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우리는 다시 깨어날 것이다. 그리고…

강성은 시집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

 

 

송종원 宋鐘元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우울을 애도하다」 등이 있음. renton13@hanmail.net

 

 

또 악화(惡化)의 조짐이 보인다. 이는 강성은(姜聖恩)의 시집을 읽을 때, 시의 첫 문장이 유발하는 느낌에 관한 말이다. 기이하게도 이 문장들은, 첫 문장이지만 첫 문장 같지 않다. 그녀의 첫 문장은 그것이 쓰이기 이전의 무엇을 환기한다. 무엇인가 강성은을 불가항력적으로 쓰게 만드는 것이 있다. 강성은의 저‘무엇’에 대해 말해보자.

강성은이 첫 문장을 적을 때, 그것은 거의 필연적으로 불길하고 위험한 이야기로 풀려나간다. 다시 말해 강성은의 시는 어디에선가 그녀의 기록 속으로 흘러들어온 악화에 충실하다. 악몽 같은 이미지를 쏟아놓으며 시인은 조용히 말한다. “엄마 오늘밤 우리의 악몽은/태어나지도 깨어나지도 않는 영원한 불길함입니다”(「양수 속에서」). “영원한 불길함”이라는 표현에 걸맞게 이 악화는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창비 2009)에서 충만한 절망을 끊임없이 불러일으킨다. 죽음은 또 한번의 죽음을 낳고(「서커스 천막 안에서」), 숲을 수색하던 수색대는 돌연 수색의 이유를 잊게 되며(「백년 동안의 휴식」), 여인들의 비명을 부르는 물레의 회전은 몇백년째 멈추지 않는다(「겨울밤」). 집요하다. 이 집요함이 시의 화자는 물론 독자들까지 악화를 부르는 밀폐된 공간 속으로 끌고들어간다.

연 구분을 잘 하지 않는 강성은 시의 호흡은 악화를 가중시키는 밀폐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필연적인 형식일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형식과 악몽의 이미지들로 인해 마침내 독자들이 시의 밀폐된 공간 속에 놓이게 되었을 때, 시인은 천연덕스럽게 다음과 같이 묻는다. “누가 너희를 이곳에 넣었니”(「누가 너희를 이곳에 넣었니」). 저 물음은 분명 독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 것이다. 밀폐된 공간으로의 유도는 시인이 적어놓은 이야기에 의한 것이지만, 이야기를 놓지 못하는 것은 독자들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옛날이야기 들려줄까”라는 시의 목소리를 경청했더니 어느 순간 그 이야기가 “매일 당신이 하는 이야기”(「세헤라자데」)가 되어버린 상황과도 같다.

무엇이 저같은 상황을 연출하는 것일까. 이는 아마도 작품을 이루는 시인의 말에 정해진‘목적’이 없기 때문인 것 같다. 악화로 향하는 길이 회복이나 치유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면 우리는 쉽게 중도하차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목적들은 우리에게 법의 지배하에 놓여 있다는 (불)쾌의 감정은 물론, 관습화가 유발하는 피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시인이 자신의 첫 말에 담긴 불길함에 아낌없이 충실할 때, 독자는 자기도 모르게 자꾸 상처가(를) 내는 길을 따라 걷게 된다. 시인이 행하는 무관심한‘순수 파괴’가 우리의 신체에 잠들어 있는 파괴력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그 파괴의 리듬에 전염되면서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숨겨놓았던 제 영혼의 모습과 만난다.

 

밤마다 그림자극을 보여주던 나뭇잎들이 그림자를 버리고

무대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림자를 주워모으려고 죽은 아이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무대 위로 올라가 쉼표로만 만들어진 음악을 연주했다

음악을 듣는 자들은 겨울잠을 잤다

-「테레민」 부분

 

‘테레민’은 독특한 연주법을 필요로 하는 악기의 이름이다. 이 악기는 두개의 고주파 발진기 사이의 간섭에 의해 생기는 소리를 악사가 허공에서 두 손으로 조율하여 연주하는데, 이 모습은 흡사 허공에서 음들이 생겨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특이한 연주법과 인용한 시의 이미지들은 강성은 시의 발생지점과 그 주변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밤마다 그림자극을 보여주던 나뭇잎들”의 판타지에 현혹되는 것은 우리에게 지식의 재현에 의해 파악되지 않는‘틈’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뭇잎의 그림자극에 빠져 있을 때, 우리의 눈앞에 드러나는 것은 나뭇잎이라기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지닌‘틈’이다.

