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박정요

1956년 전남 해남 출생. 1989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장편 『어른도 길을 잃는다』가 있음. buruhana@hanmail.net

 

 

 

 

 

5호선 전철을 타고 그녀가 광화문역에 도착했을 때 약속시간은 이미 십분이나 지나 있었다. 앞으로 십분 안에 약속장소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그때까지 남편이 그 자리에 앉아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남편은 성질 급하고 화를 잘 내는 사람이었다. 남편은 아마도 지금부터 이삼초 간격으로 시계를 보다가 그녀가 도착할 즈음엔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거나, 벌써 일어나 자리를 뜨고 없을지도 모른다. 행여 기다려준다 하더라도 약속시간 하나도 못 지킨다고 잔소리를 해댈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뭔가를 변명하고 쩔쩔매는 시늉을 해야만 한다.

그녀는 에스컬레이터에서도 뛰고 계단에서도 뛰었다. 간편한 화장도구와 수첩과 지갑과 집 열쇠와 핸드폰이 들어 있는 가방은 짐짝처럼 무거웠다. 더구나 그녀는 바지 길이에 맞추느라 통굽 신발을 신고 있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쿵쿵 지축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목구멍에선 용가리처럼 화염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일이십분만 더 일찍 서둘렀어도 이런 걱정이나 초조감, 그리고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은 없었을 것이다. 매번 후회하지만 어떻게 된 노릇인지 그녀는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자기 인생이 아닐까 생각해본 적도 있었다.

그녀는 지금 회사에서 월차까지 받아 남편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운명을 결정할지도 모를 중대한 고백을 하러 가는 것이다. 고백할 장소로는 남편의 회사 앞에 있는 까페가 적당할 것 같았다. 선을 보고 결혼하기까지 짧은 기간 동안 자주 만나던 장소였다.

그러나 오늘은 불임 상담을 받기 위해 병원예약이 되어 있는 날이기도 했다. 결혼하고 3년이 지났는데도 아기가 없는 것이다. 남편과 함께 정밀검사를 받고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있다면 어떤 치료방법이 필요한지 등등을 알아보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결혼 전에 이미 임신을 경험한 적이 있다. 철부지 시절 부모님 몰래 저지른 무모한 사고였다. 스물한살 너무 어린 나이인데다 상대방에 대한 확신도 없어서 아기를 지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자 그녀는 인생을 다시 살듯 용기를 내어 결혼이란 걸 하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기대하는 아기가 생기지 않았다.

그녀는 혼자서 병원에 찾아가보았다. 의사가 뜻밖에도 낙태경험이 있느냐고 물었다. 인공유산 후유증으로 골반 염증성 질환을 심하게 앓았고 그래서 나팔관이 유착되었다는 것이다. 골반 초음파검사와 나팔관 조영술까지 거쳐서 샅샅이 알아보았지만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염증성 질환을 심하게 앓았다는데도 그녀 자신은 별 기억이 없었다. 온몸이 항상 무거웠고 언제나 우울했으며 뭔가가 늘 죽을 만큼 괴로웠다는 것밖에, 특정 부위의 특별한 고통은 기억에 없었다. 그것은 그녀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의 몸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남편과 시부모에게는 물론이려니와 친정 부모에게도 굉장한 충격이 될 것이었다.

그녀는 가족들 몰래 수술을 받기로 했다. 유착된 나팔관을 뚫어주는 수술이었다. 혼자서 돈을 마련하고 날을 잡아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단순한 막힘이 아니라 관 자체가 손상을 입은 거여서 회복이 안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차일피일 세월만 보냈다.

시어머니가 기어이 들고 나섰다. 그동안 기다리다 한계에 달한 모양이었다. 세상이 아무리 달라졌어도 자손은 꼭 봐야 하며, 한살이라도 젊을 때 서둘러야 한다는 것이다. 시부모와 따로 살고 있긴 하지만 남편은 외아들이었다.

시어머니는 모닝콜하듯 아침마다 전화해서 병원에 가보라고 한동안 조르더니 집에까지 쫓아와 다그치기도 했다. 평소엔 사이가 별로 안 좋아서 어머니가 하는 말이면 귓등으로 듣는 척도 않던 남편도 아기 이야기만큼은 숨소리가 유난히 조용해지면서 새겨듣는 눈치였다. 아기를 원하는 만큼의 반응이었다.

