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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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경화 池炅華

동국대 문예창작과 3. 1986년생. mills4@korea.com

 

 

 

내 동생의 머리를 누가 깎았나

 

 

등장인물

어미(43) 고이금(26) 고이손(17) 고이리(17)

 

무대

(객석과 가장 가까운 곳부터) 왼쪽으로 담장이 비죽 솟아 있다. 담장이 조금 무너진 곳에 작은 화분이 몇개 놓여 있다. 담장에 바로 맞닿아 있는 수돗가. 빨간 세숫대야가 보인다. 중앙에는 아담한 평상이 있다. 평상 위에 옷가지가 몇벌 얹어져 있다. 평상 뒤로 집이다. 길지 않은 마루가 있다. 열려 있는 방문이 보이고 그 옆에 작은 문이 하나 더 있다. 문이 열린 곳은 할아버지의 방이다. 발이 내려져 있다. 무너진 담으로부터 할아버지 방 문 옆까지 사선으로 빨랫줄이 길게 이어져 있다. 평상 곁에도 바지랑대가 몇개 세워져 있다. 줄기줄기 색바랜 빨래가 걸려 있다. 집 오른편에 파란 대문이 있다.

 

평상 옆에 가방이 놓여 있다. 이금이 평상에 앉아 수박을 먹고 있다.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꼴이 애처롭다. 수박은 칼로 쪼갠 것이 아니라 박살나 있다.

개 여러마리가 짖는 소리 들린다. 어미가 이손을 앞세우고 들어온다. 이손은 어미에게 혼난 뒤라 풀이 죽었다. 어미는 미인이지만 개 키우는 사람 특유의 냄새와 억척스러움이 배어 있다. 이손은 이금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작은방으로 뛰어가버린다.

 

이금 저 왔어요.

(어미가 평상 옆에 있는 가방을 본다. 짐을 마구 쑤셔넣었는지 익은 무화과처럼 부풀어 있다. 어미가 가방을 열고 삐져나온 옷가지를 억지로 쑤셔넣는다. 한참을 애써도 들어가지 않자 포기하고, 좁은 틈으로 이금의 팔다리를 끄집어내듯이 짐을 모두 빼버린다. 속이 시원해진 어미는 벌떡 일어나 수돗가로 가 손을 씻는다. 걷어올린 팔에는 상처가 많다.)

이금 수박 먹어요. 목소리가 아버지 닮아서 속정에 한덩이 팔아줬어.

어미 흘리지 마라. 개미 꼬인다.

이금 엄청 단데, 씨가 많다.

어미 수박을 얼굴로 깼냐.

(이금, 웃으며 수박을 입에 물고 어미 입 쪽으로 내민다. 어미, 고개 돌린다.)

이금 대문 다 들어와서 떨쳤어요. 땅이 꺼졌는지 오는 내내 길이 잘 안 밟히는 거 있죠.

(어미, 칼과 쟁반을 가지러 부엌으로 가면서)

어미 얼굴이 왜 그래.

이금 아주 나왔어요.

(어미, 잠깐 걸음 멈춘다.)

어미 (기가 막혀) 허. (가면서 혼잣말하듯) 서방이 착하니까 알아서 등신짓이지.

이금 여자 있잖아요.

어미 (소리만) 알고 보니 여럿이데?

이금 아니. 나 하나, 거기 하나. 실속있게 두 살림이에요. 능력이 안되서 세개는 못 차리고.

(어미, 칼과 쟁반을 들고 나온다.)

어미 니 집 살림에 지장 없으면 그냥 두는 거야. 넌 애도 없는 게 왜 큰부인 행세야. 거기도 벌써 닳고닳아 길 난 집일 텐데. (잠시) 애가 있든?

이금 자꾸 집에 뭘 보내요. 건방지게 작은부인 행세야.

(어미, 이금이 들고 있던 수박을 뺏어 신경질적으로 입에 밀어넣는다. 이금, 칼로 수박을 자른다.)

