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이경재 李京在

문학평론가. 저서 『재현의 현재』 『한국 현대문학의 공간과 장소』 『촛불과 등대 사이에서 쓰다』 등이 있음.

ssmart1@hanmail.net

 

이영광 李永光

시인.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 『그늘과 사귀다』 『아픈 천국』 『나무는 간다』 『끝없는 사람』 등이 있음.

leeglor@hanmail.net

 

황정아 黃靜雅

문학평론가. 저서 『개념 비평의 인문학』, 편서 『다시 소설이론을 읽는다』 등이 있음.

jhwang612@hanmail.net

 

왼쪽부터 이경재 황정아 이영광 ⓒ신나라

왼쪽부터 이경재 황정아 이영광 ⓒ신나라

 

 

황정아 지난호에 이어 문학초점 진행을 맡은 황정아입니다. 이영광 시인도 다시 함께해주셨고요. 이번호에는 이경재 문학평론가를 초대해서 함께 얘기 나눠보려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이영광 가을빛이 완연합니다. 한참 만이군요. 반갑습니다.

 

이경재 안녕하세요? 문학평론 쓰는 이경재입니다. 귀한 자리에 불러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손보미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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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아 이번호에도 다양한 작품들을 골라봤는데, 먼저 손보미 소설집 『우아한 밤과 고양이들』로 시작해볼까 합니다. 손보미는 자기 스타일이 확실하고, 또 그것을 세련되게 구사하는 작가죠. 스타일이라는 게 어차피 인공적이지만, 손보미는 그 인공성을 의식적으로 표면에 드러냅니다. 번역투라는 지적도 많은데, 실제로 한국어에서는 생략 가능한 대명사를 꼬박꼬박 써준다든가, 묘사할 때도 호흡을 한숨씩 늦추면서 꼬박꼬박 옮긴 듯한 문장이 눈에 띕니다. 즉각적인 스토리의 정동이 요구하는 대로 쓴다기보다, 한번 걸러져 완성된 느낌이랄까요. 저는 이것을 ‘쌀롱체’라고 부르고 싶은데요, 마치 지난 세기 서구 부르주아 계층의 삶을 묘사하는 데 적당할 것 같아요. 그런 문체로 지금 이곳의 일들을 묘사하는 의도나 효과를 해명하는 것이 손보미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두분은 어떻게 보셨는지요.

 

이경재 저는 ‘대관람차’라는 소재가 인상적이었어요. 필연성은 없지만 세편에 대관람차가 등장하면서(「대관람차」 「임시교사」 「몬순」) 독자가 소설을 읽는 방향을 일정하게 제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한국에는 도심에 설치된 대관람차가 잘 없어요. 소설을 읽으면 자연스럽게 현실과 관련 짓기 마련인데 대관람차를 딱 등장시키면서 이건 현실 얘기가 아니야, 재현의 문법으로 읽으면 안 돼, 하고 지침을 주는 것 같았습니다. 또 이 대관람차에서의 시선은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도 통합니다. 대관람차가 천천히 돌면서 다른 풍경, 다른 세상의 모습을 볼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한계가 지어진 시각이죠. 현실의 밑바탕이라 할 토대나 이면 같은 건 절대 볼 수 없고, 제한된 풍경들만 볼 수 있잖아요. 손보미의 글쓰기도 현실의 토대랄까, 그런 쪽으로는 절대 가지 않으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영광 저도 문장을 보고 번역투에 가깝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거기에 묘한 매력이 있기도 했고요. 서술 속도가 굉장히 빠른데, 긴 시간을 다루는 소설이 많아서 그런 듯합니다. 「대관람차」도 이십년 이상의 시간을 다루고, 「임시교사」나 「고귀한 혈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때문인지 대체로 삶의 아이러니가 느껴졌어요. 방금 이경재 평론가께서 현실에 대한 제한된 시각이라고 했는데, 달리 말하면 손보미 소설에는 현실과 비현실, 사실과 비사실을 연결 짓거나 아우르는 세계 인식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를테면 「죽은 사람(들)」 「상자 사나이」 「고양이의 보은」이 그랬어요. 만나기 어려운 사실과 비사실이 하나로 합쳐져 이뤄진 세계이고, 동화적 모티프가 가미되어 색다른 리얼리티를 산출해낸달까요.

 

황정아 스타일의 효과와 관련해서 「임시교사」도 상당히 재밌게 봤습니다. 중심인물을 ‘P부인’이라고 칭하는 것도 흥미로웠어요. 호칭 자체가 지금 우리가 사는 공간이 아니란 느낌을 주잖아요.

 

이경재 한국에서는 1920년대 근대소설이 정착할 때 그런 표현을 많이 썼을 겁니다.

 

황정아 그런데 내용적으로는 지금의 현실과 상당히 밀착해 있습니다. 이 소설은 임시교사가 나이 들어 직장에서 잘리고 상류층의 보모가 되는 이야기인데, 그 사연을 독특한 방식으로 전개합니다. P부인은 서구소설에 나오는, 부르주아의 아이를 돌보는 몰락한 귀족의 느낌으로 그려집니다. P부인 자신도 스스로를 그렇게 인식한다는 게 「임시교사」의 독특한 면이에요. 자체 필터링이랄까요. 자기가 처한 현실에 거리를 두면서 그걸 마치 매끈한 스토리상의 사건으로 바라보는 거죠. 그러니까 소설의 문체가 P부인의 자기인식 방식을 고스란히 되비쳐주면서 거기 담긴 허위의식을 드러내는데, 이 덕분에 효과적으로 아이러니가 만들어졌어요.

