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문학의 정치성을 다시 묻는다

 

소설의 정치성, 몇가지 풍경들

김연수 권여선 공선옥

 

 

정홍수 鄭弘樹

문학평론가. 평론집으로 『소설의 고독』이 있다. myosu02@hanmail.net

 

 

1. 정치의 귀환

 

서양문학에서 현실 재현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에리히 아우어바흐(Erich Auerbach)의 『미메시스』(Mimesis: The Representation of Reality in Western Literature)를 읽다보면 역사와 사회의 변화하는 움직임 속에서 구체적인 인간 현실을 포착하는 리얼리즘의 소설적 출현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우발적이고 의식적인 진퇴의 시간이 필요했는지, 자못 아연한 느낌마저 든다. 물론 분리에서 혼합으로 나아간 스타일의 변화를 통해 ‘리얼리즘’의 역사를 추적하고 있는 그의 분석은 ‘사실주의’의 협애한 시야는 분명 벗어나 있지만, 모더니즘과의 대결을 거치며 그것의 극복까지 지향하게 된 보다 창조적인 ‘리얼리즘 문학’의 세계를 감당하기에는 한계가 뚜렷한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장구한 시간 속에 추적하고 있는 스타일의 역사가 단지 형식적인 차원의 굴곡진 전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좀더 깊고 넓은 시야에서 파악하게 된 인간 인식의 확대와 발전의 역사이며, 동시에 민주주의를 포함하는 인간 현실의 역사적 진전 그 자체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리얼리즘으로서의 문학의 원천과 역사를 확인하는 감흥은 전혀 만만한 것이 아니다. 특히 그 역사의 흐름이 근대에 이르러 소설문학의 자기확립으로 집중된 점을 상기할 때, 소설의 발생과 전개에 힘들게 기입되고 뿌리내린 리얼리즘의 지향을 우리 자신의 망각의 정치로부터 방어하는 일만으로도 그의 기여는 되풀이 참조할 만하지 싶다.

한참 해묵은 이야기를 서두에서 꺼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근자 문학의 정치성을 둘러싼 논의가 활발하고, 지금 이 자리도 그에 이어져 ‘소설과 정치’ 혹은 ‘소설의 정치성’을 생각하며 최근 소설들을 검토해보라는 요청 속에 마련된 것이다. 물론 최근의 이런 문제제기는 한가롭게 문학원론적 과제를 되새기다 나온 것이 아니다. 논의의 한가운데 민주주의의 퇴행이라는 당장의 한국 정치현실이 있고, 외부를 생각하기 힘든 신자유주의의 숨막히는 세계현실이 있다. 그리고 그 현실의 한복판에서 시와 정치를 한몸에 담고자 하는 한 시인의 간곡한 물음이 있었다.1 이후 이 글에서 제기된 문제와 관련해 많은 비평적 논의가 펼쳐졌음은 아는 대로다. 특히 지난호 『창작과비평』 지면에서 신형철(申亨澈)은 그간의 논의들을 다시 검토하면서, 진은영(陳恩英) 시인이 처음 제기했던 질문의 급박함이나 시적 모험의 현재성이 ‘시와 정치’라는 원론적이고도 ‘사변적인 논의’에 막혀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을 피력하기도 했다.2 시에서 ‘정치적인 것’과 ‘정치학적인 것’을 구분하자는 그의 제안은 그 질문의 긴박성과 대면하기 위한 비평적 고민의 산물이며, 유념할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치학적인 것’ 다음에 ‘정치적인 것’이 오는 식으로 시의 ‘정치성’이 순차적이거나 계기적으로 실현될 수는 없는 일이고보면, 이 방법적인 구분 이후에도 시와 정치의 절합(節合)은 여전한 난문으로 남는다. ‘시와 정치의 제휴’를 ‘가능한 불가능성’의 시각에서 사유하자는 글의 결론이 그 어려움을 웅변하는 듯하다.

