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김수이 金壽伊

문학평론가. 평론집 『풍경 속의 빈 곳』 『서정은 진화한다』 『쓸 수 있거나 쓸 수 없는』 등이 있음. whitesnow1@hanmail.net

 

김행숙 金杏淑

시인. 시집 『사춘기』 『이별의 능력』 『타인의 의미』 『에코의 초상』 『1914년』 등이 있음. fromtomu@hanmail.net

 

하성란 河成蘭

소설가. 소설집 『루빈의 술잔』 『옆집 여자』 『푸른수염의 첫번째 아내』 『웨하스』 『여름의 맛』, 장편 『식사의 즐거움』 『삿뽀로 여인숙』 『내 영화의 주인공』 『A』 등이 있음. rifleha@hanmail.net

 

 

왼쪽부터 김수이 하성란 김행숙 Ⓒ 김준연

왼쪽부터 김수이 하성란 김행숙 Ⓒ 김준연

 

 

하성란 지난호에 이어 김수이 평론가와 함께 문학초점을 맡은 소설가 하성란입니다. 오늘은 김행숙 시인이 함께 자리해주셨습니다. 여름호 준비를 하는 지금이 4월이어서인지 4월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데요, 마침 오늘 대화 나눌 작품들에서도 세월호참사에 관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여느 때보다 남다른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 자리에 왔습니다.

 

김수이 ‘4월은 잔인한 달’이라는 시구는 이제 세월호의 기억과 함께 떠오르는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갈 미래의 4월들이 ‘떠오르는 기억’과 함께 ‘떠오르는 진실’의 시간이 되기를 빌어봅니다.

 

김행숙 여섯권의 책을 가방에 넣어 오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묵직함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단지 가방의 물리적인 무게 때문만은 아니었겠죠. 혼자 읽은 책이 이 자리를 통과하면서 더 두툼해질 것 같습니다.

 

 

김희선 『골든 에이지』(문학동네)

 

184_443

하성란 김희선 소설집 『골든 에이지』부터 얘기 나눠볼까요. 김희선은 예전부터 기원에 대한 이야기를 다뤄왔어요. 수록작인 「공의 기원」을 읽고 ‘사실적인 뻥’이라고 말한 작가도 있는데요, 허무맹랑할 수 있는 전개를 통해서도 묵직한 울림을 남긴다는 점에서 이 시대를 향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월호참사(「골든 에이지」)와 아동 노동착취(「공의 기원」)는 물론 노벨문학상의 스웨덴 한림원(「18인의 노인들」)까지 시야가 넓습니다. 무엇보다 역사 속 무명의 삶을 살다 간 인물들을 이야기로 되살려내는 점이 좋았습니다. 이제 김희선에게 이야기가 되지 않을 이야기는 없어 보입니다.

 

김행숙 앞서 이미 두권의 책을 낸 작가인데, 저로서는 한국문학사에서 희귀하고 독자적인 방법론을 가진 한명의 소설가를 뒤늦게 발견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황당한 이야기들을 가로지르면서 이렇게 송곳처럼 현실의 폐부를 찌르다니, 감탄하며 읽었습니다. 그의 ‘방법론’에서 ‘기술’이라기보다는 작가적 ‘역량’에 가까운 어떤 것을 느꼈습니다. 김희선의 서사는 사방으로 ‘샛길들’을 발명합니다. 여러개의 버전으로 이야기는 증식하고 가지를 뻗어나가요. 그에게 진실은 하나의 ‘믿음’에 닻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믿음들’을 상대화하고 불투명하게 하면서 그 사이사이에서 감춰지는 듯 드러나는 방식으로 설핏 스쳐갑니다. 그는 기억을 통해 망각의 지층을 들여다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망각의 상상력을 통해 현실의 지위를 가진 고정된 기억의 못을 뽑아 출렁이게 하고 흐르게 합니다. 우리의 현실적인 기억, 말하자면 상징계라는 것이 실은 얼마나 허약한지를 「골든 에이지」는 잘 보여주지요. 여기에 나오는 “참 이상하지? 망각이라는 놈의 정체 말이야”(257면)라는 문장의 행간은, 기억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의 기억이 아니라 망각을 들여다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김수이 진실과 거짓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소설의 재미와 상상력, 독특한 서사 미학, 장르물과 SF의 감각, 사회적·역사적 문제의식 등을 고루 갖춘 작품이어서 즐겁게 빠져들어 읽었습니다. 홀로그램 우주, 과떼말라시티의 쓰레기산, 버뮤다 삼각지대의 공간이동 통로 등 소재들이 다양한데, 이것들이 단순히 소재가 아닌 알레고리로 기능하면서 소설의 층을 두텁게 합니다. 가령 「조각공원」의 살아 있으면서 죽어 있는 냉동인간들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에 대한 알레고리이기도 하죠. 김희선은 세월호와 같은 한국사회의 비극적인 문제와 함께 자본주의, 지구환경, 난민, 미래의 기술과 인간의 운명 등을 포괄한 인류 공동의 거대한 문제를 다채로운 알레고리로 농축하면서, 생존과 생계의 감각에서 대중적인 흥미까지 아우릅니다. 여러겹의 속살을 지닌 페이스트리처럼 풍성하고도 바삭한 느낌이에요. 젊은 작가들이 써나가는 새로운 서사의 부활에 대한 기대가 커졌습니다.

