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동북아경제중심’의 가능성과 문제점(21세기의 한반도 구상 1)

 

한국의 미래를 비추는 세 개의 거울

 

 

우정은 禹貞恩

미국명은 메러디스 우-커밍스(Meredith Woo-Cumings). 1958년 서울 출생으로 일본, 미국 등지에서 교육받음. 현재 미시건대학 정치학 교수. 본지 105호(1999 가을)에 「한국의 국가, 민주주의 그리고 기업부문개혁」을 발표한 바 있으며, 편저서로는 Capital Ungoverned: Liberalizing Finance in Interventionist States(1996), The Developmental State(1999) 등이 있고 새 저서 Neoliberalism and Reform in East Asia가 곧 출간될 예정. 이 글은 본지를 위해 기고한 영문원고 “Three Mirrors for Korea’s Future”를 옮긴 것임. mwoc@umich.edu

ⓒ Meredith Woo-Cumings 2003/한국어판 ⓒ 창작과비평사 2003

 

 

경제성장의 단계마다 하나의 지배적인 관념이 있으며, 그것은 특정한 지리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동아시아 국가들이 세계 각국에서 소비할 저렴한 완제품을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값싼 노동력의 무제한 공급이라는 날개를 달고 ‘도약’할 때, 공간조직에 있어 선호된 발상은 ‘수출특별구역’ 혹은 ‘경제특별구역’이었다. 이 특구들 안에는 디킨즈(Dickens) 소설에 나옴직한 공장들이 자리잡고 앉아, 먼 지역의 시장수요에 맞추기 위해 쉴새없이 돌아갔으며, 이 공장을 다스리는 규정과 규제는 해당 나라의 다른 곳에서 통용되는 것과는 거의 무관한 것들이었다. 이 구역들과 그것들을 설치한 국민경제는 일종의 ‘질병예방지대’를 형성하여, 분리된 채로 있는 게 최상이라고 여겨진 두 세계가 섞이지 않도록 해주었다. 종종 억압적이고 보호무역주의적인 국내사회와, 자유세계경제의 다른 어떤 곳보다도 더 자유방임적이기 일쑤인 분방한 특별구역들이 그것이다. 이 유형의 공간형태–마산 수출자유지역이 가장 좋은 예이다–는 산업발전의 초기단계에서 한국에 많은 공헌을 했으며, 동아시아의 (때로는 명목상 사회주의국가인) 개발도상국들에서 재연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오늘날 새로운 유행은 ‘거점경제’(hub economy)라는 관념이다. 동아시아–더 정확히 말해 동북아시아–가 제조업중심에서 써비스중심 경제로 옮겨가고 자본과 상품 시장이 충분히 자유화됨에 따라, 공간조직의 주도적 양식으로서 ‘특별경제구역’ 대신 ‘거점’이라는 개념이 들어섰다. 홍콩에서 싱가포르·중국·타이완·일본·한국까지, 모두들 자기네 땅에 거대한 거점경제가 대규모 성단(星團, clusters)의 형태로 자리잡기를 바란다. 이런 식이라면 결국 우리는 금융·운송·물류 거점들의 성단이 생겨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이들 전체는 전지구적 비즈니스를 행하는 하나의 거대한 지역복합체가 될 것이다. 예외없이 이 거점들은 아시아-태평양의 여러 지역에 일종의 ‘관문’(gateway)구실을 할 것이다. 국민경제에서 ‘경제특구’에 해당하는 것이 초국적 경제에서는 ‘거점’이다.

거점이 여러 나라에 공통되는 일반적인 개념이라는 사실은–이 지역의 정부들은 아마도 서로의 장기적인 전망과 계획에서 아이디어들을 따오느라 바빴을 것이다–여러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첫번째 분명한 문제는 이 경제거점 모델이 홍콩이나 샹하이(上海), 싱가포르 같은 고도로 국제적인 도시들의 경우에는 대단한 의미가 있겠지만, 서울 주변의 지역들에서도 과연 통할까 하는 것이다. 가령 경제거점을 위한 탄탄한 물적 기반을 건설하는 것도 문제지만, 이는 그나마 가장 쉽게 극복할 수 있는 문제이다. 이보다 더, 특히 30년이라는 한 세대 안에서 극복하기 어려운 것은 (대규모 기관투자가의 존재와 세계 수준의 주식시장이라는) 금융자원의 상대적 결여와 (다른 거점경제들에 비해) 법률·회계·예측 분야의 최고급 인재의 상대적 부족이며, 세계주의문화의 부재는 더 해결하기 어려운 점이다. 그렇지만 이 어느 것도 새로운 문제는 물론 아니다. 한국의 정책입안자들은 ‘거점경제’ 계획 전체에 신참자로서의 어려움이 들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정책입안자들은, 지난 40년간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서 그랬던 것처럼, 단호한 의지와 꼼꼼한 계획 및 금융자원을 통해, 그리고 많은 창조력을 발휘함으로써 한국의 경제적·문화적인 불리함을 극복하길 희망하고 있다.