이금 없어요. 없더라구. 가봤더니 집이 아담하고 이뻐. 싹싹하게 나와서 반색하는데, 세상에! (목소리가 커지며) 그 사람 얼굴이며 팔이며 온통 멍인 거 있죠? 그 짐승, 나한테 열받고 나가 그 사람한테 푸나봐요. 그 얼굴로 형님 하는데 정말 기분 더러워요. 두 여자가 바람멍 시퍼렇게 들어서 형님, 아우 하는 꼴이. 나야 가슴에 든 멍이니까 아닌 척하면 그만이지만 그 여자는 어떡해요?

어미 이뻐?

이금 나이가 어리다는데, 팍 삭아서…… 이제 보니 내가 여태 그 짐승 속이라고 싹싹 긁어놓은 게 다 그 여자 살이었나봐. 열받으면 날 팰 것이지. 엄마, 알아요? 내 앞에선 컵 한번 잘못 그르친 적이 없어요.

어미 패긴 누굴 팬다는 거야?

이금 그 집은 도마가 반토막이야. 그걸로 맞는대요. 다음날 된장국 끓이는데 우리 집 도마를 보니 열불이 나지 않겠어요? 그래서 도마에 칼 탁! 꽂고 그 길로 나와버렸어요.

어미 넌 왜 가만있는 벽에 시비야. 이마에 핏방울 봐라. 허구한 날 맨벽에 헤딩이냐? 성한 수박 집어놓고 씨 없으니 침이라도 뱉겠다는 거지. 너, 고약해. 심보가. (씨 뱉는다.)

이금 내 차 나갈 때까지 저 뒤에서 고개를 안 들잖아요. 엄마, 정말 그 사람이 무슨 죄예요?

어미 죽을 때까지 죄송하기만 하고, 죽어도 안 떨어지겠다는 거지.

이금 세상에! 엄마, 난 그런 사랑은 못해요.

어미 여기 온 거 이서방은 아니?

이금 이서방? 그 사람 개도매 하느라 바빠.

어미 먹거리?

이금 아니, 애완견이에요. 딱이지, 뭐. 없는 머리털 대신 개털도 올려놓을 만큼 개 좋아하던 사람인데. 근데 엄마도 참. 지금 살고 있는 사람 박서방이에요. 이서방 이름이 뭐였는지도 난 까먹었는데. 원래 이름이 서방이었나?

어미 하여간 딸년 돈 안 들여 치운다고 좋아하는 게 아니었어. 결혼까지 싸게 여러번 할 줄 내가 알았을까.

이금 도마 위에 결혼사진 놓고 칼 탁! 꽂는데, 왜 옛날 홍콩영화 마지막 같지 않아요? (웃음) 나오면서 생각해보니까 정말 그 사람하고 살았던 게 한편의 무협영화야. 캐스팅은 화려하지만 화질은 구려.

(이금이 입은 옷의 긴팔소매 끝이 수박물에 젖었다.)

어미 다 젖는다.

(어미는 이금의 팔을 끄집어 소매를 걷어주려다가 그냥 자신의 치마로 닦아주고 만다.)

어미 (할아버지 방 쪽 가리키며) 인사는?

이금 아니. 주무시는 것 같아서요.

어미 종일 저렇게 누워 계시다가도 숨소리 들으려고 귀를 가져다 대면, 콧김을 훅 부신다. 그 콧김이 얼마나 뜨거운지. 다 쇠한 몸 안에도 열이 그렇게 많이 남아 있다니 어쩐지 기분이 나빠져.

이금 거동은 좀 하세요?

어미 잠깐 앉으실 때는 있지. 그래도 정신은 꽉 붙잡고 계셔서 꼬박꼬박 날짜를 물어보신단다.

이금 날짜를요?

어미 그래. 몇년 몇월 며칠인지. 거기다 요일까지 분명히 말씀드려야 하구.

이금 (농담으로) 날짜라도 고르고 계신 건가?

어미 저승으로 장가가려면 좋은 날을 받아야지. (잠시 웃다가) 그래도 저 양반이 보통 양반이 아닌데……

이금 할아버지 호통 한번이면 온 개장이 다 조용해졌죠.

어미 개장 쪽에 가려면 오금이 오싹오싹해. 네 할아버지가 키우신 개들이라 얼마나 사나운지. 저 양반 정정하실 때는 순하던 녀석들도 지금은 살 떨리게 으르렁대.

이금 (개 짖는 소리 듣고) 개들이 난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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