민족사의 아픔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이 ‘고은 문학’일 것이다. 잠시 동안의 독일 침략 아래의 프랑스에서 이백자 원고지 여섯 장 정도의 친독행위가, 친독행위로 백만장자가 된 경제인의 5년 감옥살이와 달리 사형이 내려졌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지만 프랑스의 문학행위에 대하여 두는 크나큰 비중이 부럽고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진정!

부끄럽게도 우리 문학을 돌아보면 일제 이래로 독재의 긴 어둠속을 지나오면서 그 치욕스럽고 비굴했던 문학행위에 대하여 단 한번의 ‘역사적 반성’도 없지 않았던가! 자랑스러운 역사도 역사이지만 부끄러운 역사도 역사이다. 이것을 나는 “제12대 전두환 대통령 내외분이 기거했던 방입니다”라는 팻말이 서 있는, 그래서 ‘법당’이나 ‘만해기념관’보다 찾는 사람이 더 많은 이곳 백담사에서 더욱 절감하게 된다. 일방적인 찬양은 일방적인 매도와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일제 이래로 독재시대에 걸쳐 씌어진 ‘작품’들까지 두루 다 읽어볼 수 있어야 하겠고 『창비』에서 이 작업을 해주었으면 한다. 우리 역사와 우리 문학에 대한 왜곡이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백담사 만해기념관 김효사  

 

삶의 풍경을 따라가는 웅숭깊은 심안

여름호에 실린 여러 편의 시는 개별적인 작품으로도 손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도 조화를 이루는 개성 있는 작품들이 많았다. 시적 화자가 사물이나 대상을 바라보는 방식엔 물리적 시선뿐만 아니라 심안(心眼)이라는 것이 있는데, 작품 곳곳에서 발견되는 웅숭깊은 심안은 물리적 시선과 서로 대립하거나 길항하는 것이 아니라 시적 상승작용을 통해 시의 독특한 아우라를 형성하기도 한다. 특히 김진경의 「봄 나무」에서 “몸이 남아 있으므로 살아야 하는” 나무, 겨울을 나고 있는 나무는 “모든 것들의 감금과 슬픈 노동”으로 점철된 우리 육신의 슬픔을 보고 있다. 그 시선을 따라가면 기적 같은 희망인 “파랑새”가 신기루처럼 나타나기도 하는데, 삶의 덧없음 때문에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는 그저 담담하고 의연한 모습이다.      

이정훈 proust@hanimail.com

 

고은 시인의 서정주론을 읽고

『창작과비평』 112호를 받자마자 일부 신문에서 지면을 달군 논쟁을 읽었던 터라 고은 시인이 쓴 서정주론을 가장 먼저 읽었다. 죽은이에 대한 평가는 조심스러워야 한다는 데는 동의를 하지만 그러한 평가가 애정을 바탕으로 한다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미당의 시에 대한 사방의 찬사가 넘쳐나는 마당에 미당을 바르게 읽어내기 위한 반대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미당이 92년에 썼다는 「일본헌병 고 쌍놈의 새끼」와 전두환을 찬양한 「처음으로」 등을 읽으면서 미당에 대한 그리고 그의 시에 대한 애정어린 비판이 좀더 많아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은 시인의 글 속에서 그러한 비판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죽은이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그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추억에 바탕을 둔 생생한 평가가 쏟아져야 훗날의 올바른 평가를 위한 기초자료가 풍성해질 것이다. 이런 풍성한 자료를 통해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단의 거인을 바르게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무덤의 흙이 마르기도 전에 평가를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할 것이다.

미당의 생가를 문화재로 만들자는 일부의 의견에 따라 일을 추진하던 공무원이 반대에 부딪혀 고민중이라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워낙 양쪽으로 나뉜 의견이 조율될 조짐을 보이지 않아 사업을 도저히 진행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고은 시인의 문제제기가 미당에 대한 올바른 평가의 장이 열릴 수 있는 물꼬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서울시 도봉구 창2동 대우아파트

107동 206호 최경호

 

현장통신 「대안초등학교 리포트」를 읽고

시골의 작은 마을에서 읍으로 3년 전 시집오고 나서 그리운 것들을 모두 그곳에 두고 온 것처럼 가슴 한구석이 늘 허전하다. 어쩌다 구석 어딘가에 풀이 자라고 있으면 난 반가움에 거기로 달려가 살펴본다. 작은 시골에서 살 땐 곡식에게 방해되는 풀이라서 뽑아내던 것이 이곳에선 내 그리움을 자극하고 있다. 지금 세살인 아이의 눈은 무엇을 보나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다. 친정집에 가는 기회가 생기면 내가 듣고 보던 것을 얘기해준다. 그럴 땐 아이의 눈이 더 빛나는 것 같다. 현장통신에 나오는 대안초등학교 학생들은 기름진 흙에 작은 뿌리를 내린 어린 식물들일 것이다. 선생님과 부모님이 따사로운 햇살이라면 어린 새싹들이 잘 자랄 수 있게 단비를 내려주어야 하는 건 바로 사회와 국가이다. 대안초등학교를 학교로 인정하고 새싹들이 안심하고 자랄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점차 벽 없는 학교가 많아진다면 더 많은 학생들이 맑고 깨끗한 마음을 간직하며 바르게 자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글을 읽으며 하게 되었다. 우리 아이도 열린 마음 가질 수 있는 그런 학교엘 보내고 싶다.

충남 홍성군 광천읍 232 배윤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