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경위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는 제21회 백석문학상 예심위원으로 김나영 장철문 2인을, 본심위원으로 김승희 박철 이시영 3인을 위촉하고 심사를 진행하였다. 심사규정에 따라 최근 2년간 출간된 시집들을 예심에서 검토한 결과와 본심위원의 추천을 통해 아래 총 12권의 시집이 본심에 올랐다.

고영민 『봄의 정치』, 김중일 『가슴에서 사슴까지』, 나희덕 『파일명 서정시』, 박소란 『한 사람의 닫힌 문』, 박준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송재학 『슬프다 풀 끗혜 이슬』, 신휘 『꽃이라는 말이 있다』, 유희경 『우리에게 잠시 신이었던』, 이경림 『급! 고독』, 이영광 『끝없는 사람』, 이은규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장정일 『눈 속의 구조대』(가나다순).

본심은 10월 31일에 진행되었는데, 모든 후보작이 저마다의 확실한 개성과 뛰어난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 심사진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오랜 독후감과 긴 토론이 있었으나 수상작을 꼽는 데에는 이견 없이 한 목소리를 모아 나희덕 시집 『파일명 서정시』(창비 2018)로 결정했다.

『파일명 서정시』는 감시와 착취, 죽음과 절망이 도처에 존재하는 시대현실과 정면으로 맞서는 시집으로, 시인의 의식과 결기, 언어 모두가 예리하게 벼려지면서 시인 자신의 놀라운 시적 갱신이 이룩되었음은 물론 리얼리즘 시의 저력과 새로움을 함께 확인시켜주었다고 평가되어 올해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심사평

 

김승희(金勝熙) 시인

본심에 올라온 시집 중 먼저 집중 독해 대상으로 이영광의 『끝없는 사람』, 장정일의 『눈 속의 구조대』, 박준의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 나희덕의 『파일명 서정시』 네권을 선정하였다. 동시대 시인의 시를 읽을 때의 기쁨은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해할 수 없는 미궁의 혼란이 시인의 언어를 통해서 동시대성의 일그러진 얼굴을 제각기 형상화해가는 것을 확인하면서 공감의 전율을 나누는 데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네권의 시집은 시궁창 같은 시대에 힘겹게 샘솟는 삶의 숨결로서의 글쓰기라고 생각한다.

이영광의 『끝없는 사람』은 시사성(時事性)이 강하면서도 근원적 인간 실존에 얽힌 비극성을 역설의 언어로 노래한다. 시인으로서 그의 힘은 패배를 노래할 때도 패배주의에 빠지지 않고 허무를 노래할 때도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 아슬아슬한 역설의 현대성에 있다. 그의 시에는 반전이 있고 그 역동적 반전이 허무나 패배로 완전히 침몰하는 것을 막아주는데 거기에 역설과 풍자와 반어가 작용한다. 예전의 시들에 비해 감정과잉인 면이 있어 절제되었으면 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장정일이 28년 만에 출간한 시집 『눈 속의 구조대』는 동시대 쓰레기들의 쓰레기성(性)을 위악을 통해 끝까지 보여주는 잔혹 미학을 펼친다. 추악함의 그로테스크, 소위 비체(The Abject)라는 것들의 총집합을 통해 우리 시대 미궁의 시궁창을 냉혹하게 보여준다. 이 더럽고 비천한 것들의 절망과 오욕은 권력관계 안에서 발생하며 인간은 구원도 승화도 없는 막다른 세계 속에 유폐되어 있다는 것을 그로테스크한 시적 정황과 강력한 풍자의 언어를 통해 잘 보여준다. 지나친 비속어의 위악적 남용이 독서를 힘들게 하기도 했다.

박준의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는 서정시의 품격이 느껴지는 아름다운 시들이다. 그는 늘 상실에 관한 불안한 떨림을 노래하는데, 수동적 자아의 내파하는 아름다움이 단정적이지 않은 애매한 화법에 실려 오묘한 서정의 경지를 이루고 있다. 아직 젊은 시인이니 좀더 지켜보자는 의견이 있었다.

