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한국 장편소설의 미래를 열자

 

한국의 장편, 단절의 감각을 넘어서

 

 

진정석 陳正石

문학평론가. 주요 평론으로 「사회학적 상상력과 상상력의 사회학: 2000년대 젊은 소설을 보는 한 시각」 「길 위의 소설, 소설의 길」 등이 있음. jjsssj@hanmail.net

 

 

1. 주변화, 세계화, 보편성

 

2000년대의 한국문학은 문학의‘주변화’와 문학의‘세계화’가 중첩된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 물론 따로 떼어놓고 보면 이 둘은 새로운 현상이라 하기 어려우며, 2000년대 들어 비로소 시작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주변화’와‘세계화’가 병치 혹은 중첩되고 서로 강화하면서 문학예술에 심각한 도전으로 다가오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문학의‘주변화’는 어쩌면 적절한 용어가 아닐지 모른다.‘중심화’의 반대라는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데다,‘자율화’라는 좀더 널리 알려진 개념이 있기 때문이다.‘자율화’나‘자율적 예술’은 근대적 제도의 분화와 합리화에 따라 예술이 정치·경제·도덕 등의 영역과 분리되고 그에 대한 비판의 형식으로 존재한다는 주장이며, 모더니즘 유파에서 특히 강조하는 입장이다. 물론 자율적 예술의 제도화된‘상징적 저항’을 넘어 지적·인식적·도덕적 과제를 포괄하는 통합적 의지에서 근대문학의 창조적 활력이 발휘된 사례도 적지 않으며, 1970년대에 형성된‘민족문학’은 한국문학이 떠맡은 이런‘통합적’과제의 성격을 집약한 표현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거대담론의 유효성이 의심받고 문학의 사회적 위상이 점차 하락하는 가운데, 한국문학의‘통합적’성격은 점차 약화되고‘주변화’경향이 지배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1990년대를 풍미한‘문학위기론’이‘민족문학 위기론’과 상당부분 겹치는 현상은 한국문학이 그동안‘주변화’된 자율적 예술로 머무는 데 그만큼 익숙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한편 문학의‘세계화’는 비교적 최근에 일반화된 용어지만, 이 역시 전적으로 새로운 사태는 물론 아니다. 한국문학의 해외 소개와 세계 진출이라는 좁은 의미로는 새로운 추세이되, 세계문학과의 영향관계라는 넓은 의미로 보면 문학‘세계화’의 역사는 서양 근대의 압도적 영향과 그에 대한 반응의 양상으로 진행된 한국 근대화의 전시기와 거의 겹친다. 그러나 최근 신자유주의의 주도적 성격이 분명해지면서‘세계화’는 전과 달리 한국문학에 대한 심각한 도전의 의미를 갖게 되었다. 1997년 IMF사태로 그 위력을 실감했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국경을 넘어 세계 전역에 자본주의의 가치와 규범을 확산시키는 한편, 모든 문화예술을 교환가치로 환원하고 상품화를 강제한다. 가속되는‘세계화’는‘정치적 저항’의 영역은 물론‘상징적 저항’의 공간마저 위협하고 있다. 이제 문학은 인간과 세계에 대한 심오한 성찰의 형식이 아니라 경쟁력 없는 읽을거리로 전락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한국문학은 문학의‘세계화’를 위기 속의 기회로 활용하고, 이를 통해 문학의‘주변화’를 넘어설 준비가 부족한 상태이다. 민족문학운동의 퇴조와 사회적 상상력의 위축으로 한국문학은 전반적인 중심 부재의 상태에 있으며, 다양한 문학적 모색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종합의 전망은 그다지 밝지 않은 편이다. 이념적 중심이 약화된 상황에서‘주변화’의 강요를 거부하고‘세계화’의 유혹에 대응하기 위해 이제 한국문학은 다시 한번 문학의‘보편성’을 새롭게 숙고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시공을 초월한 문학 본연의 보편성을 새삼스럽게 상기하자는 제안이 아니며,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문학의 호환성에 무작정 편승하자는 주장도 물론 아니다. 지금 우리 문학에 요청되는 보편성의 윤곽을 거칠게 그려본다면, 그것은 한국문학 자체의 고유한 역사적 경험과 통찰에서 출발하되 경계를 뛰어넘는 가치와 자질을 발굴하고 그것을 일반화하는 보편성, 비유컨대‘우리 안의 보편성’1일 것이다. 물론 고유한 경험을 일반화하여 새로운 보편적 기준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말처럼 간단한 일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해체를 위한 해체’와‘탈주를 위한 탈주’에 열중한 나머지 보편적 공감의 예술로서의 문학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한국문학의 방향 전환과 체질 강화를 위해서는 보편성을 중요한 문학적 의제로 설정할 필요가 있다.

