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서유미

서유미 徐柳美

1975년 서울 출생. 2007년 문학수첩 작가상으로 등단. 장편소설 『판타스틱 개미지옥』이 있으며, 『쿨하게 한걸음』으로 제1회 창비장편소설상을 수상함. kanghansae75@hanmail.net

 

 

 

3개의 식탁, 3개의 담배

 

 

현관문 앞에는 나와 똑같이 생긴‘그것’이 서 있었다.‘그것’과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현관문을 사이에 두고‘그것’과 나는 한참 동안 그렇게 서 있었다.

 

화장을 안 지우고 잤더니 피부가 엉망이다. 번들거리는 뺨에 클렌징 크림을 찍어 바르고 문질러보지만 업무와 회식이 만들어낸 고단함은 잘 지워지지 않는다. 양치를 하는 동안 머리를 감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시간을 확인하고 포기해버렸다.

일분 차이로 출근카드에는 지각 표시가 찍힌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머리를 감고 나올걸. 한 방향으로 뭉친 앞머리는 불 꺼진 판 위에 남은 삼겹살처럼 뻣뻣하고 기름지다. 손으로 앞머리를 흩으면서 지각 표시를 셌다. 오늘 지각 때문에 다음달 월차는 못 쓰게 됐다. 개봉하는 애니메이션을 보러 가자고 아이와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는데. 이번에도 어기면 아빠한테 보내달라고, 아빠랑 살 거라고 울며불며 떼를 쓸 게 분명하다. 이제는 어디를 건드려야 엄마가 반응하는지 다 알고 있다.

어제, 회식자리에서 1차만 마치고 잽싸게 빠져나왔는데도 집에 도착하니 새벽 한시였다. 택시는 끔찍하게 안 잡혔고 장거리 손님을 태우지 못한 기사는 운전 내내 구시렁거리며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말이 회식이지 같이 일하던 웹디자이너가 잘리다시피 그만두는 거라 분위기도 좋지 않았다. 웬만하면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싶었는데 아이와 동생이 삼십분 간격으로 전화를 해대는 통에 진득하게 이야기도 나누지 못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이는 자다가 깼는지 그때까지 안 잔 건지 잠투정을 부리며 징징거렸다.

“엄마. 나 숙제, 그림 숙제.”

아이가 들고 흔드는 알림장을 확인하니 과연 붉은 글자로 엄마와 함께 얼굴 그리기,라고 씌어 있었다. 그 글자를 보자 꾹꾹 눌러두었던 피곤이 확 퍼져나갔다. 어린이집에서 데려와서 열두시까지 봐주는 조건으로 삼만원을 주기로 했더니 동생년은 숙제도 안 봐주고 날라버렸다.

“이모한테 좀 해달라고 하지.”

“선생님이 엄마랑 하라고 했단 말이야.”

“이모랑 하면 어때. 엄마 힘든데. 숙제는 이모랑 해도 괜찮아.”

“그런 게 어딨어? 엄마랑 하는 건데. 이모가 엄마야?”

아이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소리를 빽 질렀다. 그 말에 뜨끔해서 옷도 못 갈아입고 바로 스케치북을 폈다. 막상 크레파스를 손에 쥐자 아이는 꾸벅꾸벅 졸았다. 눈이 감기는 아이를 어르고 달래서 그림을 대충 완성하고 나니 새벽 두시가 되었다. 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겨우 옷을 갈아입으면서, 이대로 침대에 쓰러져서 영원히 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 순간에는 굳게 닫힌 클렌징 크림의 뚜껑을 열어서 화장을 지우는 일이 지구를 구하는 것보다 어렵게 느껴졌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옆자리의 구는 벌써 모닝커피를 마시고 있다. 회식자리에 끝까지 남아 있었을 텐데 얼굴이 쌩쌩하다. 화장한 피부도 촉촉하고 새로 말고 온 머리도 컬이 탱글탱글한 게 활기차 보인다. 그 전날 무슨 일이 있었다고 해도 다음날 아침에는 머리와 화장, 옷까지 완벽하게 쎄팅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아 있는 게 구만의 능력이다. 함께 일하는 동안 화장 안한 얼굴은 물론이고 화장이 들뜬 모습조차 본 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생일과 기념일에 꽃바구니와 케이크를 배달시키는 지극정성 애인 말고도 뭇 남자들의 대시가 끊이질 않는다.