병원예약은 그녀가 끼어들 새 없이 급속도로 이뤄졌다. 시아버지 생신에 모인 가족들이 먹고 마시고 대홧거리가 바닥나자 그녀의 불임문제를 집중 토로했다. 그 자리에서 시어머니의 다짐을 받은 큰시누이가 다음날 바로 산부인과 간호사인 자기 시누이를 통해서 상담예약을 해버린 것이다. 그사이에 남편은 지방출장을 다녀왔다.

웬일인지 밖은 지하도보다 더 어두웠다. 삼십여분 전 그녀가 지하철을 타기 위해 지하도로 내려갈 때만 해도 밖은 화창한 날씨였다. 그새 어디서 먹구름이 몰려왔는지 한바탕 소나기라도 퍼부을 기세였다.

약속장소는 종로에 있었다. 그녀는 평지에서도 행인들 사이를 헤치며 달음질했다. 그렇게 비각 옆을 돌아 종로로 향할 때였다. 갑작스런 빗줄기가 기어이 땅을 치며 눈앞을 어지럽혔다. 바께쓰로 퍼붓는 듯한 사나운 소나기였다. 그러자,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길을 가득 메우며 걸어가던 사람들이 일제히 팔을 치켜들고 자동우산을 펼쳤다. 연습을 많이 한 매스게임처럼 똑같은 동작들이었다. 교보 옆 돌벤치에 앉아 있던 연인들도 앞으로 총! 하듯 팔을 쳐들더니 팡팡 하고 우산들을 펼쳤다. 길은 금세 방실방실한 우산꽃으로 물결을 이루었다. 쌕쌕거리면서 비를 맞고 가는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오늘 낮에 소나기가 올 거라는 정보는 어디에서도 접한 적이 없었다. TV나 신문의 정보가 아니더라도 그녀의 몸이 알아서 일기예보를 하기도 했다. 뿐 아니라 집을 나설 때면 무심한 가운데서도 수상한 날씨는 금방 감지가 되고, 우산을 준비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늘의 기미를 살피며 결정을 내리게 됐다.

오늘 집을 나설 때 하늘은 화창하기 그지없었다. 전철이 여의도를 지나 한강 위를 달릴 때는 반짝거리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햇빛이 강물 위로 미끄럼을 타는구나 중얼거리며 정말 예쁘고 평화스럽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소나기는 갑자기 어디에서 몰려온 것이며, 저 많은 사람들은 어디에서 정보를 얻었길래 저렇게 정확하게 팡팡 우산을 펼쳐들고 방실방실한 매스게임을 벌이며 가는 걸까.

드라이기를 치켜들고 팔이 빠져라 공들인 머리는 뺨으로 목덜미로 달라붙었다. 얼굴을 씻어내린 빗줄기가 가슴의 고랑을 타고 배까지 흘러내렸다. 그녀는 달리느라 바쁜 와중에도 자신의 몰골을 훑어보았다. 이런 몰골로는 남편과 마주앉아 있기도 힘들 것 같았다. 하지만 빗줄기는 아랑곳없다는 듯 그녀의 몸뚱이를 줄줄 타고 잘도 흘러내렸다. 아주 신이 난 것처럼 툭툭 투두두둑 하면서 그녀의 머리통을 두들겨댔다. 감기며 산성비 같은 말에 겁을 먹기 시작한 이후 정말 이렇게 흠뻑 비를 맞아본 지가 언제인지 몰랐다.

그런데 그녀는 감기며 산성비 같은 말이 떠오른 순간 갑자기 달리던 발길을 멈추었다. 언젠가 바로 이와 똑같은 상황에서 똑같은 느낌, 똑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눈을 뜰 수 없도록 세찬 장대비 속으로 달려가면서 감기며 산성비 같은 말에 겁을 먹기 시작한 이후 이렇게 비를 흠뻑 맞아본 지가 언제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에 겹쳐서 어떤 무더기진 상념들이 한꺼번에 섬광처럼 지나갔다. 달리느라 저절로 벌어진 입속으로 빗방울이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데도 목구멍은 화염을 토한 듯 칼칼했고 발바닥이 불에 덴 듯 뜨겁던 상황까지 똑같다.

그녀는 그제야 이왕 늦은 걸 어쩌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 지나고 나면 남편과 자신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지 지금은 상상할 수 없다. 약속시간이니 지각 같은 사소한 것으로 헉헉거릴 계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상상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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