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초점
이 계절에 주목할 신간들
백민석 白閔石
소설가. 소설집 『16믿거나말거나박물지』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 『혀끝의 남자』 『수림』 『버스킹!』, 장편소설 『헤이, 우리 소풍 간다』 『내가 사랑한 캔디/불쌍한 꼬마 한스』 『목화밭 엽기전』 『죽은 올빼미 농장』 『공포의 세기』 『교양과 광기의 일기』 『해피 아포칼립스!』 등이 있음. hungryyears@naver.com
양경언 梁景彦
문학평론가. 평론집 『안녕을 묻는 방식』 등이 있음. purplesea32@hanmail.net
양윤의 梁允禕
문학평론가. 평론집 『포즈와 프러포즈』 등이 있음. aleph2006@daum.net

왼쪽부터 양윤의 백민석 양경언 Ⓒ 신나라
양경언 안녕하세요. 이번 문학초점 진행을 맡은 양경언입니다. 지난 계절에 이어 양윤의 평론가와 함께 뵙게 됐습니다. 한 계절 만에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지요. 게스트로는 백민석 소설가를 모셨습니다. 반갑습니다.
백민석 불러주셔서 고맙습니다.
양윤의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버텨야 하는지 아이디어를 떠올려보고 있습니다. 지난 대담 때 문학을 함께 이야기하는 즐거움을 느꼈는데 요즘 들어 그런 대화가 더욱 절실해졌어요. 오늘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을 것 같아 기대하고 왔습니다.
김유담 『탬버린』(창비)
양경언 사회적 거리두기의 시기이다보니 한편으론 여섯권을 더욱 꽉 차게, 깊이있게 살펴보실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먼저 김유담 소설집 『탬버린』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2016년 등단해 4년 만에 첫 소설집을 상재했어요.
백민석 등단작이 소설집 맨 앞에 실린 「핀 캐리」이지요. 당시에 신춘문예 작품집으로 소설창작 수업을 했던 게 기억납니다. 학생들 반응이 좋았어요. 저도 좋았고요. 그래서 이번 문학초점에 이 책이 올라와서 반갑고 기분이 좋습니다. 중간에 볼링 핀 그림도 들어가는 등 형식적으로도 독특했습니다. 수업에서 제가 신춘문예 수상작에서 흔히 발견되는 비슷한 점들을 설명하면서 가족 로맨스라는 말을 했어요. 가족 로맨스는 부모, 자식, 형제 간의 관계를 소설적으로 극화하면서, 그 가족 서사 안에서 인물들의 성장과 삶, 그리고 사회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형식이죠. 가족이 곧 축소된 사회인 겁니다. 가족 안에서 「멀고도 가벼운」 같은 정치적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고, 「핀 캐리」에서 드러나듯 경제적 교환이 이뤄지기도 합니다. 오빠가 동생의 등록금을 대주려고 과로를 하고, 가장 노릇을 하려다 도박까지 하게 되죠. 김유담은 그 가족 로맨스를 전형적으로, 잘 그렸어요. 어느 한 형식을 이 정도로 잘 다룬다는 건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아쉬운 점은 신춘문예 작품집의 단편들 대개가 이런 가족 로맨스에 해당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번에 『탬버린』에 실린 다른 단편들도 거의 가족 로맨스에 속한다는 생각입니다.
양윤의 첫 소설집을 낼 때 갖게 마련인 ‘여기가 스타트라인이야’라는 자의식이 드러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공설운동장」의 마지막 장면이 특히 그러한데요, 작가가 독자에게 건네는 각오처럼 읽힙니다. “운동화 끈”을 조이고 “심호흡”을 하고요. 가족이란 본래 ‘확장된 나’이거나 ‘내 안에 들어온 세상’이잖아요? 그 점에서 첫 소설집이 가족 로맨스의 형식을 취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저는 단편들이 가진 특별한 소재들에 관심이 갔어요. 「탬버린」에서의 탬버린이나 「핀 캐리」의 볼링핀이 그런 예일 텐데, 소설을 읽다보면 서사를 종결지어야 할 지점에서 그런 소재가 이정표처럼, 강렬한 인상을 뿜으며 서 있습니다. 삶의 생생함을 보여주는 페티시가 아닐까 싶어요. 단편의 기율에 충실하다고 할까요.