거점경제가 원칙적으로 가능하다면, 논리적으로 다음 문제는 태평양 서쪽 연안 즉 아시아 쪽의 북동지역에 금융·운송·물류 거점이 정확히 몇개나 들어설 여지가 있는가, 그리고 동북아시아의 경제거점이 되려는 경쟁에서 한국에 어떤 상대적 잇점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물론 중국의 성장전망에 달려 있다.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이 정상궤도를 유지하고 중국연안이 광대한 내륙지역에 성장의 동력을 공급한다면, 그때는 아마도 중국으로 가는–한국의 관문들을 포함한–갖가지 관문들이 생겨날 여지가 많다. 중국인들은 자기 집으로 통하는 문이 많으면 좋다는 말을 즐겨 한다. 홍콩, 샹하이와 함께 한국은 소위 대중화권(大中華圈)을 이루는 광대한 집의 많은 문 가운데 하나가 될 수 있다. 즉 중국의 경제세력권으로 통하는 동문(東門)이 되는 것이 미래의 한국 모습일 가능성이 크며, 이는 역사적으로도 한국에 생소한 역할은 아니다. 하지만 이 점에 관해서는 나중에 더 논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기본적인 문제들로 돌아가서, 한국이 거점경제가 된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무슨 의미가 있는지, 나아가 한국이 샹하이와 홍콩의 중국인들과 싱가포르의 화교들이 그들의 도시에 대해 구상하고 있는 그런 유형의 거점경제들을 육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실제로 옳은지를 묻고자 한다. 바꾸어 말하면, 한국이 거점경제라는 관념을 통째로 받아들이기 전에 참된 공개토론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거점경제’란 다름아닌 대규모 사회공학을 함축하며, 해당 나라의 경제적·문화적 지형에 심대한 변화를 초래할 의향까지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창비』의 이번 기획은 그런 방향으로 한발짝 다가가는 계기가 될 것이다.

‘거점경제’ 같은 사회적·경제적 비전은 한 국가의 집단적인 자기정체성에 기반을 두게 마련이다. 그것은 한 국가가 상상하는 자기의 모습, 그리고 자기가 속한 세계의 바람직한 모습을 미래로 투사한 것이다. 이를테면 홍콩의 금융·운송·물류 거점의 광대한 비전은–홍콩이 사실상 국제도시임에도 불구하고–더 ‘중국적’이 되려는 욕구에 입각하고 있다. 홍콩이 철저하게 상업적인 중계항이라는 자기 모습에 만족스러워한다는 점은 유명한 사실인데, 이는 영국이 통치한 한 세기와 중화인민공화국으로부터 정치적으로 격리된 반세기가 남겨준 유산이다. 그렇기 때문에 홍콩은 오늘날 중국적이 됨으로써 세계를 중국으로 인도할 완벽한 거점이 될 ‘여유’가 있는 것이다. 샹하이는 홍콩의 반대모습이다. 사실상 중국도시로서의 샹하이는 자유분방한 자본주의 방식을 제어하고 결국에는 절멸시키는 고통과 억압을 통해 얻어진 것이었다. 샹하이는 숨막히는 공산주의를 반세기 동안 견뎌내고서야, 과거 샹하이가 항상 자신의 모습으로 여겼던 국제도시를 다시 표방할 권리를 얻었다. 싱가포르 또한 해상무역으로 번창한 유서깊은 중계항 도시지만, 영국에서 독립한 후로 중국 편향이 강하기는 해도 다민족적인 정체성을 보존하려 애써왔다. 리 콴유(李光耀)가 자랑하는 ‘아시아적 가치’란 본질적으로는 또하나의 중국판 세계주의에 질서와 기율을 부여하려 한 교묘한 시도였다.

달리 말해 홍콩과 샹하이 및 싱가포르는 근본적으로 중국의 목에 보석처럼 걸려 있는, 우리가 한때 ‘매판’도시라고 일컫던 도시들이다. (운송거점으로서 타이완의 까오슝高雄은 비중은 덜할지 몰라도 중국의 또하나의 매판도시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정치상황을 고려할 때 이런 얘기는 은밀하게나 할 수 있는 이야기다.) 이 도시들은 중국과 세계 사이에 탄탄히 자리잡고 있으며 기꺼이 대중화권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매판세력이 되는 것은 이 도시들의 피내림이자 정체성의 주요 부분이며 최종목적(telos)으로, 그들은 이러한 과거에 기초해 자신들의 미래를 쉽게 그려볼 수 있다.

