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평

 

A. 도르프만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 창비 2003

혁명 실패 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 작가

 

김인숙 金仁淑

소설가 sunis63@yahoo.co.kr

 

남을향하여북을

한때는 블라지미르 레닌을 추앙하는 이름인 블래디라고 불리었고, 그보다 더 오랜 세월 동안은 동화 ‘거지와 왕자’에 나오는 왕자 에드워드의 애칭으로 불리던, 그러나 마침내 아리엘이라는 자기 이름을 스스로 획득한 이 작가가 자신의 회고록을 쓰겠다고 했을 때, 그의 아들 로드리고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자신의 생애를 글로 쓰려는 사람은 분명 미쳤거나 그 글이 끝나기 전에 미칠 것이라고.

역설적이게도, 책을 덮는 순간 내게 가장 깊은 인상으로 남은 것은 작가 아리엘의 지적인 문체나,혁명가 도르프만의 역사적인 삶보다도 후기에 나오는 그의 아들 로드리고의 말이었다. 삶을 어디까지 들여다볼 것인가. 누구에게나 삶은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고, 그래서 지리멸렬한 것이지만, 또한 그 별것 아닌 삶은 역사적이다. 누구의 것이거나 그렇다. 그 경계를 파헤치려는 시도는 그래서 위험하다. 삶이란 통째로 자기 것이지만, 실은 어느 한 부분도 온전히 자기 것일 수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을까.

회고록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Heading South, Looking North,한기욱·강미숙 옮김)의 중심에는 두 장의 사진으로 비유된, 칠레혁명의 상징인 모네다 대통령궁이 놓여 있다. 민주적인 혁명에 성공한 아옌데가 모네다궁의 베란다에서 군중들의 환호를 받고 있는 장면이 한 사진 속에 들어 있다. 또 한 사진에는, 쿠데타 군의 폭격을 받아 베란다가 뻥 뚫려버린 모네다궁이 보여진다. 도르프만은 그 두 장의 사진 속에 똑같이 들어 있다. 첫번째 사진에서는 환호하는 군중 속에, 두번째 사진에서는 뻥 뚫린 베란다와 똑같은 모습으로 공황에 빠져 그곳을 바라보는 자리에. 그 두 장면은 칠레혁명의 성공과 실패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한 개인인 도르프만의 삶과 죽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삶이 죽음으로 이어지고 죽음이 다시 삶으로 이어진, 그러나 결국 뻥 뚫려버린.

아리엘 도르프만(Ariel Dorfman)은 자신의 회고록을 바로 그 뻥 뚫려버린 자리에서부터 시작한다. 바로 거기까지 달려오기 위해 그가 치러야 했던 삶과 죽음의 경험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 소멸되는 또다른 삶과 죽음. 일반적인 회고록이 대개 취하는 연대기적인 기술방식은 이 회고록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개인의 사적인 경험들은, 그것이 자리하는 사회적인 의미들을 끌어내기 위해서만 진술된다.말하자면 그는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역사를 빌려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역사 속에 놓여진 자신을 타인처럼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낯선 시선으로의 응시. 그것이 가혹할 정도로 집요하다. 끝없이 낯설게 바라보다가, 그러나 끝내는 가장 친밀해진, 자신이면서 자신이 아닌 사람과의 지적인 동반.

이 회고록의 각 부분에는 각기 ‘삶과 죽음의 장’이라는 소제목들이 붙어 있다. 작가이면서 동시에 혁명가인 아리엘 도르프만이 자기를 부정해나가는 방식은 문학적으로 치밀하다. 그는 역사가 말하는 것이나, 개인의 운명이 말하는 것을 표면에 내세우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아의 심층을 분석한다. 개인은 어떻게 꿈을 가지게 되고, 또한 어떻게 비겁해지게 되는가. 혁명은 어떻게 개인과 만나고, 개인은 혁명을 어떻게 배반하는가. 그리하여, 우리가 이 회고록에서 얻게 되는 것은 칠레혁명의 교훈이 아니라 시대와 맞닿아 있는 한 자아의 목소리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책을 읽는 동안 가끔씩 가슴이 결렸으리라. 지나간 시대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그 시대에 영광이 있었다면, 혹은 반대로 상흔만 남겨졌다면, 그것이 오늘의 내게는 어떤 의미로 남아 있을까. 비겁하지는 않은가, 어리석지는 않은가. 이러한 질문들은 오늘날 더이상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일까.

