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과 현장 | 연속기획 · 한국사 100년 다시 보기 ②

 

1960년의 마산과 1980년의 광주

분단과 지역대결하의 민주항쟁과 한국정치를 돌아보며

 

 

홍석률 洪錫律

성신여대 사학과 교수. 저서로 『통일문제와 정치사회적 갈등: 1953~1961』 『유신과 반유신』(공저) 등이 있음. srhong@sungshin.ac.kr

 

 

1. 50년 만에 거행된 김주열의 장례식

 

2010년은 4월혁명 50주년, 5·18 광주민주항쟁 30주년이 되는 해다. 여러 기념행사들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이명박정부하에서 민주항쟁을 기념하는 것은 무언가 긴장감과 아쉬움이 감돌기도 한다.

지난 4월 11일, 4월혁명 과정에서 사망한 김주열(金朱烈)의 장례식이 50년 만에 마산에서 치러졌다. 김주열은 1960년 당시 열일곱살의 전라북도 남원 출신 청년이었다. 그는 3월에 고등학교 입시를 치르기 위해 이모가 살고 있던 경상남도 마산에 왔다.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날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있었고, 경찰의 발포로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김주열은 이 시위에 참여했다가 실종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마산으로 와서 애타게 아들을 찾아다녔다. 마산시민들도 적극 호응하여 경찰과 관계당국을 압박하면서 김주열을 찾았으나 그는 보이지 않았다.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끔찍한 모습으로 마산 부두 앞바다에서 발견되었다. 마산의 시민들은 분개하여 다시 대대적으로 봉기했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2010년, 김주열이 참여했던 ‘3·15의거’는 국가기념일로 공식 지정되었다.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와 ‘4·11민주항쟁50주년기념행사준비위원회’는 4월 11일 마산의 중앙부두에서 김주열의 장례식을 ‘범국민장’으로 치렀다. 그런데 언론보도에 따르면 ‘3·15의거’ 국가기념일 지정을 대대적으로 홍보했던 경상남도와 마산시는 이 행사를 전혀 지원하지 않았다. 이 지역 국회의원들도 행사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범국민장은 시민들의 성금으로 치러졌다. 행사에는 김주열의 모교 남원 금지중학교와 그가 합격했으나 다닐 수 없었던 용마고등학교(옛 마산상고) 학생들이 참여해 눈길을 끌었다. 행사장에는 “열사정신 계승하여 동서화합 이룩하자”는 플래카드가 붙었다. 이날 마산의 시민대표로 발언에 나선 사람은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하다. 동서분열과 민족분단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고 개탄했다.

‘동서분열’, 즉 영·호남 지역감정 문제와 4·11마산항쟁은 무슨 관련이 있을까? 호남사람이 죽었는데 영남사람들이 이에 항의해 목숨 걸고 싸웠으니, 동서화합의 모범적 사례가 된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김주열의 장례식이 ‘동서화합’과 결부되어 기억되는 방식은 올해 30주년이 되는 광주민주항쟁에 대한 기억과 그후 더 악화된 지역대결 정치구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즉 4월혁명과 5·18항쟁의 기억이 서로 겹쳐진 측면이 있다. 이는 과거가 기억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다. 과연 1960년의 마산시민이 지금처럼 김주열을 호남사람, 자신들을 영남사람으로 구분하고 여기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을까?

4월혁명 무렵에는 지금과 같은 영·호남 지역대결은 거의 없었다. 전라도 출신 정치인이 경상도에서 국회의원을 하고, 또한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김주열의 출신지 남원과 전라도는 당시 마산시민에게는 어떤 특별한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키거나 유달리 의식될 필요도 없는 하나의 지명(地名)에 불과했을 것이다. 또한 당시에는 마산시민들도 지금처럼 자신을 경상도사람이라 규정하는 의식을 강하게 갖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마산시는 해방 직후에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많았고, 한국전쟁 후에는 이북과 이남 각지에서 몰려든 피난민들이 다수 정착한 도시였다. 군수기지, 피난민의 도시였기 때문에 경상도 토박이 외에 다른 지역 출신들도 많았다. 뒤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영·호남 지역감정 및 지역대결 정치구도가 본격화한 것은 박정희 군사정권기부터였다.