“선배. 얼굴이 왜 그래?”

“어. 좀 피곤해서.”

“아무리 피곤해도 그렇지. 화장은 좀 하고 다녀. 서른 넘으면 화장하는 게 예의거든.”

“너도 혼자 애 키워봐라. 그게 말처럼 쉬운가.”

“요즘 일 잘하고 애 잘 키우고 자기관리 끝내주게 하는 씽글맘들도 얼마나 많은데. 선배도 생각을 좀 바꿔봐.”

빈정거리는 구의 말을 뒤로하고 커피부터 탔다. 진하고 단 커피가 필요했다.

출근하려고 공동 현관문을 나서는데 우편함에 흰 봉투가 꽂혀 있는 게 보였다. 매끈매끈하게 코팅된 봉투는 자신이 청첩장임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전 남편의 이름은 희귀 성(姓)을 가진 여자의 이름 위에 씌어 있었다. 예식일은 한달 뒤 토요일 오후 세시. 청첩장은 적당한 때 도착했으나 자신의 딸을 키우는 전처에게 알려주는 재혼 소식치고는 좀 늦은 감이 있었다. 여러모로 피로가 가중되는 아침이었다.

커피를 한모금 마시자 폐차 직전의 자동차에 겨우 시동이 걸렸다. 이대로 얼마나 달릴 수 있을지, 불시에 확 퍼지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웠지만, 오늘 하루 정도는 버텨내겠지 싶었다.

웹마스터와 구는 만들어 쓰는 화장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방부제 걱정도 없고 나한테 딱 맞는 화장품을 쓸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 웰빙이 대세잖아. 만들어서 선물했는데 다들 좋아하더라고. 화장 지우는 것도 귀찮아서 쩔쩔매는 신세다 보니 스킨과 크림을 만들어 바른다는 그들의 취미가 몹시 생소했다. 그게 화장품이어서가 아니라 생산적인 취미를 즐길 수 있는 에너지가 남아 있다는 게 신기했다.

“구. 혹시 보약 같은 거 먹어?”

“보약은 무슨. 선배 나 아직 젊거든.”

“그러지 말고 몸에 좋은 거 있으면 소개 좀 해봐.”

“아무것도 안 먹는다니까. 내가 사무실에서 뭐 먹는 거 봤어?”

“그런데 왜 그렇게 쌩쌩해?”

“내가 뭘 쌩쌩해. 에너자이저는 저기 따로 있는데.”

구의 턱짓에 간부회의를 마친 홍이 회의실 문을 열고 나왔다. 오늘은 재킷 위에 씰크 스카프를 두른 차림이다.‘성공하는 그녀를 위한 스타일’같은 제목의 화보에서 바로 튀어나온 듯한 모습이다. 그녀의 등장과 함께 느슨했던 커피타임이 오전업무 모드로 신속하게 전환되었다.

구뿐 아니라 모두가 인정하는 에너자이저. 가장 일찍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는데다 주말에도 나와서 서너시간씩 일하는 워커홀릭. 그 와중에 친구와 인터넷 쇼핑몰을 운영해서 월 천만원의 매출까지 올린다고 하니, 슈퍼히어로 수준의 에너지를 보유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오죽하면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한다고 별명이 홍길동일까. 공과 사의 구별이 명확해서 인간미가 없다는 평이 있지만 디자인 감각이 뛰어난데다 통솔력까지 갖춰서 통합디자인팀의 팀장으로 거론되고 있다. 빈틈없는 스타일에 눈빛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카리스마까지, 그녀만한 적임자도 없을 것이다. 나와 동갑이지만 사회적 지위나 재력 쪽은 그녀가 훨씬 어른스럽고 신체나 피부 나이 같은 건 내가 이모뻘쯤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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