도르프만은 자신의 존재를 근원적으로 규정한 것으로 언어의 문제를 말하고 있다. 그는 아버지의 망명으로 인해 유소년기를 미국에서 보내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모어인 스페인어를 죽이고 영어를 선택했다고 말하고 있다. 심지어 그는 영어에 정복당하기를 원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가,사회주의자인 아버지가 성스럽게 붙여준 블래디라는 이름을 스스로 버리고 영국 왕자의 이름인 에드워드를 선택하는 과정은, 그의 소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모어인 스페인어는 이미 죽은 것이거나 죽어가는 것이었고, 영어는 살아 있으며 살아나갈 것이었다. 어린 소년은 이와 같이 이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역사적이고 사회적이었다. 북의 지배이데올로기 편에 서기 위해 자신을 존재적으로 바꿔버리려는 시도, 언어만큼 그것을 완벽하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있을 것인가.

언어는 삶의 바퀴다. 몸을 굴리는 바퀴가 아니라 삶의 바닥을 굴리는 바퀴다. 그가 유년시절에 겪은 첫번째 죽음을 말하는 장에서, 스페인어를 버리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은 그가 선택한 것이 언어가 아니라, 북의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말하는 것과 같다. 어린 소년의 침대 속 꿈까지 장악하는, 삶 그 전체로서의 언어. 그는 10여년 후, 이와는 완전히 정반대인 상황을 맞게 된다. 그는 이제 영어를 버리고 스페인어를 선택하게 되지만, 하나를 버리고 또다른 것을 선택하는 일이 늘 그리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이 도구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의 문제인 한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것이 개인의 문제이면서 사회의 문제이고 역사의 문제일 때도 더욱 그러할 것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도르프만은 앞으로 평생 그의 삶을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그의 내면에 존재하는, 죽음과 삶의 흔적들, 죽어가는 것과 새로 살아나는 것의 모습들, 그것들은 혁명으로 꽃피다가 그 자신에 대한 좌절로 시들어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 경계의 지점이며 그것을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이다.

이 책은 회고록이지만, 아리엘 도르프만의 인생 전체를 포괄하고 있지는 않다. 적어도 연대기적으로는 그렇다. 칠레혁명의 실패와 함께 그의 개인사에 대한 기록도 끝나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늘, 이 자리에 있다. 그러한 그의 시선을 독자들이 좇아갈 수 있는 것은, 온전히 그의 문학적인 성취에 있다. 회고록이 아니라 한편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치밀한 문학적 장치로 구성되어 있으며, 어떤 부분의 묘사는 자못 허구적으로 여겨질 정도로 비극적으로 아름답다. 사실 이것을, 이 책의 특징이라고 내세우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아리엘 도르프만은 처음부터 끝까지, 심지어는 혁명기에조차도 작가였다. 비록 실패한 혁명일지라도, 그 혁명이 이후 더 가혹한 독재폭압정치를 이끌게 되었다고는 하더라도, 그는 그 시기와 그후의 시기에도 작가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안 사람이다. 그런 그가 작가로서 한 개인인 자신을 기록하고 있으니, 이 개인은 그의 작품 속 주인공에 다름이 아니다. 그가 미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 아니, 그보다는 미칠 수 없었던 이유는 아마도 여기에 있으리라. 작가인 그는 그가 아닌, 그가 아니어도 좋은, 언제나 그런 것처럼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그런 사람을 등장시킬 뿐이다. 그런데 그는 혹시 지금 그의 책을 읽고 있는 바로 나 자신인 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