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

 

2000년대 시의 유산과 그 상속자들

2010년대의 시를 읽는 하나의 시각

 

 

신형철 申亨澈

문학평론가.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가 있음. poetica7@hanmail.net

 

 

1. 2000년대 한국시의 어떤 유산: 감응과 딕션

 

2000년대의 한국시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해주는 것은 결국 2010년대의 한국시다. 앞 세대가 남긴 유산 중에서 어떤 것은 상속되고 또 어떤 것은 거부되기 마련인데, 이 과정을 거치고 나면 앞 세대는 문학사에 입장할 때 그들 스스로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자리로 안내될 수 있다. 2000년대의 시들이 발표될 당시에 평론가들이 쏟아낸 말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선택’되고 ‘적자생존’하여 문학사 서술의 틀을 만드는 데 기여하게 되겠지만, 어쩌면 그들의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다음 세대의 냉정한 선택일 수 있다는 말이다. “하나의 새로운 예술작품이 창조될 때 일어나는 일은 그것에 앞서는 모든 예술 작품에도 동시에 일어난다. 현존하는 기념비들은 그들 사이에 어떤 이상적인 질서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 질서는, 어떤 새로운(진정으로 새로운) 예술작품이 그것들 사이에 도입되면서 수정된다.”(전통과 개인의 재능 1919) 인용하기도 새삼스러운 엘리엇(T.S. Eliot)의 이 말은 백년 전에 옳았듯이 지금도 옳다. 2010년대의 새로운 시인들의 첫 시집을 읽는 일이, 적어도 나에게는, 2000년대 시의 가장 결정적인 유산이 무엇인지를 되새기는 일이 되고 말았다.

 

우리에겐 특별한 날이잖아. 실용적인 주소록을 만들기로 해. 우린 모두 지쳤기 때문에 동의했어요. 무섭게 조용해졌는데, 전화벨이 울렸어요. 내가 모임에 빠진 거 애들이 아니? 이해해. 우린 너무 많아졌으니까. 나는 앰뷸런스에 실려 가는 중이야. 지옥행을 시도했거든. 

—김행숙 「친구들—사춘기 6」 부분

 

우히히, 정말 장난이 아니었어. 사람들은 귀신 들린다고들 하지만 사람에게 먹힌 귀신에 대해 들어봤니? 히히히, 그래서 늙은 귀신들은 사람을 피해서 다녔지만 내가 세상에 귀신으로 남은 이유는 순전히 사람을 피해서 우회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지. 재밌어, 어떤 나무나 어떤 오토바이 어떤 전봇대 ……에 비길 수 없이 사람을 그냥 통과할 때, 단숨에 어떤 一生이 한 줄로 정리될 때, 정말 이 된 기분이야. 얼레리꼴레리

—김행숙 「귀신 이야기 2」 부분

 

낮고 낮은 지붕 아래, 밤낮 가릴 것 없이

참 많은 죄 없는 사내들이 다녀갔네

풍만한 가슴의 여자들처럼 뼛속까지 미움을 받진 못했지만, 대야미의 소녀

침대가 주저앉을 정도로 톡톡히 미움을 받았죠, 즐거워라

즐거워서 노래를 다 불렀죠

 

(…)

 

키스해줘요 그곳에 불이 나도록

그곳이 못 쓰게 되도록 멍해지도록

내 뺨을 내 뺨을 갈겨봐요

당신이 쏘고 싶은 구멍에 대고

당신을 당신을 털어놔봐요

장전(裝塡)했나요? 장전했어요?

—황병승 「대야미의 소녀—황야의 트랜스젠더」 부분

 

언제나 당신들이 옳았다는 것을……

 

변기에 얼굴을 처박고 나는 생각했다

당신들의 비슷비슷한 외모 태도와 말솜씨

그런 것들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당신들의 주문이 옳았다는 것을 확신케 하고

될 수 있으면 나는 이런 식의 이야기들을

유니폼과 에이프런,

검은색과 흰색으로만 적고 싶었다

 

먹고 토하고 먹고 토하는 일에 대해

스탠드의 불빛이 흰 벽을 스치듯

식기와 찻잔을 나르는 일에 대해

수저를 주워 당신들의 테이블에 되돌려놓는

혼자만의 시간에 대해 

—황병승 「웨이트리스」 부분

 

이 두 사람의 시라면 어떤 것을 인용해도 좋을 것이다. 김행숙(金杏淑)이 아니었다면, 방금 자살을 기도해서 앰뷸런스에 실려 가는 한 소녀가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하는 말을, 살아 있는 인간들의 몸을 통과하는 일이 재미있어서 이승에 남기를 선택한 어느 귀신의 말을 우리가 들을 수 있었을까. 또 황병승(黃炳承)이 아니었다면, 남자로 살아가기보다는 학대를 받더라도 여자로 살기를 택한 어느 상처투성이 트랜스젠더의 고통스러운 반어의 말을, 조금 전에 변기에 얼굴을 처박고 토한 어느 지친 웨이트리스의 말을 들을 수 있었을까. 이런 시들이 더이상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김행숙과 황병승이 결국 승리했다는 뜻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한국시를 읽기 시작한 독자는 이 시인들이 한국시의 영토를 어떻게 얼마나 넓혔는지 가늠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이제와 다시 보아도 결정적인 것은 역시 이것이다. 2000년대의 어떤 시인들 덕분에 한국시는 ‘시인(1인칭)의 내면 고백으로서의 시’라는 일면적이면서도 지배적인 통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이제 시는 누구도 될 수 있고 무엇이건 말할 수 있다. 이런 시들로는 시인의 퍼스낼리티를 짐작하기 어렵다. 이것은 일종의 위조 신분증이다. 위조 신분증이 있으면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혼란이었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축제였을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무에서 창조된 유’였던 것은 아니다. 당장 ‘극적 독백’(dramatic monologue)이라 불리는 저 오래된 기법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시인 자신과는 명백히 다른 어떤 화자가 모노드라마의 주인공처럼 어떤 특정한 상황 속에서 말을 한다. 그런데 이 말은 순전한 혼잣말이 아니라 어떤 청자를 염두에 두고 이루어지는 발화인데, 청자가 직접 시 속에 끼어들지는 않지만 화자의 말을 통해 청자의 반응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화자는 한명인데도 연극적인 대화의 공간이 생겨난다는 점이 이 기법의 묘미다. 그래서 독백이되 극적인 독백이다.1) 낭만주의 시기에 이미 이 기법의 맹아가 나타났다는 견해도 있지만, 대체로 빅토리아 시대(1837~1901)를 대표하는 두 시인인 테니슨(A. Tennyson)과 브라우닝(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