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분단 너머의 한반도

 

‘트럼프 독트린’과 한반도

신현실주의와 신중상주의 사이의 위기와 기회

 

 

서재정 徐載晶

일본 국제기독교대학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 저서 『한미동맹은 영구화하는가』 『한국지성과의 통일대담』(공저) 등이 있음. suh@icu.ac.jp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은 2018년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조·미 간 ‘새로운 관계’의 수립 △조선반도의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평화체제’ 구축 △조선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합중국 대통령과 김정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무위원장의 싱가포르 정상회담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로써 양국은 적어도 1950년 한국전쟁 시기부터 지속되어온 상호적대관계를 종식할 전기를 마련했다. 지금까지 있었던 두차례의 합의를 한층 발전시킨 것이다. 양국은 1993년 외교부 부부장/국무부 차관보 급에서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위협도 하지 않을 것을 약속한 공동성명을 발표한 적이 있었고, 2000년 김정일 위원장의 특사인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매들린 올브라이트 국무장관 및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과 회담한 후 조미공동코뮤니케에서 “과거의 적대감에서 벗어난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발표한 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합의들은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고, 양국관계는 여러가지 우여곡절을 겪었으며 심지어 전쟁을 우려해야 하는 상황을 경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에 70년 가까이 이어져온 조미(북미) 적대관계를 종식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상호 신뢰관계를 수립하고 평화체제를 구축하겠다고 합의를 이룬 것은 이전의 합의를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또한 최고위급에서 이런 합의가 이뤄졌다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고 하겠다.

과연 이러한 합의는 어떻게 이뤄진 것일까? 임기 초에 북에 대한 ‘최대의 압박’을 강조하고 ‘화염과 분노’나 ‘완전한 파괴’를 운운하던 트럼프 대통령은 왜 갑작스럽게 북과 협상을 하고 합의를 이뤄낸 것일까? 한반도의 비핵화뿐 아니라 평화체제를 약속한 것은 한반도와 일본, 동북아시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이 글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미국의 국가전략이라는 틀 속에서 찾으려는 시도이다.1 언론에 많이 유포된 담론은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개인에 맞춰져 있고 또 그를 상당히 희화화하고 있기 때문에 싱가포르 정상회담의 이유와 함의를 온전히 파악하지 못할 위험성이 있다. 따라서 이 글은 조미정상회담을 포함한 트럼프 행정부의 일련의 조치들을 미국의 국가안보전략에 비추어 평가하고, 앞으로 있을 동북아시아 안보질서의 변화 가능성도 모색해보려 한다.2

 

2017년 12월 트럼프 행정부는 「국가안보전략(National Security Strategy) 2017」3을 발표했다. 오바마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 2015」가 국제제도를 중시하고 동맹과의 협력 및 중국과의 파트너십을 강조했던 반면 이후 2년여 만에 발간된 이번 보고서는 매우 다른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맥매스터(H. R. McMaster)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의 지휘 아래 네이디아 섀들로우(Nadia Schadlow)와 쎄스 쎈터(Seth Center)가 주도적으로 작성한 「국가안보전략 2017」은 미국의 힘을 내세워 미국의 이익을 가장 중요하게 지키겠다는 ‘미국우선주의’를 내세운다. 특히 중국과 러시아를 동반자가 아니라 경쟁자 또는 수정주의국가로, 북한은 이란과 같이 미국을 위협하는 국가로 규정하고 있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전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과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일방주의나 ‘선제타격전략’을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5 또 트럼프 대통령이 아시아 순방 중 “경제안보 그 자체가 국가안보”라고 한 것과 같이 이 보고서도 미국의 직접적 경제이해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전체적으로 보면 트럼프 행정부의 국가전략은 전후 미국의 전통적 국가전략인 ‘현실주의적 국제주의’를 계승하면서도 ‘신중상주의’와 타협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국가안보전략 2017」은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 도전과 기회를 동시에 제공한다. 작년부터 이어졌던 조미관계의 긴장국면과 조미 싱가포르 정상회담은 이러한 도전과 기회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트럼프 정부의 국가안보전략

 