반면 한국의 최종목적이란, 정말로 그런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 일찍이 헨리 제임스(Henry James)는 미국인으로 사는 것은 복잡한 운명이라고 단언했는데, 내 생각에 이는 어떤 국적에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상 바로 이 시기에 한국인으로 사는 것은 확실히 곤혹스런 일이다. 한국은 민족분단의 속박에 묶여 있고, 따라서 자신의 미래를 구상하기가 어렵다. 하나의 분단국가로서 비교적 폐쇄적인 국내경제를 배경으로 제조업 기반의 산업화에 착수하는 것과, 금융자본과 다국적 화물의 통과지점이라는 미래를 기획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분단국가가 세계를 향해 손을 뻗을 수는 있지만, 세계가 분단국가를 향해 손을 내밀 가능성은 적으며, 특히 긴장과 위험으로 가득한 분단일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민족분단이 산업화의 광포한 질주를 방해할 필요는 없었지만–오히려 냉전상황에서는 이 나라의 대규모 경제적 동원을 조장하기까지 했을 것이다–이제 민족분단은 21세기 한국의 미래를 만들어가는 데 주된 장애물이 되고 있다.

카를 맑스는 독일의 사회적·경제적 전망에 관해서, 영국이 독일에 미래의 거울을 비춰준다는 유명한 말을 한 적이 있다. 한국이 미래의 거울을 유심히 들여다볼 때, 어떤 모습이 보이는가? 나는 이제부터 ‘거점경제’에 대한 논의에서 암시한 한국의 미래에 대한 세 가지 가능성, 각기 별개이면서도 서로 연결된 가능성들을 제시하려고 한다. 나는 그것을 한국의 미래를 비추는 세 개의 거울이라고 부르며, 각각의 배후에 놓인 정치경제학적 논리를 파헤칠 것이다.

 

 

전지구적 논리, 국제적 정체성

 

보통 ‘거점’(hub, 바퀴통)경제는 바퀴살 세 개–금융·운송·물류–로 충분하며, 앞서 논의된 중국의 항구도시들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한국의 경우, 금융의 바퀴살이 단연코 약해서 한국의 거점구상에 전지구적인 금융중심(financial center)을 포함시킬 가치가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금융중심은 전지구적 한국의 꿈을 구성하는 재료 그 자체이다. 금융중심은 평범한 도시를 전지구적 도시로 만들고, 그 주민들을 우아하고 명민하며 세계주의적이고 부유한 인간들로 공인해주는 요인이다. 컨테이너항과 공항터미널을 아무리 많이 세운다고 해도 그것들이 합쳐져 전지구적 도시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전지구적 도시가 최소한 하나라도 있지 않으면 전지구적 국가도 있을 수 없다.

금융중심들의 새로운 전지구적 네트워크는 과거의 것과 확실히 다르다. 흩어져 있는 역외금융중심(offshore banking centers, 국제금융에서 비(非)거주자간의 거래를 위한 조세·외환관리 등 각종 우대조치와 그 영업거점을 제공한다–옮긴이)들과 국가적 금융중심들의 이중구조 대신에, 새로운 네트워크는 뉴욕과 런던에 사령탑(commanding heights)을 둔 비용절감체계(lean system)이다. 뉴욕과 런던은 막대한 금융자원과 인재들의 보고(寶庫)이며, 따라서 금융중심으로서 다른 도시에 의해 대체될 수 없다. 이들 전략적 고지 아래에는 다국적 금융회사들이 업무를 볼 수 있는 소수의 전략적 도시들이 있으며, 다음으로는 자본의 흐름을 감시하고 채권을 발행하며 ‘관문’역할을 할 수 있는 다른 도시들이 있다. 즉 다음과 같은 그림을 떠올려보면 되겠다. 전략적 고지 아래에 가령 유로화 통용지역(euro zone)의 중심지인 프랑크푸르트 같은 일련의 전략도시들이 있을 수 있다. 홍콩은 중국과 국제 자본시장을 연결하는 도시이며, 토오꾜오는 일본국민이 가진 세계 최대규모의 채권·저축·연금 자산을 저장하는 도시이다. 그 다음에는 전략적 가치가 작음에도 불구하고 ‘관문’기능을 하는 싱가포르, 씨드니, 토론토, 쌍빠울루 같은 도시들이 있다. 신속한 금융자유화, 대규모 은행통합과 합병, 활발한 채권시장의 계속적인 발전이 이루어진다면, 서울은 제3등급의 이 ‘관문’도시에 속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법적·제도적 하부구조만이 아니라 물리적 하부구조까지 엄청난 정밀검사 및 수리가 전제되는 대규모 개입이다. 샹하이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아직 샹하이는 정말 중요한 금융중심이 될 수는 없다. 완전태환(完全兌換)이 가능한 통화와 믿을 만한 법률 및 회계 체계가 없는 한 그렇다. 그런데 앞으로 언젠가는 중국의 금융거점이 되어서, 중국인구의 삼분의 일과 제조업 생산의 절반을 차지하는 양쯔강 유역의 7개 지방에 자본을 공급하게 되기를 바라는 이 도시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지난 10년 동안 고속도로·교량·대중교통을 포함하여 샹하이의 기반시설을 개선하는 데 4백억 달러 이상을 쏟아부었다. 외국 투자가들은 277억 달러를 추가로 지불했으며, 그 가운데 작년 한해에 들어간 돈만 해도 50억 달러이다. 한때 ‘동양의 빠리’라고 불린 샹하이는 현재 (적어도 특정 지역들에서는) 건축상의 경이를 이룬, 놀랄 만큼 아름다운 도시이다.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에 발맞추어 중국에서 금융제도가 자유화되는 즉시, 샹하이는 별 어려움 없이 전지구적 도시이자 금융거점으로 탈바꿈할 것이다.