4·11마산항쟁이 동서화합과 연결되는 기억의 방식은 그후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민주항쟁과 분단극복은 어떤 연관을 맺고 있을까? 일부 사람들은 이를 민족주의의 기획이라 치부할지 모르겠다. 물론 과거에 대한 기억은 현재적 관점이 투영되고, 이를 통해 재구성된다. 그러나 기억의 형성을 단지 과거의 역사적 사실과 전혀 관련 없이 후대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조되거나 상상된 것으로만 규정하는 것은 지나치다. 특히 지역감정 문제를 영·호남 대립 같은 현상적 차원이 아니라 더 본질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또한 민족분단 문제도 좀더 깊이있게 성찰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지역감정 문제는 과거 독재정권기 한국의 유사 민주주의(pseudo democracy) 체제가 주조한 어떤 파행적 정치행태와 관련이 있다. 특히 이는 과거 개발독재권력이 근대화론, 성장주의 논리로 대중의 의식과 행동을 규율하며 각 지방간의 지역개발 경쟁을 조성해왔던 상황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분단문제도 단지 민족주의 문제라기보다는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를 제약하고 왜곡하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한국의 민주항쟁은 또한 이러한 문제들을 넘어서기 위한 실천의 과정이기도 했다.

이명박정부의 등장 이후 과거 독재정권기의 정치행태들이 다시 부활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 맞서 촛불시위라는 새로운 형태의 민주항쟁도 출현했다. 또한 4대강 사업에서 나타나듯 성장주의, 지역개발 논리도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남북관계는 후퇴의 정도를 넘어 최근 천안함 사건에서 나타나듯 남북의 무력충돌이 우려되는 상황으로까지 가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명박정부하에서 민주항쟁을 기념하며 지역대결 정치행태와 분단문제의 극복을 이야기하는 것은 여전히 의미있는 기억과 기념의 방식일 것이다.

 

 

2. 마산의 함성, 그후 20년의 광주

 

김주열의 죽음으로 촉발된 4·11 제2차 마산항쟁은 4월혁명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3·15 정·부통령 선거는 선거운동 과정부터 각종 부정이 대대적으로 자행되었기 때문에 선거 전부터 이에 대한 항의 시위가 발생했다. 1960년 2월 28일 대구지역 고등학생 시위를 시작으로 중고등학생들의 부정선거 항의 시위가 잇따랐다. 3·15 제1차 마산항쟁 이후 학생들의 시위는 다소 소강상태였다. 3월말에 봄방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된 4월 11일, 항쟁은 재점화되었다. 이날 학생과 시민의 시위에서 처음으로 “이승만 물러가라”는 구호도 나왔다. 마산시민들은 1980년 5월의 광주시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처참한 시신을 목격하고 잔인한 국가폭력에 분노하여 일시에 일체감을 이루고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시위는 12일과 13일에도 이어졌다.

마산의 항쟁은 전국적으로 호응을 얻었다. 중·고등학생들의 시위가 더욱 확산되고, 대학생들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4월 19일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의 도시에서 일제히 시위가 발생했다. 이날 서울의 시위대는 경무대(현 청와대)로 향했다. 그러나 시위대가 처음부터 이승만 대통령을 몰아내기 위해 간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당시 학생들은 이대통령을 만나 자신들의 요구조건을 전달하며, 대화하거나 항의하러 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이날 경무대 바로 앞에서 학생대표들이 대통령 및 내무장관과의 면담을 요청했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시위대에 총탄이 날아왔고,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이날 부산과 광주에서도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승만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봉쇄하려 했다. 그러나 군은 시위를 거칠게 탄압하고 봉쇄하기보다는 이승만정부와 거리를 두는 중립적 태도를 보였다. 군이 위기 상황을 이용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 대통령을 내몰고 권력을 잡을 수도 있다는 풍문이 나돌기도 했다.

대규모 유혈사태가 발생하자, 항쟁의 초점은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에서 유혈사태를 발생시킨 정부, 특히 최고지도자 이대통령의 책임을 묻고 퇴진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옮겨갔다. 정권퇴진을 명확히 목표로 내건 시위가 처음 시작된 곳도 마산이었다. 4월 24일 마산의 할아버지들은 “책임지고 물러가라 가라치울 때는 왓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그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