수상작으로 선정된 나희덕의 『파일명 서정시』는 정치에 억압된 세계에서 서정시를 불온한 것으로 규정하려는 폭력을 폭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무거운 정치적 폭력은 시인을 구속할 수 있지만 결국 시를 구속하지는 못하며 그러한 파일 속의 서정시를 건져내려는 노력이 시적 저항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번 시집은 시인이 늘 발화하던 능숙하고 미끈한 자연스러운 서정시에서 모더니즘적 단절과 터치가 들어간 형식의 변화가 보인다는 의견이 있었다. 그리고 개인적 죽음, 사회적 죽음 등 시대에 만연한 죽음에 대한 노래들이 편재하고 있어서 이 시대가 죽음의 시대이고 시인의 역할은 애도하는 것이라는 순정한 입장의 충실성을 새로운 언어로 잘 보여주고 있다. 수상을 축하드린다.

 

박철(朴哲) 시인

일상적으로 가볍게 시를 읽을 때와 어떤 평가를 전제로 시를 읽을 때는 확실히 그 체감온도가 다르다. 이 곤혹스러움은 조금 더 깊이 다가서야 하는 번거로움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보이지 않던 구체성과 미학이 한꺼번에 밀려올 때 느끼는 즐거운 비명과도 같다.

이는 물론 좋은 시들이 많다는 반가움에 좀더 꼼꼼히 읽을 필요성을 갖게 되는 경우다. 본심에 올라온 시집 가운데 심도있는 논의를 위해 네권을 선했지만 다시 되돌아가며 얘기가 길어진 것도 좋은 시들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보통 시인이 시집을 한권 엮으려면 삼사년 이상의 노고가 필요한데, 그러다보니 한 시집 안에 얘기와 주제가 중복되는 경우가 있고 시가 마음에 드는데 비슷한 얘기라고 해서 빼긴 곤란한 것. 또한 동시대를 사는 시인들의 시집을 한자리에 모으면 다시 비슷한 정서를 보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죽음에 대한 성찰, 모순어법, 산문시 등도 이즈음 시인들이 공통적으로 또는 다소 시차를 두고 집중하는 문제들이었다. 그리고 본심에 올라온 시집은 크게 보면 기왕의 성과를 인정받고 높게 상찬받아온 시인들의 시집과, 중견에 들어선 조금 아랫세대의 뚜렷한 약진이 보이는 시집들로 나눌 수 있다. 이 뚜렷한 구분 앞에 보통 새로운 세대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것이 심사위원들의 상례인데 이런 상황에서 오는 역차별 역시 평자들이 경계해야 할 부분으로 보인다. 일단 어떤 선입견을 제하고 있는 그대로의 시를 바라보고자 애썼다.

장정일의 『눈 속의 구조대』는 그의 시단 복귀 자체로도 의미있는 일이다. 얼마 만의 귀환이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이미 칼럼니스트로 확고한 필치를 보인 그의 시가 어떤 모습일지 개인적으로 궁금하기도 했다. 28년 만의 신작 시집이라지만 우리 사회에 역설과 냉소로 가해지는 메스는 여전히 날카롭고 신선했다. 예전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지만, 그 나름의 개성적인 문법과 시선은 우리 시문학의 한 가치로 평가해도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인다. 박준의 『우리가 함께 장마를 볼 수도 있겠습니다』는 첫 시집에서 보인 다소 모호하고 난해한 면이 완전히 해소된 뛰어난 성과물이라 할 수 있다. 모호하고 난해하다는 점 자체가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전에 부분적으로 보이던 느슨함을 평어체와 구어체, 시제, 이미지의 다양성으로 대체함으로써 우선 쉽고, 깊게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우리 서정시의 뚜렷한 진일보를 볼 수 있어 기뻤다. 나희덕의 『파일명 서정시』 역시 도처에 죽음이 즐비하다. 그의 시에서 비애의 정서가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동안 소품으로서의 죽음과 절망 위에 맑은 충만과 희망이 덧씌워져 있었다면 이번 시집에선 죽음을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의지가 처절하다. 공적 죽음과 사적 죽음을 보편적 비극으로 이끌어 올림으로써 직관에 기대 미끈해서 가볍던 서정시의 한계도 불식시켰다. 더불어 심사자가 가장 높이 평가한 점은 그간의 성과와 찬사에 머무르지 않고 결코 후퇴를 용납지 않으려는 듯한 강한 결기와 각오가 확고하다는 것이었다.

