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3·1운동의 현재성: 100주년에 부쳐

 

3·1운동, 촛불혁명 그리고 ‘진리사건’

 

 

이남주 李南周

성공회대 교수, 정치학. 저서 『중국 시민사회의 형성과 특징』 『변혁적 중도론』(공저), 편서 『이중과제론』 등이 있음. lee87@skhu.ac.kr

 

 

2년 전 겨울, 주말마다 거리를 밝혔던 촛불들은 정당성을 상실한 권력을 탄핵하면서 사회변혁의 흐름을 만들어냈다. 이 극적인 변화는 촛불혁명으로 규정되곤 했고, 2017년 5월 조기대선을 거쳐 출범한 문재인정부도 촛불혁명의 계승을 공언했다. 그리고 100주년을 앞둔 3·1운동을 혁명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학계에서는 이 주장이 수년 전부터 제기되었지만 최근에야 사회적 관심과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1 이는 우리 사회에서 이념적 프레임에 의해 불온시되었던 혁명이라는 개념이 촛불혁명을 경유하면서 사회의 대전환에 대한 갈망을 담아내는 표현으로 수용되기 시작한 변화와 관계가 있다. 따라서 혁명으로 규정 가능한지 여부와는 별개로 3·1운동의 성격을 둘러싼 논란은 촛불혁명의 의미를 더 풍부히 하고 사회의 대전환과 관련한 정치적 사유를 진전시킬 수 있는 계기를 내포한다. 그렇지만 3·1운동을 혁명으로서 소환하는 것이 단순히 이 정치운동의 표피적 측면, 특히 저항의 형식을 낭만화하는 방식으로만 진행되면, 이는 사회적 대전환에 대한 열망이 높아진 시기에 일시적으로 이루어진 언어유희에 그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보다 혁명의 이름으로 소환하고자 하는 정치적 상상은 무엇인가를 점검함으로써 사회 대전환에 대한 사유를 활성화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촛불혁명의 성격과 촛불혁명이 나아갈 길을 더 분명하게 밝힐 수 있다.2

 

 

1. 국민주권을 소환한 3·1운동과 촛불혁명

 

3·1운동과 촛불혁명의 연결은 단순히 3·1운동이 100주년을 맞이한다는 외생적 계기에 의해 주어진 것만은 아니다. 촛불항쟁이라는 저항방식이 3·1운동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인식은 꽤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있는데, 이를 넘어 두 정치운동은 한국 근현대사에 매우 중요한 작용을 했던 정치적 이념과 지향을 공유하고 있다. 최근 3·1운동을 혁명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학계의 주장은 이를 계기로 조선의 왕권정치가 사실상 종결되고 민주공화제가 독립국가의 정치모델로 확고히 자리를 잡았고, 이러한 지향이 대한민국의 건국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주요 논거로 삼는다. 예를 들어 1919년 4월 임시정부가 제정한 대한민국임시헌장의 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제로 함”이다. 그리고 임시정부가 국내의 한성지부, 노령의 대한국민의회와 통합을 이루면서 제정한 대한민국임시헌법(1919.9.11)의 제2조는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인민 전체에 재함”이라고 되어 있다.3

그리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이자 촛불혁명을 상징하는 구호다. 대한민국 헌법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헌법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거리에서 이 구호가 다시 등장한 것은 분명히 의미심장한 일이다. 헌법조항이 거리에서 외쳐지는 것 자체가 낯선 현상인데 하필이면 100년이라는 시간을 건너뛰어 두 정치운동이 같은 구호로 연결된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기서 이 연결이 정치적 낙후의 표상인가, 아니면 어떤 새로운 가능성의 표현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민주공화’라는 이념이 어느 정도는 상식화된 현대사회에서 이 이념이 계속 소환되는 현상은 정치적 낙후성의 증거로 보이기 쉽다. 실제로 한국정치의 문제점을 서구에 비해 낙후된 정치제도에서 찾는 발상이 우리 사회에서도 꽤 일반적이다. 그러나 서구 정치의 오늘이 우리 정치의 내일이 되어야 한다는 사고는 두가지 면에서 우리 현실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갖게 한다. 첫째, 한국의 정치발전이 서구와는 다른 경로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외면하게 한다. 식민주의와 분단체제가 한국사회에 미치는 제약을 고려하지 않으면 3·1운동에서 촛불혁명까지 민주와 공화라는 이념이 어째서 계속 호소력을 발휘하는지 이해하기 어렵고, 이러한 호소력이 갖는 에너지를 활용하기도 어렵다. 둘째, 이러한 저항이 지닌 가능성을 제대로 포착하기 어렵게 한다. 대의민주주의 혹은 법의 지배라는 형식은 민주주의 혹은 국민(인민)주권이라는 이념 내부의 해방적 성격을 거세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그나마 형식적 영역, 주로 대의제에서 이룬 진전마저 최근 심각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반면 촛불혁명은 거리에서 민주공화라는 이념을 소환하고 그와 관련한 사회적 논의를 촉발함으로써 인류사회를 근대에 진입시켜놓고도 현재는 폐쇄된 것처럼 보이는 ‘정치적 가능성’을 다시 열었다. 따라서 민주공화라는 구호는 낙후성의 표현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3·1운동과 촛불혁명의 이러한 내적 연관성은 촛불혁명 이후 직면한 문제의 성격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정치적 사유의 길을 열어준다.

