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흔들리는 판문점 그리고 평화로의 병진

 

 

이정철 李貞澈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공저 『현대 북한학 강의』 『북미 대립』 등이 있음. rheeplan@ssu.ac.kr

 

 

지난 70여년간 판문점은 대결과 공포의 상징이었다. 협상탁이라는 본래의 기능보다는, 거친 말의 공방과 야생의 폭력이 오가는 반문명을 의미했다. ‘서울 불바다’로 알려진 폭언이 행해진 곳도, 도끼 만행이라는 극단의 폭행이 자행되었던 곳도 그곳이었다.

그러나 2018년 4월 27일, ‘비무장지대(DMZ)의 비무장화’라는 이름하에 판문점을 평화의 공간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역사가 새로이 시작되었다. 그날의 야간 공연은 아픈 역사의 기억을 뒤로한 채, 평화와 번영 그리고 통일의 이름을 단 축제의 서막이었다. 적막한 휴전선의 밤을 밝힌 조명 아래 펼쳐진 ‘판문점선언’은 평화를 열어가는 터전이었다. 냉전의 공간이었던 그곳에서 이루어진 극적인 화해가 주목받아야 하는 이유이다.

 

 

1. 2002년 판문점과 2018년 판문점

 

2002년도 2차 남북정상회담 논의가 장소 문제로 결렬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임동원 전 통일부장관의 회고록(『피스메이커』, 창비 2015)에 따르면 2002년 남북은 6·15공동선언의 후속조치로 2차 남북정상회담을 진행하자는 논의를 시작했다. 북한은 당시 러시아 이르꾸쯔끄에서 2차 정상회담을 개최하자고 제안했으나 우리 측은 판문점에서 개최하자고 역제안했다. 장소를 두고 승강이를 벌이던 중, 북한은 ‘판문점은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미군이 관할하는 지역이므로 거기서 회담을 하자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2차 정상회담 개최 논의를 전격 철회했다. 당시 회담은 그렇게 판문점이라는 장소 문제로 결렬되고 말았다.

후문에 따르면 이번 평창올림픽 폐막식에 참여한 김영철 부위원장이 전격적으로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하는 특사 역할을 자임하면서도, 역시 2002년과 동일한 논지로 판문점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고개를 내저었다고 한다. 한국정부는 서울, 평양, 판문점 어디든 좋지만 판문점이 가장 적절하다는 취지로 정상회담 장소를 판문점으로 유도하고자 했지만 북측의 반감은 여전히 거셌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특사단의 답방을 맞이한 김정은 위원장은 뜻밖에도 좌고우면하지 않는 예의 통쾌한 화법으로 판문점 정상회담을 전격 수용했다고 전해진다. ‘미제’가 ‘관리’하는 것으로 알려진 적대적 공간을 대하는 김정은의 태도 변화야말로 이번 판문점 정상회담의 극적인 효과를 가능하게 한 동기였던 것이다. 북한이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줌에 따라 우리 모두는 판문점만이 아니라 DMZ 전체를 평화와 상생 그리고 화해의 공간으로 전변시키는 꿈을 꾸기 시작하게 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판문점선언은 환송공연 ‘하나의 봄’과 더불어 대결의 공간인 비무장지대를 평화와 화해의 장으로 만들어갔다.

 

 

2. 판문점선언의 구성적 프레임과 특성

 

판문점선언은 애초에 문재인정부가 추진했던 정상회담 의제와 비교해보면 그 순서와 구성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회담 전 문재인정부가 내건 3대 의제는 ①한반도 비핵화 ②군사 긴장완화와 항구적 평화 정착 ③새롭고 담대한 남북관계 진전이었다. 이에 비해 판문점선언은 ①남북관계의 전면적·획기적 개선과 발전 ②군사적 긴장완화와 전쟁위험 해소 ③항구적이며 공고한 평화체제 구축의 3개조 14개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번 판문점선언에서 무엇보다도 특징적인 것은 그 순서의 문제이다. 즉 남북관계의 전면적·획기적인 개선과 발전을 1조에 배치했다는 점이다. 애초에 한국정부는 한반도 비핵화를 1조에 두기로 했지만 판문점선언은 남북관계 관련 항목을 1조에 두었다. 남북이 당장 할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하는 일을 전면에 배치하기로 한 실용적 접근의 승리였다. 이런 순서의 변화에 대해 비핵화를 등한시했다는 비판도 있지만, 남북관계란 본성적으로 민족자주의 원칙에 따른 남북 당사자주의에 기초하고 여타의 합의사항은 이를 위한 실행조치가 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오래된 문법이다. 이에 따라 판문점선언은 1조와 2조에서 남북 당국이 실행할 수 있는 조치를, 3조에서는 남·북·미가 논의해야 하는 조치를 구분해 다루고 있다. 1조에서 남북관계의 전면적 개선을 위한 사항을 열거하고, 이를 위한 군사적 보장 조치와 긴장완화 조치를 2조에서 병행 열거하는 방식이다. 이같은 순서의 변화를 통해 판문점선언이 남북당사자주의에 입각한 실행선언으로서 구성의 완결성을 강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 1조에서 주목할 부분은 개성에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설치하기로 한 것이다. 서로 상대방의 수도에 대표부를 설치하는 준대사급 관계 정상화 방식과는 달리 남과 북이 하나의 거버넌스 조직을 통해 관계개선을 해나가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개성이 남북협력의 메카가 된 경험을 살린다면 남북은 개성공동연락사무소를 통해 정치, 경제 등 다양한 영역을 조율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두개의 대표부가 아니라 하나의 연락사무소 형태를 띤다는 점은 남북관계를 연합적 방식으로 제도화하겠다는 방법적 의지의 소산으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1조에서 다양한 교류협력을 진행하기로 한 것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철도, 도로의 연결 및 현대화에 합의한 점이다. 그것은 김정은 위원장이 ‘민망’스럽다고 표현할 정도로 낙후한 북한 인프라를 개혁하는 서막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한국을 동북아경제권으로 연결시키는 장치이자 기회공간이라는 점에서 간과할 수 없는 사항이다. 한국과 북한, 중국 동북 지방까지 2억 인구의 지역을 하나의 시장으로 사고할 수 있는 경제통합의 서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이같은 구상을 담은 한반도 신경제지도를 북측에 전달했다는 소식에 주목해야 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두번째로 판문점선언의 중요한 특성은 그 구성의 문제다. 평화체제를 2조와 3조에 나누어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평화체제 논의를 2조의 재래식 무기와 관련된 긴장완화 요인과 3조의 핵문제와 관련된 긴장완화 요인으로 분해해서 다룸으로써 논리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