양경언 가족 이야기로 자신의 처음을 알리는 작가들이 많다는 것은 한국사회에서 가족의 영향력이 어떠한지를 확인해주는 지점 같습니다. 특히나 김유담의 소설은 변두리 지역의 서민층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어떻게든 그곳을 벗어나 ‘인서울’ 하고자 하는 여성인물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가져도 되는」에 등장하는 ‘인희’는 아예 “고향의 가족들이 너무 지긋지긋해서 도망치듯 서울로 올라와 부모 형제와 무관한 삶을 사는 것이 목표라고” 말하지만, “자신이 버리고 온 것들로부터 한시도 자유롭지 못”한(226면) 인물로 그려지죠. 가족 공동체에 복무하고 있는 자신이 싫으면서도 계속 묶여 있어야만 하는 상태, 책임감이 동반된 죄의식을 품는 상황이 이 여성인물들의 정서와 행위를 좌우해요. 서울에서의 삶도 만만치 않고 “사람들이 말하는 기본의 기준이 갈수록 버거워진다고”(238면) 여기는 이들은 그래도 어떻게든 견디고자 애를 씁니다. 삶의 부침을 겪는 와중에도 주저앉지 않고 힘을 만들어가는 여성인물들이 감당하는 중인 긴장감이랄지, 그러한 인물들을 통해 한국사회의 지역 차가 젠더별로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하는지를 어림잡아보기 위해서는 이러한 가족관계가 끊임없이 소환될 수밖에 없는 듯합니다.
백민석 그런데 이 가족 로맨스가 신선감은 떨어집니다. 제가 처음 문학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도 박완서, 양귀자 선생 작품 같은 가족 로맨스가 주를 이루고 있었죠. 그리고 지금 저와 같이 활동하는 젊은 소설가들도 비슷한 형식의 가족 로맨스를 쓰고 있어요. 사실 이게 한국소설의 주류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피자에 도우가 있잖아요? 그 도우가 가족 로맨스라면, 소설가들이 거기에 저마다 토핑만 다르게 얹는 거예요. 어떤 소설가는 소시지, 어떤 소설가는 토마토, 또 어떤 소설가는 바질과 마늘을 얹지요. 김유담의 「핀 캐리」는 가족 로맨스라는 도우 위에 볼링 이야기를 얹은 거라고 할 수 있어요. 오해할까봐 덧붙이지만, 이건 작품이 좋다 나쁘다 평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맛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너무 오래, 너무 자주 피자를 먹어온 것은 아닐까요? 그럼 질리고 물리잖아요. 지금 발표되는 작품들의 주류가 이 가족 로맨스니까, 소설가 지망생들도 별 문제의식 없이, 마치 운명인 것처럼 이 형식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양윤의 무능하고 무력하며 실패한 가장인 아버지, 가장의 역할을 대신하는 아들 혹은 가계를 책임지느라 세속화된 어머니라는 인물 구도가 기시감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게다가 이 구도는 소설이 바뀌어도 거의 동일하게 반복되고, 이 반복이 인물을 납작하게 만듭니다. 「멀고도 가벼운」의 보배이모가 이런 구도에서 벗어나 있는데, 뉴질랜드로 떠나는 것으로 아예 서사의 지평에서 사라지고 말아요. 아마도 절반은 작가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고, 절반은 이야기의 구성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된 것이 아닐까 싶은데, 이런 ‘경험적인 자기구성의 원리’에서는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양경언 보배이모를 서사의 지평에서 사라지게 한 원인도 상경한 여성 화자의 관점과 연관되는 듯합니다. 그런 화자는 자신의 기원이 된 지역 혹은 가족으로부터 멀리 떠나고 싶어하지만 그게 도리어 경계와 배타성을 강화하기도 해요. 활력이나 새로운 감각을 가져다주는 사람은 늘 외부에 있고 자기는 여기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인식의 표현이랄까요. 그런데 멀어지기 위해 계속 싸우고 있는 상태는 외려 아직 벗어나지 못했다는 현실의 방증이기도 하죠.