중국과 동남아시아로 통하는 관문으로서의 홍콩이 금융거점으로서 갖는 무수한 잇점 가운데 하나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홍콩에 있는 미국이나 일본계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훌륭한 항구, 적절한 항구관리, 알맞은 항구행정제도, 그리고 법치(영미식 관습법에서 유래한 법이라는 점이 더욱더 큰 잇점이다)가 겸해질 때, 홍콩은 마침내 거의 완벽한 거점경제 도시가 된다. 이 만만찮은 과거와 현재로도 충분하지 않다는 듯이, 홍콩은 앞으로 보험·재보험·벤처자본과 아울러 연·기금 운용의 중심이 되겠다는 대망을 품고 있다.

홍콩의 성공비결은 중국이 전반적으로 홍콩에 경제간섭을 하지 않고 ‘1국 2체제’ 정책을 유지해왔다는 사실에 있으며, 얼마간의 미미한 정치적 간섭이 있다 해도(1997년 이전에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덜한 정도의 간섭이다), 이 간섭이 무엇보다도 안정성과 예측성을 갈망하는 금융자본의 이익에 딱히 저해되는 것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이 미래에 동아시아 거점이 되고 따라서 국제적 정체성을 획득하는 데 있어 최대의 걸림돌은 안정된 안보환경의 부재이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서울/인천이 ‘동양의 빠리’가 되기는커녕 북한의 협박대로 ‘불바다’가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언덕 위에 빛나는 금융도시란 있을 수 없다. 투자자들이 갈망하는 안정성 대신에 몇년마다 핵문제로 인한 엄청난 대치상태가 반복돼서, 생각할 수 없는 일–북한에 대한 정밀제한공격(surgical strike)–을 미국이 생각하도록 만드는 곳에서, 국제적인 경제거점이란 불가능한 것이다. 올해 핵 대치상태로 말미암은 긴장으로 한국의 외국인 투자가 반으로 급락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통상적으로 기업의 회계가 다른 나라보다 더 단기적인 미국 쪽의 투자가 71.7% 줄었는데, 미국의 기업환경이 나쁘다는 것만으로는 다 설명될 수 없는 규모다. 유럽연합의 투자는 24% 줄었다. 일본의 투자는 조금 증가했지만, 아마도 엔화 강세가 반영되었을 것이다.

적합한 도시 하부구조, 자유주의 금융정책, 적절한 기업 물류를 갖춘 제3등급 ‘관문’거점도시 중 하나가 되는 것이 한국으로서 이룰 수 없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한반도의 분단으로 쉴새없이 야기되는 긴장을 만족할 만하게 해결하지 못하는 한, 한국이 그 일을 해내기 어렵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영어 원문에서는 한국, 한반도 등 다양한 뜻이 ‘Korea’라는 한 단어로 쓰인다. 여기서는 맥락에 따라 필요한 경우 한반도로 옮기되 애매한 경우는 그대로 ‘한국’으로 표기한다–옮긴이) 한반도가 결국 하나로 통합되거나 연방국가가 되거나 아니면 ‘1국가 2체제’의 틀로 존속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앞으로 어느 쪽으로 해결되더라도, 한국 바깥의 세계인들에게 한국이 기업을 경영하기에 안전한 곳이라고 납득시키는 것이 있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이 분단된 나라에서 오랫동안 자취를 감춘 근원적으로 한반도적인 정체성이 없을 때, 한국은 국제적인 정체성도 결국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중화세계질서의 논리, 지역적 정체성

 