이 사유를 진전시키는 데 바디우(A. Badiou)의 ‘사건’과 관련한 논의가 유용한 참조점을 제공한다. 사건이라는 개념은 사회의 질적 전환을 매우 단절적으로 설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우선 바디우는 상황과 존재구조에 대립하는, 즉 “상황이, 그리고 그 속에서의 일상적 행동방식이 설명할 수 없는 것”,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방식을 결정하도록 강요하는” 것을 ‘사건’으로 정의했다. 그렇지만 사건에 의해 새로운 존재방식이 바로 확립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건이 소환하는 주체가 사건적인 잉여적 부가물의 관점에서 상황에 관계하는 것을 ‘충실성’으로, 그 충실성이 상황 속에서 생산하는 것을 ‘진리’로 지칭한다.4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역사에서 새로운 질서의 수립은 급격한 정치적 변동과 함께 완료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대한 공적 선언(주체화)과 사건적 충실성에 의해 지탱되는 진리공정을 통해서 실현된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 혁명이라고 일컬어지는 여러 진리사건도 진리공정을 촉발하는 계기였지, 그것이 초래한 정치사회 변동이 진리의 온전한 실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심지어 사건-이후의 과정은 선형적 발전이 아니며 중단이나 심각한 퇴보도 겪곤 한다. 3·1운동도 하나의 진리사건으로 도래했고 국민(인민)주권의 선언과 그에 대한 충실성이 지탱하는 역사적 시퀀스가 진행되어왔다. 촛불혁명은 그 시퀀스에서 또 하나의 고양기이자 그 자체로 진리사건적 의미를 갖는다. 촛불혁명의 특별한 의미는 과거의 민중항쟁·시민항쟁과는 달리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정착되었다는 인식이 지배적인 상황에서 다시 민주주의와 국민주권을 소환하는 대규모 시민항쟁이 진행되었다는 데 있다.[5. 쌔뮤얼 헌팅턴(Samuel P. Huntington)은 신생 민주주의의 공고화는 ‘두번

  1. ‘3·1혁명 95주년 기념 학술회의’(2014.2.26)에서 이 주장이 처음으로 진지하게 제기되었다. 관련 내용은 이 회의의 발표문과 토론문을 모은 『3·1혁명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 결성식: 95주년 기념 학술회의』, 3·1혁명100주년기념사업준비위원회 2014 참고.
  2. 백낙청은 촛불혁명을 혁명으로 규정하면서도 이를 전통적 혁명과는 다른 새로운 성격의 혁명(“비혁명적 방식에 의한 혁명적 과업의 성취”)으로 설명했다. 이처럼 시민들의 평화적 직접행동을 기초로 하는 사회적 전환은 한국적 현상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종래의 혁명개념에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서는 백낙청 「‘촛불’의 새세상 만들기와 남북관계」,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와 Nak-chung Paik, “South Korea’s Candlelight Revolution and the Future of the Korean Peninsula,” The Asia-Pacific Journal Vol.16 No.3(2018.12.1) 등 참고.
  3. 이준식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념적 지향」, 『인문과학연구』 24(2017) 67~69면.
  4. 알랭 바디우 『윤리학』, 이종영 옮김, 동문선 2001, 54~56면. 앞으로는 일상적 용어로서의 사건과 바디우적 용법에서의 사건을 구분하기 위해 후자는 ‘진리사건’으로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