한편 끝없이 외부를 좇지 않아도 내부의 힘과 어떻게 교섭하고 대화하느냐에 따라 충분히 다른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다는 점은 「탬버린」에서 잘 드러나 있어요. 입사 사개월차 신입사원 ‘은수’가 겪는 회사생활이란 회식 때문에 간 노래방에서 100점이 나오면 대표가 오만원을 주는 일이 벌어지는 것과 같이 수치스러운 상황을 유희로 받아들여야 넘길 수 있는 날들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삶의 ‘징글징글한’ 면모를 알아가는 은수에게 문득 끼어드는 건 지방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송’과 함께 찰랑거렸던 탬버린의 리듬이에요. 직원들에게 ‘99점과 100점은 엄연히 다르다’는 논리로 훈계하는 대표나 성과연봉제의 도입을 당연시 여기는 회사의 상황은 은수를 비롯해서 함께 일하는 이들을 기능적으로만 만드는데, 은수는 송과 함께 보냈던 시절의 자신을 성찰하면서 “울컥 서러운 감정”(159면)을 느끼기도 하고, 주변이 어떠하든지 간에 요란하고 시끄러운 소리를 내는 탬버린의 개성에 자신을 빗대어보기도 하죠. 회식 자리를 생생하게 그려내는 서술자의 시선은 그 자리의 분위기에 압도되지 않고 떳떳하게 맞서고 있다는 인상을 전합니다. 주인공이 자기 안의 에너지를 마주하게 된다는 점, 그 힘과 교섭할 여지가 생긴다는 점에서 이 소설이 인상적으로 다가왔어요.
양윤의 서울/지역, 부/가난, 실패한 가장/조숙한 딸, 남자/여자라는 구도가 여러번 겹치면서 2020년대 한국의 젊은 여성의 삶을 스케치하고 있는데요, 「탬버린」의 송이나 「가져도 되는」의 인희와 조명아처럼 수평적인 친구관계를 그릴 때 인물이 더 생생하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한편 마지막에 실린 「영국식 찻잔이 있는 집」은 결이 좀 다른 것 같아요. 일본식 공포물 같다고나 할까, 위악적인 가족관계를 그리다보니 현실성이 떨어진 경우로 볼 수도 있을 테고, 작가의 새로운 모색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전반적으로는 우리가 경험했을 것만 같은 장면이 곳곳에 있고, 그런 디테일들이 독자의 공감을 얻지 않을까 싶어요. 이런 면을 봐도 이후 작품들이 기대가 돼요.
김혜진 『불과 나의 자서전』(현대문학)
양경언 김혜진은 장편을 부지런히 쓰는 편입니다. 『9번의 일』(한겨레출판 2019)이 나온 지 얼마 안 되어서 또 새로운 경장편을 써냈어요. 가난한 남일동에서 주인공이 주해 모녀를 만나고 헤어졌던 일을 회고하는 소설입니다.
백민석 김혜진의 작품은 여기저기서 리뷰를 보아왔고, 기대하고 있었어요. 확실히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이 있는 작가더군요. 작품의 주된 공간으로 남일동을 두고 그 안의 사람들, 관계들을 이어서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방식이 좋았어요. 괜찮은 이야기꾼을 한명 만난 것 같습니다.
양윤의 ‘불과 나의 자서전’이라는 제목이 소설의 내용을 잘 드러내 보여준다는 생각입니다. ‘나의 자서전’임을 강조하듯 화자가 경어체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나, 중심이 되는 인물을 둘로 두고 하나는 남일동 밖으로 탈출하려는 사람으로, 다른 하나는 남일동에 터를 잡고 살려는 사람으로 구성함으로써 이들의 교차된 관점을 통해 서사를 구성한 것은 성공적인 전략으로 보입니다. 제목의 ‘불’도 마찬가지인데요, 보통 불은 내면의 열정이나 혁명의 열기를 상징하잖아요. 그런데 정작 ‘나’가 불을 지르는 장면이나 “번지는 불꽃”(166면)을 바라보는 장면은 그다지 열정적이지도, 혁명적이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경제적인 능력이 없는 ‘나’가 벌금까지 물면서 방화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