경제 혹은 금융 거점보다 훨씬 더 그럴듯하고 실현가능한 것은 운송거점으로서의 한국의 가능성이다. 인천 부근의 영종도는 항공과 해상 교통이 연결될 수 있는 곳이며, 흔히 말하듯이 인구가 백만 이상인 도시 43곳이 비행거리 2시간 이내에 있는 그런 곳이다. 거점으로서의 영종도는 10억 이상의 표적시장(target market)에 항공편과 화물운송편을 제공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 가벼운 첨단기술 화물을 인천항으로 싣고 와 화물수송기로 나른다는 구상이다. 그리고 좋은 점은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항만·공항이 있어서 영종도 주변에는 (금융구조보다 제공하기가 훨씬 더 쉬운) 필요한 모든 하부구조를 갖춘 물류중심이 가능하고, 일단 물류·유통 지향의 회사들이 영종도에 자리잡기만 하면, 아마도 결국에는 다국적 기업들의 집중지역으로 발달해나갈 것이며, 그곳에서 번창하는 기업에 자금을 조달하는 다국적 은행의 지점이 몇군데 생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영종도 거점은 푸뚱(浦東) 국제공항과 와이까오챠오(外高橋) 자유무역지역, 옌샨(Yanshan)의 수심 깊은 항만을 결합함으로써 샹하이 물류거점이 이미 이룩한 모습을 좀더 작은 규모로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광양-부산 권역(belt)은 까오슝이나 중국 북부를 일본해안이나 태평양의 동쪽 연안 즉 아메리카 쪽과 연결하는 운송거점이 될 수 있다. 적절한 정부지원이 따른다면, 이곳은 규모가 더 작을지는 몰라도 또하나의 로테르담이나 싱가포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은 또한, 중국이라는 경제적 자석 주위를 선회하는 경제권 속에 한국이 통합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는 한국경제의 비교적 단기적인 전망과 장기적인 전망 모두를 보더라도 한국에 꼭 불리한 일은 아니다. 단기적으로 보자면, 워싱턴이 세계무역기구 규정의 자구와 정신을 당당하게 위배하겠다고 나서는 데서도 예증되는, 현 국제무역질서의 불안정성에 대해 중국이 일종의 보호 울타리를 제공해주기 때문에 유리하다. 자유주의적인 케이토(CATO)연구소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미국 하원의원 435명 중 15명, 상원의원 100명 중 22명만이 ‘자유무역주의자’로 간주될 수 있다. 워싱턴은 또한 미국의 무역정책을 고분고분한 국가들에 대한 보상으로 이용하는 노선을 더욱 공공연하게 택하고 있으며, 미국의 대외정책을 지지하는 국가들에 대해서는 무역적자를 감수할 의사도 더욱 강하게 표명하고 있다.

부시행정부의 출범으로, 특히 9·11사태의 여파로 전지구적 무역질서가 여러 면에서 큰 타격을 입었다면, 효과적인 보호수단을 제공할 유일한 의지처는 지역내 무역일 것이다. 가령 북미국가들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거대한 권내시장에, 유럽국가들은 유럽연합에 시선을 돌릴 수 있다. 마찬가지로 동아시아는 중국에 의지할 수 있으며, 중국의 크기를 감안한다면, 동아시아의 지역기구들이 유럽의 알파벳 조합(EU, NATO 등)을 닮든 안 닮든 그것은 별반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국제적·지역적 기구들의 관찰자들이 지역주의의 형식적 발현에만 눈이 어두워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이미 동아시아에서 복잡한 역사적·지정학적 현실에 적합한 대단히 독특한 형태의 지역조직이 생겨났는지도 모른다.