백석 문학엔 빛과 영광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백석은 역사의 굴곡을 온몸에 휘감으며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초지일관의 행운과 책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깨우치게도 한다. 나희덕이 이번 시집에서 보인 한층 완고해진 각오가 백석 시정신에 부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시영(李時英) 시인

놈 촘스키는 최근 펴낸 대담집 『세계는 들끓는다』(창비 2019)에서 쿠르드족의 유명한 경구를 우리에게 소개한다. “우리의 유일한 친구는 산이다.”(96면) 근대국가체제를 갖지 못한 채 터키와 이라크, 시리아, 이란 등지에 흩어져 일상적 ‘전시상태’를 살고 있는 그들로서는 미국도 서구도 진정한 친구는 아니었다. 오로지 자연인 ‘산’만이 그들의 유일한 의지처!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서정시가 씌어지는 한 이유이다.

바로 그 아우슈비츠를 호명한 나희덕의 「괴테의 떡갈나무」도 그중의 한 예. “그들은 수용소의 나무를 다 베어버렸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신의 숲에서 떡갈나무를 베어낸 죄로/연옥에 가는 것이 두려”워 “생산적으로 파괴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막사 옆에” 이 나무만 남겨놓은 채 “머리카락으로 짠 카펫 위에서/인피로 만든 전등갓 아래서 책을 읽는 사령관 아내에게/괴테의 떡갈나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지금껏 ‘시적 일탈’을 거부한 채 정서적 균형을 유지하며 때론 지적 세련미로 조형된 나희덕의 ‘모범시’(이런 말이 가능하다면!)들을 읽어온 독자들로서는 제목부터가 심상찮은 이번 시집에서 시인의 내면에 억압되었던 비극적 인식의 언어들이 거침없이 토로되는 것을 목격하고 놀라게 된다. “이제 사람들은 내 슬픔과 치욕의 언어들을 알게 되리라”(「눈과 얼음」)라는 첫 수록시의 선언처럼 나희덕은 작심한 듯 그의 친족을 포함하여 쁘리모 레비로부터 세월호, 일본군‘위안부’, 잠베지강의 폐어, 아프리카 초원의 누에 이르기까지 이 세계에 편재한 죽음의 증후들과 전면 대결하며 이제까지는 없었던 전혀 다른 시세계를 펼쳐 보인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작품에서 나희덕이 참여하고 개진할 내일의 예리한 리얼리즘 시의 갱신을 기쁘게 예감한다.

 

높은 담에서 뛰어내리는 고양이는

대각선을 날렵하게 완성하고

급브레이크 자국은

휘어진 대각선이 있음을 알게 하네

벽에 기대놓은 사다리는

대각선이 잠시 쉬고 있는 것처럼 보이고

구릉과 산비탈은

완만한 대각선이 되어가는 중이네

사람의 벌거벗은 몸에도

산맥과 구릉, 그리고 깊은 골짜기가 있지

대각선으로 뻗어 올린 다리와

수직을 지탱한 다리의 각도는 위태롭고

—「대각선의 종족」 부분

 

아직도 재기 발랄하며 ‘반체제적’인 장정일의 『눈 속의 구조대』를 읽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러나 「민족시인 박멸하자」나 “나는 세계의 항문을 빨겠습니다”(「양계장 힙합」) 같은 열애 넘치는 위트와 반어적 언술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가 이십여년 전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민음사 1987) 이후 무엇이 달라졌고, 달라져야 했는지를 쉽사리 구분할 수 없었다. 2000년대 황병승을 체험한 한국시는 이제 “맥도날드 경희대학교점이 폐점했다”라는 「시일야방성대곡」이나 “하느님 어머니는 어디에 계신가?”를 묻는 「성소수자이신 하느님」 이상의 ‘다른’ 반시(反詩)를 요구한다.