트럼프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 2017」은 레이건 대통령이 1980년대에 추구했던 것처럼 ‘힘을 통한 평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현실주의적 접근을 취하고 있다. 국제관계에서는 어느 국가나 국제기구도 신뢰할 수 없으며 오직 자국의 힘만이 생존을 보장해주고 국익을 지켜준다는 현실주의적 인식이 트럼프 행정부 국가안보전략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전임 오바마 정권이 군사력을 경시하는 자유주의적 정책을 추진한 결과 미국의 군사력이 러시아나 중국 같은 경쟁국에 대한 전략적 우위를 예전같이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적 인식에 의해 한층 강화됐다. 물론 트럼프 정부가 실질적으로 우려하는 것은 러시아나 중국의 전체적 군사력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시나리오라기보다는 이들 경쟁국이 사이버 공간 같은 특정 분야나 지역 군사균형에서 미국의 약점을 파고들 가능성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중국이나 러시아가 아시아나 유럽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가능성을 견제하겠다고 천명했다는 점에 비추어볼 때 현실주의 중에서도 시카고대학의 국제정치학자 미어샤이머(J. Mearsheimer) 등이 주장하는 ‘공격적 신현실주의’가 트럼프 정부의 안보인식에 깊은 영향을 준다고 평가할 수 있다.6

그런 면에서 트럼프 정부는 부시 정부가 추진했던 일방주의적 정책이나, 대선 유세기간에 보여주었던 고립주의적 정책을 추진하지는 않을 것임을 시사한다. 즉 「국가안보전략 2017」은 “미국이 주도하지 않을 경우 악의를 가진 행위자들이 그 공백을 채우면 미국에 불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교훈”을 언급한다. 고립주의를 택해 유럽이나 아시아의 지역정세를 주도하지 않는다면 러시아나 중국 같은 지역패권국이 등장해 미국에 불이익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은 심지어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될 수도 있으므로 미국의 국가이익을 위해 각 지역의 국제관계에서 여타

  1. 이 글은 일본 『겐다이시소오(現代思想)』 2018년 8월호에 게재된 졸고 「トランプ政權の國家安保戰略と米朝交渉」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2. 영국 『파이낸셜타임즈』의 기디언 래크먼도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정책이 나름대로 내적 일관성이 있음을 지적하며 이를 ‘트럼프 독트린’이라고 칭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트럼프 독트린’을 구성하는 핵심적 세계관의 하나인 신현실주의의 중요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트럼프 독트린이 동맹에 부여하는 유용성을 저평가한다는 등의 한계를 보인다. Gideon Rachman, “The Trump Doctrine—coherent, radical and wrong,” The Financial Times 2018.7.16.
  3. https://www.whitehouse.gov/wp-content/uploads/2017/12/NSS-Final-12-18-2017-0905.pdf.
  4. 권력전이 이론같이 권력을 중심으로 구성된 국제질서를 논의하는 국제정치이론가들은 국가를 통상 두 부류로 나눈다. 기존 국제질서를 온존하려는 ‘현상유지국가’와 기존 질서에 도전해 이를 수정하려는 ‘수정주의국가’가 그것이다. 이 이론을 현 국제질서에 적용해 러시아나 중국이 수정주의국가인가를 두고 논의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국가안보전략 2017」은 미국의 권력을 중심으로 구성된 국제질서를 수정하려는 위협을 가하고 있는 국가가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현상유지국가와 수정주의국가라는 개념을 국제정치이론에 본격적으로 도입한 논문은 다음을 참조. Randall L. Schweller, “Bandwagoning for profit: Bringing the revisionist state back in,” International Security vol. 19, no. 1 (Summer 1994), 86~88면.
  5.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국가안보전략 보고서에서 “선제타격”을 명시했지만 그 표현과 달리 내용은 예방전쟁을 의미했다. 선제타격은 적국의 공격이 임박했다는 증거가 명백한 경우 취할 수 있는 방어적 조치를 의미하여 국제법적으로 용인된다는 것이 다수의견이다. 반면 예방전쟁은 적국이 핵무기 등을 포함해 위협적 군사력을 획득하기 이전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취하는 군사적 행동을 지칭하며 국제법상 불법적 침공으로 간주된다.
  6. John J. Mearsheimer, The Tragedy of Great Power Politics 1st ed., Norton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