그 한 측면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기구(APEC)나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같은 형식적인 지역기구에 꼭 의존하지 않고도 급속하게 서로 연결되고 있는 지역공동체(regionalism)의 출현이다. 나는 현재 협상중인 쌍무적 자유무역협정들의 점점 더 울창해지는 수풀에 의해 형성되는, 법률상이 아니라 사실상의 지역공동체가 존재하고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일정한 수의 쌍무적 자유무역지대가 형성되는 순간, 동아시아에는 즉시 사실상의 지역시장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왜 그렇게 되는가? 경제적 지역공동체가 유럽에서 마침내 가능했던 데는 숱한 이유가 있는데, 바로 그 점에서 동아시아에서는 공식적 지역경제공동체란 가능하지 않다. 20세기에 그토록 엄청난 슬픔과 고통을 가져온 민족주의를 제거하려는 고심의 결단이 유럽연합의 핵심에 있다면, 대체로 동아시아에는 바로 이런 의지가 결여되어 있으며 아직 민족주의가 생명을 다하지 않은 것이다. 또한 유럽과 달리 동아시아에는 집단행동을 통해 미국의 압도적 힘에 맞서려는 의지도 없다. 무엇보다도 동아시아는 너무나 공통점이 없는 지역이어서 국가들은 서로 극히 다른 발전단계와 이질적인 정치체제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두드러진 다양성에서는 통합의 실질적인 가능성이 생겨나지 않는다. 이렇게 본다면, 동아시아 지역공동체의 자원과 모습은 유럽연합이나 남미공동시장(Mercosur)이나 북미자유무역협정과는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새로 출현중이며 아직 이름붙여지지 않은 동아시아 지역공동체란 전통적인 중화세계질서에 속하는 방대한 지역을 포괄한다. 중국의 동쪽으로는 한국과 타이완을 포함하고 남쪽으로는 베트남, 타일랜드 북부, 싱가포르, 그리고 인구의 약 30%가 중국계인 말레이시아의 주요 부분을 포함한다. 인도네시아와 필리핀도 중국계 소수민족 기업가들을 통해 이 지역질서권에 통합되어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시민권을 지니고 있는 해당 국가의 국부 중 매우 큰 몫을 틀어쥐고 있다. 일본조차도 미국과 서구를 지향하는 대신에 점차 이 ‘새로운 (오래된) 세계질서’의 일부가 될지도 모른다.

장기적으로 전지구적 시장의 부침(浮沈)에 맞서 안정성과 울타리를 제공해주는 것은 아마도 중국시장일 것이다. 아시아개발은행연구소(Asian Development Bank Institute)가 행한 동아시아 무역에 관한 신뢰할 만한 계량경제학적 예측에 따르면, 중국은 앞으로 20년 동안 미국에 대해 막대한 무역흑자를 계속 축적할 것이고, 이것은 타이완·한국·일본 같은 비아세안 국가들에 대한 엄청난 무역적자 및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 같은 아세안 국가들에 대한 좀더 작은 규모의 무역적자에 의해 상쇄될 것이라고 한다. 달리 말하면, 결국 중국은 피터(미국)에게서 빼앗아 폴(대중화권의 주변국가들)에게 주는 형국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워싱턴이 감수할 만한 것인지 아닌지는 물론 토론거리지만, 중요한 것은 동아시아 지역공동체가 분리된 민족국가들을 형식적으로 조직하는 문제라기보다는 중국 주변의 국가들을 광대한 중국시장에 통합하는 문제라는 점이다.

인천 항만/공항은 이 새로 출현하는 지역질서의 맥락에서 볼 때 유효하다. 그러나 또한 인천 거점이 북한경제를 전지구적 무역질서에 통합시키는 조율된 노력과 짝지어진다면 더더욱 유효할 것임에 틀림없다. 인천은 두 개의 한국을 묶는 거점이 될 수 있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 다루지 않은 운송거점의 측면, 즉 두 한국을 연결하는 철도에 관심을 돌려야 한다.

 

 

민족적 논리, 한반도 정체성

 

한반도종단철도(TKR)가 완성되어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연결될 경우에는 유럽시장에 접근하는 비용이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다. 또한 북한에서 생산된 재화가 인천으로 운송되어 여러 목적지를 향해 선적될 것이다. 만약 한반도의 절반이 아닌 전체를 위해 기능한다면, 전략항구로서 인천의 가치는 대단히 높아질 것이다. 현대가 지금 개성에서 개발하고 있는, 백 개 이상의 기업을 유치할 수 있는 대규모 산업공단을 고려하면, 인천 거점의 논리는 더욱 분명해지고 거의 불가피한 일이 된다.

북한을 한국의 거점경제로 끌어들이는 것은 헛된 몽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몽상이 미래의 정치경제학 기획의 핵심적인 부분이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북한을 끌어들이지 않고 번영하는 초국적 거점경제를 건설하는 것은 아마도 궁극적으로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절름발이인 나라는 똑같이 절름발이 거점경제만을 낳을 수 있을 뿐이다. 대중화권(大中華圈) 연안의 항구도시들은 그들의 목표지점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가지고 날개를 펼칠 수 있다. 반면에 서울과 인천은 오직 자신들의 잘려진 날개를 응시하면서, 변덕스러운 정치적·군사적 변화에 따라 끝없이 협상해야 하는 여러 다양한 목표지점을 놓고 궁리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것은 한국의 거점을 두 개의 한국을 화해시키는 데 기여하는 방식으로 생각할 필요를 보여준다. 이는 서로 절연된 두 경제의 통합에서 결과적으로 이익이 될 조건들을 충분히 사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동북아개발은행(Northeast Asian Development Bank, NEADB)의 설립 제안은 큰 의미를 지닌다. 동북아개발은행의 목적은 예를 들어 두만강지역 개발프로그램 같은 장기적인 지역투자 프로그램을 조정함으로써 동북아시아지역의 경제적 통합을 촉진하는 것이다.두만강지역 개발프로그램이 아직 별 진전을 이루지 못한 것은 현찰이 너무 부족해서이기도 했다. 동북아개발은행에 대한 반대는 통상의 흔해 빠진 이야기들인데, 아시아개발은행(ADB)과의 기능 중복을 우려하는 일본의 목소리나 세계은행의 노력과 중복되는 것을 염려하는 미국의 목소리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지역개발은행들이 있어야 하는 요체는 국제개발기구들이 지구 전체를 효과적으로 감당할 수 없다는 점, 심지어 아시아조차도 아시아개발은행이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크다는 사실에 있다.