2000년대 한국문학이 새로운 보편성을 지향해야 한다는 요청은 최근 활발한 국제교류로 시야를 넓혀가는 작가들이 훨씬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다. 한 소설가는 한국문학이 세계무대에서 통하려면 일단 “보편적인 문제를 얘기”하는 것이 중요하고 “번역에 견딜 수 있는 작품”을 써야 하며, 무엇보다 먼저 “미국시장에서 팔려야”한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2‘시장’에 대한 의욕이 앞선다는 우려도 들지만, 한국소설이 보편적인 차원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뚜렷한 자각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이를 소설 장르의 문제로 좁혀서 생각해볼 때, 한국문학이 국내외적 경쟁력을 높이고 새로운 보편성을 만들기 위해서는 장편소설 분야가 지금보다 더욱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최근 여러 방식과 경로로 추진되는 장편소설 활성화 움직임은 대중성과 보편성에서 심각한 어려움에 처한 한국문학에 하나의 전환점, 위기 속의 기회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장편은 전통적으로 단편에 비해 훨씬 대중적인 장르였으며, 당대의 핵심을 건드리는 적실한 문제제기를 통해 독자들과 소통하는 데 유리한 형식이다. 문학의 보편성과 대중적 공감이 만나는 자리가 바로 장편소설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전망은 우리가 장편소설에 기대하는 하나의 장르적 가능성일 뿐이다. 장편소설의 활성화가 한국문학의 활로를 여는 유력한 방안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창작 방면의 구체적 성과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 글에서 주로 다룰 대상은 김영하(金英夏)의 『빛의 제국』(문학동네 2006)과 김연수(金衍洙)의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문학동네』 2005년 겨울호~2007년 봄호 6회 연재)이다. 한국소설의‘중간세대’를 대표하는 김영하와 김연수는 1990년대에 장편소설로 첫 책을 펴낸 이래 장편 창작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지속적인 활동을 해온 작가들이다. 『빛의 제국』과 『모두인 동시에 하나인』은 두 작가가 지금까지 써낸 장편 중에서도 가장 긴 분량의 역작이며, 이 점에서 한국 장편소설이 현재 도달한 지점을 가늠해볼 표준적인 사례가 된다. 이 글은 두 작품에 대한 분석을 통해‘주변화’와‘세계화’가 중첩된 새로운 상황 속에서 진행되는 한국 장편의 성취를 점검하고 향후 과제를 제시할 것이다.

 

 

2.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장르 변용과 소설적 쎄팅에 능숙한 작가답게 『빛의 제국』은 복잡한 이야기를 간명한 설정 속에 경제적으로 압축한다. 여기, 남한에서 20여년을 암약해온 고정간첩 김기영이 있다. 10년 전 선(線)이 끊어져 이제는 대한민국의 40대 보통 남자들과 별다를 것 없는 중년의 가장이다. 그에게 어느날 갑자기 24시간 안에 북으로 돌아오라는 귀환명령이 떨어진다. 명령의 출처도 이유도 직접 가보기 전에는 전혀 알 수 없다. 돌아갈 것인가 남을 것인가. 만 하루 동안의 시간에 그는 자신의 전생애를 정리하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절박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빛의 제국』은‘하루 동안의 모험’이라는 점에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씨즈』 같은 고전적 플롯에 이어지며, 체제와 이념에 대한 실존적 선택이라는 점에서 최인훈의 『광장』의 후예이기도 하다. 간첩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하드보일드 장르소설의 영향을 받고 있는가 하면, 탈냉전시대의 한반도 주변

  1. 조희연 「우리 안의 보편성: 지적·학문적 주체화로 가는 창」, 신정완 외 『우리 안의 보편성』, 한울아카데미 2006 참조. 물론 이것은 하나의 방향 제시일 뿐, 개념 자체의 타당성과 효과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적지 않다. 조희연의 주장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 재반론은 박명규 「‘오만한 자임’과‘겸허한 성찰’의 거리」, 『창작과비평』 2006년 가을호; 강정인 「우리 안의 보편성: 조희연,‘우리 안의 보편성: 지적·학문적 주체화로 가는 창’을 중심으로」, 『경제와사회』 2006년 겨울호; 조희연 「‘성찰적 자기보편화’의 과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경제와사회』 2007년 봄호 등 참조.
  2. 김이은 「김영하 작가 인터뷰-그가, 몸을 바꾸다」, 『작가세계』 2006년 가을호, 94~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