 

이경재 말씀하셨듯 「임시교사」의 소재는 지금 현실을 다루기에 적합합니다. “그녀는 ‘정식’교사가 되기 위한 시험을 계속 준비했어야 했다”(116면) 같은 대목에서 젊은 시절에는 비정규직 교사로, 현재는 보모로 일하는 삶에 대한 깊은 회한과 그와 연루된 사회적 현실이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그러나 곧 “사는 건 그런 거지”(117면)라며 그러한 문제의식을 무화시키고 맙니다. P부인은 실제로는 보모임에도 자신이 젊은 부부의 집에 초대된 귀한 손님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렇다고 이 작품이 P부인에 대한 비판이나 풍자를 겨냥한 것으로 읽히지는 않습니다. 손보미는 현실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이 세상은 기본적으로 알 수 없는 것이라는 결정론적인 입장에 서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건이나 인물의 수수께끼 같은 면모가 노출되고, 해답이 주어지는 듯하지만 결국 그 답도 또 하나의 수수께끼에 불과하다는 식의 서사 전개가 많아요. 현실의 불가해함을 분위기 있고 세련되게 다루는 것이야말로 작품의 핵심 같아요.

 

이영광 「임시교사」에서 P부인이 아이러니를 지니는 건 임시교사라는 신분과 교사라는 직능, 그 사이의 거리를 실제적으로 해결해서라기보다는 해결 이전의 차원에서 하나로 뭉뚱그린 인물이기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P부인이 설거지통에 덩그러니 넣어둔 찻잔을 바라보았다”(115면)는 대목으로 보아 마지막에는 P부인이 정상적으로 일할 만큼 정신이 온전치 못해 해고되는 걸로 보이는데요. 긴 시간에 걸쳐 자기 내면의 아이러니를 지녀온 사람이 결국은 자기가 돌보던 집의 시어머니와 비슷한 병에 걸리는 것으로 귀결된다는 설정 자체도 어떤 아이러니에 닿아 있어요.

 

황정아

황정아

황정아 저는 알츠하이머는 아니고 단순 실수로 봤어요. P부인이 처음에는 ‘교사’로서의 품위를 유지하려 하고 그 가족의 삶에 너무 친밀하게 들어가 가사도우미처럼 되진 않으려고 애썼잖아요. 하지만 어느새 깊이 관여하게 돼버리는데, P부인은 그걸 또 진짜 가족이 되었다는 식으로 느끼죠. 그래서 피고용인이라는 선을 살짝 넘어버린 결과가 그 찻잔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관람차」는 어떤 의미에서 「고귀한 혈통」과 「임시교사」의 어름에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삶이 불만스럽고 “이런 삶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일까 봐 두려”(40면)워하던 인물이 성공적으로 상류층에 진입하는 얘기인데, 그 사람이 아들을 대하는 태도, 육아를 끔찍해하는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그게 여배우 P를 향한 일종의 선망과 정확히 대비됩니다. P부인과 유사하게 삶의 구체적 물질성과 거기 수반되는 울퉁불퉁하고 질척한 것들을 외면하려는 욕망이 있는 거죠. 그러다 결국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아내의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53면)다고 마무리되는데, 여기에도 어느 정도 아이러니가 있어요. 아무 일도 확실히 일어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삶이 된다는 게 말이죠.

 

이경재 「무단 침입한 고양이들」은 짧은 소설인데 작가의 소설관을 피력한 서문으로 읽었어요.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사실은 전혀 당연하지 않음을 확인하는 이야기잖아요. 손보미 소설의 겨냥점도 평범하고 안정되어 보이는 삶 이면에 놓인 빈틈 같은 것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낯선 기호가 갑자기 일상에 침입해 들어옴으로써 서사가 시작되는 방식이죠. 정영문 작가를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이영광 「몬순」은 마치 줄거리를 기술한 듯한 속도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발레를 그만 둔 주인공이 결혼해서 신혼여행을 가는데 몬순의 영향 때문에 고생하고 남편과 갈등도 빚고요. 뒷부분에서는 그래도 돌아가면 어떻게 해야겠다, 무난하게 살아가겠다는 결심 같은 걸 피력하다가 거꾸로 되잖아요. 울잖아요. 이런 걸 보면 하고 싶지만 할 수 없었던 이야기, 자신도 몰랐던 마음을 진실의 피할 수 없는 공격에 의해 토하고 마는 이야기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결말이 인상적이어서 이런 게 소설이겠구나, 싶었습니다.

 

황정아 「대관람차」에서도 화자가 끔찍한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에 시달리고 「임시교사」의 P부인도 울컥 불안감을 느끼고, 「산책」에 나오는 여자도 어떤 히스테리를 보이죠. 매끄럽게 줄거리만 잘 진술해도 될 것 같은 삶을 살고 싶지만 불쑥불쑥 새어나오는 감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기 때문에 스타일의 매끄러움이 갖는 효과가 더 돋보인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나의 프레임이 되었달까요. 불안이든 눈물이든 그 프레임을 깨지는 않죠. 또 사실 불안이나 눈물이라는 게 생각보다 전복적이지도 않고요. 어쨌든 스타일 자체가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는 정동을 미리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는 보수적인 서사라고 생각합니다. 아이러니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본격적으로 스타일을 내파하는 서사가 기다려집니다.

 

 

정이현 『알지 못하는 모든 신들에게』(현대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