더구나 최근 아시아개발은행은 남아시아의 개발계획에 더 힘을 기울이고 있는데, 이 지역을 이제까지 소홀히 취급해왔다는 (정당한)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또 아시아개발은행의 촛점은 대규모의 물리적 하부구조의 재원을 대주던 데서 교육·보건·빈곤퇴치·환경보존을 지원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이는 동북아시아의 하부구조 발전에 커다란 구멍을 남겼고, 이것을 메울 동북아개발은행과 같은 기구의 필요성은 절실해졌다. 문제는 재정 자금을 가진 일본이 동북아개발은행 구상에 동의하도록 설득하는 일인데, 이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며, 특히 일본의 대북한 배상의 잠재력과 연결될 수 있다면 가능성은 더 커진다. 1965년 일본과 남한의 관계 정상화와 그에 따른 5억 달러의 차관은 마닐라의 아시아개발은행 설립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동북아개발은행의 출범이 북일관계의 타결과 동시에 이루어지기를 상상하는 것은 지나친 일이 아닐 터이고, 어쩌면 시베리아에서 북한을 거쳐 일본까지 천연가스관을 연결할 가능성이 이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이제 ‘거점경제’ 발전의 국제적·지역적 논리로부터 그것의 민족적 논리로 옮겨와 거기에 정면으로 촛점을 맞춘다면, 거점경제는 한국의 여러가지 문화적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계속되는 군사적 대치와 독재체제에 저항하는 오랜 투쟁의 유산이, 분명 동아시아에서 가장 활기찬 시민사회의 하나를 남한에서 만들어냈다. 자기 땅에서 핵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에 부딪혀 유럽에서 가장 크고 정치적으로 가장 힘있는 평화단체(녹색당)를 포진해낸 곳이 다름아닌 서독이었듯이, 민주적이고 평화지향적인 규범이 뿌리내리게 된 곳은 바로 남한이다. 한국의 이러한 민주적 정체성은 모습을 드러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오늘날은 풀뿌리 조직들과 네트워크들, 특히 세계의 방대한 네트워크인 인터넷의 복합적이고 대단히 효율적인 그물망을 통해 광범위하게 공유되며 유지되고 있는 정체성이다. 오늘날 한국학생들은 화염병을 던지는 대신 촛불시위를 하며 밤샘을 한다. 또 폭동진압 경찰과 싸우는 대신에 미국의 일방적 행동에 대해서, 특히 한국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 맹렬한 반대의사를 밝혀 여론를 형성한다. 어쨌든 한국의 시민사회가 엄청나게 잘 조직되어 있고 그 활동가들 및 중간층 시민들이 힘겹게 획득한 민주시민으로서 자신들의 권리를 지킴에 있어 매우 목청이 높다는 사실은 부인할 길이 없다.

민주적 규범이 오늘날의 한국인들을 규정하는 것이라면, 세계도 그 점을 이해하고 있다. 한국은 오늘날 시민들이 미국 수정헌법 제1조(표현의 자유 보장 조항–옮긴이)의 권리를 미국인들보다도 더 자유롭게 행사하는, 벌집 쑤셔놓은 것처럼 활기찬 곳이라는 인상을 세계의 다른 나라에 심어왔다. 또한 열광적 응원의 날개를 펼쳐 한국축구팀이 월드컵에서 과거에 이르지 못했던 높이까지 이를 수 있도록 떠메고 간, 바로 그 못 말리는 ‘붉은악마’들은 세계 초강국 미국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을 때에도 전혀 말을 꺼리는 법이 없다. 한국의 정치문화에 일어난 일은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적 규범의 강력한 융합인데, 이것은 활동가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중간층 시민이나 전문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른 나라들에서는 민족주의적 규범들의 붕괴가 일어나고 있으며, 실로 일본이나 독일처럼 전쟁의 유산으로 민족주의가 금기어로 되어버린 나라들에서는 그런 규범들은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민족주의가 마침내 진보적이고 민주주의적이 될 수 있었다. 또 당연히 한국의 생기 넘치는 대중문화가 존재한다. 과거에는 미국의 대중문화가 동아시아를 지배했다면, 최근에는 ‘한류(韓流)’가 이 지역, 특히 중국을 휩쓸고 있다.