 

하성란

하성란

하성란 첫 소설집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그 집요함에 놀라게 됩니다. 한번쯤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릴 만도 한데, 납득이 되는 방법을 찾기보단 어떤 방법으로든 납득시키려 해왔다고 할까요. 「골든 에이지」를 발표 당시에 읽었을 때는 그 비극에 마음이 아프면서도 과학적인 이론들이 엉성하고 터무니없지 않나 생각했어요. 이번에 찬찬히 다시 읽으면서 예전에 들었던 의심이 사라졌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납득이 되고 만 거죠. 이 작가는 이런 시도를 통해 위로와 애도의 과정을 거쳐야 했구나, 느꼈습니다. 「골든 에이지」의 노인은 어느 한 시기를 되풀이해서 살게 되는데, 그날이 바로 4월 15일이에요. 그전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도 있지만 노인은 그 날짜를 택할 수밖에 없죠. 수학여행을 떠나면서 들뜨고 즐거워하는 손주의 시간도 중요하니까요. 그러면서 매일매일 선체험한 듯 눈물을 흘리게 되는데, 이 비극 앞에서 이야기의 구성을 위해 가져온 과학적 장치들이 무슨 소용이 있나 싶기도 했고요. 김희선의 소설에 믿음을 가지게 된 건 이 소설, 특히 작가가 선택한 4월 15일이라는 날짜였습니다.

 

김행숙 작가는 「골든 에이지」의 연도를 2028년으로 설정했어요. SF적인 시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2014년 4월 16일’이 망각의 지층으로 가라앉은 시간입니다. 그 망각의 연도를 찢고 ‘2014년 4월 16일’이 솟아날 때, 내가 사는 ‘지금 여기’의 기억과 망각의 지층이 강렬하게 진동한다고 느꼈어요.

 

김수이 4월 15일로 돌아가는 방식은 김행숙 시인의 시 「1914년 4월 16일」(『1914년』, 현대문학 2018)을 떠올리게 했어요. 그 시에서 얘기하는 방식과 통하는 측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두 작품이 말하는 것도 단순히 물리적인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정동이나 기억일 수 있고 실존의 문제일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것들을 포괄하는 새로운 시간개념이 우리가 애도하는 최상의 방식이 아닌가도 생각해보았습니다. 말하자면 ‘시간의 공동체’ 같은 것요.

 

김행숙 「공의 기원」은 김희선의 특장이 압축돼 있는 소설로 읽혔습니다. 미시사의 상상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이 소설은 ‘사실은 무엇인가’가 아니라 ‘사실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를 들여다보게 합니다. 이런 점에서 영국인 기자 앤더슨은 흥미로운 인물이지요. 난무하는 듯 보이지만 매우 정교하고 치밀하게 배치된 ‘이야기들’을 통해 개인과 국가, 한국사와 세계사,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어떻게 서로의 깨진 거울이 되는지를 순간적으로 ‘감지’한 듯한 기분, 저는 이 ‘기분’에 독자를 빠뜨리는 데 이 소설의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순간에 독자는 뭔가를 정말 알게 된 자가 아니라, 드디어 의문에 빠진 자, 뭔가 질문이 생긴 자가 됩니다.

 

하성란 「공의 기원」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장소뿐 아니라 시대까지도 건너뛰는 축구공의 이야기 아래 아동 노동착취를 다루고 있어요. 맨 처음 공을 발로 한번 툭 차본 소년의 설렘이 근현대사를 거쳐 힘있게 굴러오는데요, 하잘것없는 것들이 우리를 살게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그 작은 손으로 공을 만들지만 그 공을 가질 수는 없는,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얼굴과 겹쳐지면서 아프게 다가옵니다. 아까 했던 말을 조금 바꾸자면 사실적인 뻥이 아니라 뻥처럼 믿기지 않는 사실이랄까요.

 

김수이 김희선의 소설에서는 ‘아주 먼’ 만남들이 뜻밖에도 자주 이루어지는데요, 그 만남의 지점은 우리의 역사가 타자들의 역사와 얼마나 미세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일깨웁니다. 「공의 기원」에서는 한국인 소년과 영국인 기자가 조선에서 만나고, 「해변의 묘지」에서는 한국인 선원과 과떼말라인 형제가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서 만나죠. 김희선은 그동안 우리 문학이 근현대사를 다루어온 방식이, 세계사에서 타자의 맥락을 분절하고 도려내는 것은 아니었나 질문합니다. 그 이야기들이 황당해 보이는 것은 그동안 한국문학의 문법이 이러한 범주를 ‘낯선 것’으로 만들어온 탓도 있어요.

 

김행숙 「18인의 노인들」은 문학제도 속에서 문학이라는 것이 다루어지는 방식을 기묘하고도 풍자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에요. 일례로, 한림원의 원탁 중앙에 놓여 있는 항아리는(소설의 설정에 따르면 이 안에 든 제비를 뽑는 것으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결정되니까 꽤 중요한 오브제일 텐데) “판에게 강간당하는 님프들이 부조로 새겨져 있고, 포도덩굴이 그 위와 아래를 빙 둘러싸고 있는 고풍스러운 모양”(89면)으로 묘사됩니다. 그 부분을 작가는 크로키처럼 재빠르게 쓱 그려놓고 지나가지만, 유구한 문학 전통 안에 흐르는 기울어진 젠더의식을 풍자하는 거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