‘무대 밖으로 뛰쳐나간 그림자들을 주워모으려고 죽은 아이들이 몰려든다’는 말은 우리에게도 우리의‘틈’이 상연될 무대가 필요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그 무대를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어른들의 세계로 표상되는 현실의 질서는 그‘틈’을 쉽사리 봉합하려 들기 때문이다. 자기의 바깥에 초월적이고 신성한 존재를 만들어 자신을 의탁하려는 대부분의 물신주의가 이 봉합에 봉사한다. 그러나 현실에 편입되기 위해 우리 스스로가 죽여야 했을 아이들(“죽은 아이들”)이 시에 귀환하는 것처럼 인간의‘틈’은 그렇게 현전하는 인간과 함께 부재의 형식으로 지금 여기에 있을 뿐이다. 어쩌면 시인이란 우리가 확보하기 힘든 저 무대를 자신의 시작(詩作) 활동을 통해 유지시켜주는 존재가 아닐까. 우리의 눈앞에 무대로 뛰어올라 사라진 나뭇잎을 대신하여 자신의‘틈’을 상연하는 시인이 보이지 않는가.

강성은이 보여주는 무대극은 실로 다채롭다. 여자들의 삶의 고통을 다루는 극(「얼음나라 여자들」)을 올리기도 하고, 사랑의 좌절에서 비롯된 비참(「12월」)을 상연하기도 한다. 끊기 힘든 가난의 고리(「가난」)나 가족 관계에 스민 원한(「가방 이야기」)을 극화할 때도 있고, 첨단도시의 신화적 면모를(「물속의 도시」) 노래하기도 한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의 고통을 상연하는 일보다 고통의 상연이 중지될까를 염려한다. 마치‘테레민’을 구성하는 두 고주파 발진기 사이의 관계처럼, 시인의 바람은 자신의 “비명이 리듬을 타고 울려퍼”져 극 “밖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합창하기 시작”(「성탄전야」)하는 일이며, 두 고주파 발진기 사이의 허공에 가득 찬 음들처럼 우리의 비명이 공중을 가득 메우는 일(「이상한 여름」)이다.

이를 위해 시인은‘잠’을 불러낸다. 우리 자신의 방어력을 약화시키는 잠의 무대는 우리의 고통을 끊임없이 상연하는 공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잠에 대해 이야기할 때, 강성은은 삶이 기억으로 인해 축소되기보다 망각으로 인해 확장되기를 바라는 듯하다. 그런데 이 망각의 꿈은 결코 쉽지도 달콤하지도 않다. 시인이 선언한 “영원한 불길함”이라는 표현에 비춰보자면, 망각의 꿈은 망각조차 잊힐 때에야 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시인 또한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녀는 “미궁 속에서”도 “우리는 오직 우리 자신을 껴안”고 “우리는 오직 우리 자신을 애무”(「양수 속에서」)한다고 적고 있다. 여기에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는 표현이 등장한 이유가 있다. 시인은 잠 또한 악화가 중지되는 순간이 아니라 계속 진행되는 방황의 상태임을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저 견고한 사실의 고리를 끊어낼 정념의 파괴력을 보여준다. 이제 처음으로 돌아가 남겨둔 질문, 무엇이 불가항력적으로 그녀를 쓰게 만드는지에 답해야 한다. 아마도 그‘무엇’은 다음과 같은 시인의 뜻이 아닐까. 우리가 잠이 든다면, 우리는 깨어날 것이다. 그 순간, 우리는 다시 위안 없는 삶의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자. 이것은 시인의 뜻이 아니다. 우리가 지닌 불멸하는 영혼의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