결국 미래의 큰 그림을 그려보는 커다란 프로젝트라면 정말 진정한 한반도적 정체성 위에 근거해야 한다. 한국의 정책입안자들이 합당한 사회공학의 청사진을 만들 작정이라면, 당연히 미래의 거점을 구상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촛점은 북한에 일정한 혜택을 가져다주는 하부구조 개발이며, 그럼으로써 북한을 남한과 세계에 더 가깝게 끌어당기는 것이다. 이를 통해 민주적 규범들에 충실한 세계주의의 문화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외국기업과 은행들을 끌어들이는 것 외에도 한국정부는 문화적 적소(適所, niche)에 대해 더 창조적으로 생각하면서 세계를 이 적소, 즉 충분히 민주적이고 시민적인 문화이자 싹트기 시작한 대중문화로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돈을 버는 거점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민주주의적 실천의 심화를 위한 거점이 될 수도 있으며, 이 둘이 항상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한국은 초국적인 비정부기구들, 국제기구들, 국제교육기구들, 지역개발은행들의 거점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은 얼마든지 동북아개발은행의 유치국이 될 수 있는데, 마찬가지로 전지구적 경제개발기구들도 유치할 수 있다. 어쨌든 경제개발은 한국인들이 아주 잘해온 것 중 하나이다. 한국에는 유엔대학 체계의 일부인 헬싱키의 와이더(WIDER)와 매우 비슷한 개발연구소가 생길 수 있다. 또한 한국은 나라의 위상을 높이는 방편으로 역시 유엔과 연결된 일련의 인권·시민활동·환경 관련 조직들을 유치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

 

이 글의 단순한 전제는 장기적인 사회계획은 언제나 그 민족의 자기정체성 및 그 민족이 자신을–10년, 20년, 30년 후의 자신을–어떻게 상상하기를 원하는가 하는 점에 근거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나는 거점경제를 위한 한국의 야심찬 계획이 한국의 세 가지 서로 다른 미래와 정체성으로 나누어진다고 주장했다. 금융과 재정에 대한 강조는 서울이 전지구적 도시가 되는 것을 필요로 하고, 그 주민들이 과거에 꿈꾸었던 것보다 훨씬 더 세계주의적이 될 것을 요구한다. 운송과 물류 거점에 대한 강조는 한국의 지역경제로의 통합을 부각시키며, 그것은 어느 점으로 보나 중국에 중심을 둘 것이고, 따라서 현대 한국을 전통적인 중화질서와 유사한 질서에 재편해넣을 것이다. 그렇지만 두개의 한국과 시베리아를 통한 육상수송에 촛점을 맞추고 보면, 미래에 대해 전혀 다른 거울이 나타난다. 그것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떠들썩하고 생동하는 민주적 문화 중 하나를 가진 나라에서 자랄 수 있는 미래이며, 또한 민족통일에 대한 강한 열망과 맺어진 미래이다. 미래의 세 개의 거울에 비친 상들은 상호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한국이 통일된다면 이 상들은 합쳐져 일관된 하나의 전체상을 형성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한국의 민중을 움직이는 민주주의와 민족주의라는 한쌍의 규범을 고려한다면, 비핵화된 한반도를 향해 밀고 나가는 것–이는 한반도의 안보가 워싱턴의 면밀한 감시하에 안정화되려면 필수조건인바–그래서 결국 중립적인 한반도를 만들어내는 것도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중립적인 한반도가 동북아시아에 존재한다면 매우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중립은 쌍방통행로이다. 그것은 두 방향 모두 진행이 가능하며, 사실 경제적으로는 온갖 방향으로 나아간다. 세 개의 거울이라는 발상에서 보자면, 중립은 세 가지 미래 모두를 가능하게 한다. 중립국 스위스가 민간금융으로 성공한 것과 똑같이, 중립은 더 국제화되길 원하는 한국에 진정한 복이 될 것이다. 그것은 또한 운송거점의 완벽한 무대가 되며, 국제기구들에도 완벽한 무대이다.(이것이 바로 유엔이 부분적으로 스위스에 자리잡고 있는 이유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중립적 한국은 철저하게 파괴적인 20세기 역사라는 사지(死地)로부터 평화롭고 번영하는 새로운 한국, 남북간의 평화로운 공존이 한참 지속된 후에 마침내 통일된 한반도를 건져낼 것이라는 점이다.

[김정미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