경어체의 긴 시집 제목을 보자마자 이 젊은 시인이 또 한권의 베스트셀러 시집을 냈구나라고 예단한 건 나의 오산이었다. “한결같이 연하고 수수한 나무에게/삼월도 따듯한 기운을 전해주었으면 한다”(「삼월의 나무」)라는 시구처럼 순수하고 겸허한 염원이 박준의 시집 전편(특히 「목욕탕 가는 길」 「생활과 예보」 「단비」 「능곡빌라」 「종암동」 등)에 담겨 있었다. 그는 ‘선한 의지’를 지닌, 백석 시의 한 구절을 빌려 말하면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생각하”(「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게 한다. 신형철의 적절한 지적처럼 그는 동시대의 많은 시인들과는 달리 “관념어를 거의 쓰지 않”는 한국시의 “역사적 심미성”(발문)에 가장 근접한 시인이다.

 

 

 

수상소감

 

마음의 뿌리를 돌보는 일

 

 

나희덕 羅喜德

羅喜德 1966년 충남 논산 출생.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작품활동 시작. 시집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파일명 서정시』,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 접시의 시』, 산문집 『반통의 물』 『저 불빛들을 기억해』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등이 있음. 현재 서울과학기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

 

 

종합병원 복도에서 수상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녹내장으로 한쪽 시력을 잃으신 어머니의 수술을 기다리는 중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어두워진 눈동자에도, 무겁고 답답했던 제 마음에도 잠시 피가 돌고 볕이 드는 듯했습니다. 기운을 좀 내라고, 백석 시인이 다정한 손길을 건네주는 것 같았습니다.

백석의 시를 처음 읽었던 때를 떠올려봅니다. 백석을 비롯해 정지용, 이용악 등은 월북시인이나 재북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문학사에서 오랫동안 그 이름과 작품이 지워져 있었습니다. 해금이 되고 창비에서 처음 나온 『백석시전집』(1987)을 읽으며, 이렇게 토속적 정감과 모국어의 숨결이 오롯하게 살아 있는 서정시가 왜 정치적 금기의 대상이 되어야 했는지 납득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제 시집의 표제작인 「파일명 서정시」에서 구동독 정보국이 서정시인 라이너 쿤쩨를 감찰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현실도 이러한 검열과 배제로부터 그리 자유롭지 않은 듯합니다.

왜 그들은 권력을 쥐고도 힘없는 시인을 두려워한 것일까요. 저는 그 이유를 “그가 사람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말을 가졌다는 것/마음의 뿌리를 돌보며 살았다는 것/자물쇠 고치는 노역에도/시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시인은 마음의 뿌리를 돌보는 사람’이라는 말에 라이너 쿤쩨와 백석만큼 잘 들어맞는 시인도 드물 것입니다. 라이너 쿤쩨와 다른 점이 있다면 백석은 북한체제가 요구하는 시 쓰기를 멈춤으로써 오히려 시인다운 염결성을 지켜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뿌리를 돌보는 일이란 무엇일까 자주 생각해봅니다. 그건 아무래도 슬픔의 순도나 감각과 연결되어 있다고 여겨집니다. 백석은 「슬픔과 진실」이라는 글에서 시인이란 “세상의 온갖 슬프지 않은 것에 슬퍼할 줄 아는 혼”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처럼 백석은 작고 여리고 가난하고 쓸쓸한 존재들을 향한 한없는 연민과 절제된 자기성찰을 통해 남다른 윤리적 품격을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목숨 지닌 것들에 대한 이 극진한 태도야말로 정교한 사유나 언어적 재능보다 한결 중요한 시인의 덕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 역시 줄곧 슬픔과 설움에 기대어 시를 써왔습니다만, 『파일명 서정시』의 시편들을 생각하니 부끄러움이 밀고 올라옵니다. 제 시와 삶은 백석의 ‘고아(古雅)한 갈매나무’로부터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 그 거리를 생각하면 눈앞이 까마득해집니다. 저는 대체 어디에 순연한 마음의 조각들을 내려놓고 온 것일까요. 그동안 걸어온 길을 거슬러 짚어보며, 제가 잃어버리거나 함부로 잘라낸 마음의 뿌리들을 다시 보듬어보아야겠습니다. 그런 성찰의 기회와 격려를 베풀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백석문학기념사업 운영위원회, 그리고 첫 시집 발간부터 문학의 터전을 내어주신 창비의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