이 질문을 소설 쪽으로 가져온다고 해서 명쾌한 답이 주어질 리는 만무하다. 서두에서 소설의 역사에 새겨진 리얼리즘의 지향을 『미메시스』의 특별한 노고와 통찰에 기대어 환기해보고자 했지만, 당장의 한국소설에서 현실과 창조적으로 교섭하는 미학적 경로를 ‘소설의 정치성’과 관련지어 찾아보는 일은 또다른 과제일 수밖에 없다. 가령 그 리얼리즘의 지향을 ‘리얼리즘 문학’의 정치적 함의와 도덕적 정열을 의식하는 차원에서 되새기려고 하는 경우에도, 그 양상은 모더니티의 본격적 전개와 다양한 차원에서 부딪치고 교섭한 20세기 한국소설의 다단한 전개를 고려할 때, 한층 복잡한 인화(印畵)의 과정을 거칠 수밖에 없으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80년대 한국문학’의 시간으로부터 세번의 십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제 한국소설을 80년대적 의미에서 ‘정치’를 의식하며 읽고 쓰는 일은 드문 경우가 되었다. ‘리얼리즘 문학’의 실천적 지향이 포괄하려 한 인간해방의 ‘정치’는 문학의 자리든 삶의 현장이든 적잖이 힘을 잃었다. 사실 인간해방의 정치가 그 대문자 지위를 상실해가는 과정은 수많은 ‘정치’가 발견되고 호명되고 생겨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인간해방의 정치는 어느 면 억압의 자리로 전도되었고, 이 역사의 아이러니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길을 잃었다. 말할 것도 없이 이 아이러니를 주도한 것은 담론이나 문학의 장(場)이 아니라 불패의 지위에 오른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역사현실 그 자체였다. 신자유주의의 한국 점령을 실질적인 수준에서 완수한 구제금융사태 이후 우리 모두는 경제적 동물의 불안을 경쟁적으로 내면화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문자 정치의 실종과 함께 삶의 미시적인 차원에서 많은 억압의 기제가 발견되고 호명되었지만 그 ‘작은 정치들’이 일종의 무력감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좀더 근본적인 적대의 전선이 요지부동이었고 오히려 강화일로였던 작금의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해방적인 대문자 정치가 사라지고 공공의 아고라가 텅 빈 자리에 들어선 ‘생활정치’(life-politics)의 성세(盛勢)에서 개인의 자율과 자유를 추구할 자원과 수단이 제약되고 제거되는 역설을 보고 있기도 하거니와,3 대문자 정치와 공공의 아고라를 새로운 차원에서 회복하는 일은 ‘작은 정치들’의 정치성을 제대로 보존하고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점점 더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것은 촛불과 ‘애도의 정치’가 열어젖힌 아고라의 새로운 공간, 그 낯선 가능성을 생각할 때, 현실의 긴절한 요청이기도 한 것 같다. 소설과 정치의 관계가 새삼 문학적 화두가 되어야 한다면, 아마도 이러한 맥락 어름일 것이다. 문제는 지금 한국소설의 현장일 텐데, 김연수 권여선 공선옥의 몇몇 작품을 언급해보려 한다. 산만하고 단편적인 논의일망정, 지금 문제되고 있는 맥락에서 ‘소설과 정치’를 생각하는 작은 단초라도 찾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2. 쉽게 발화되지 않는 정치성: 김연수

 

진은영 시인이 시의 미학과 정치적인 전언 사이의 불편한 서걱거림을 고민하면서 시와 정치의 문제를 제기했음은 두루 아는 바다. 그런데 소설가 쪽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고민이 토로된 적이 있다.4 김연수(金衍洙)는 작년말 한 좌담에서 자신의 단편소설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

  1. 진은영 「감각적인 것의 분배: 2000년대의 시에 대하여」, 『창작과비평』 2008년 겨울호.
  2. 신형철 「가능한 불가능: 최근 ‘시와 정치’ 논의에 부쳐」, 『창작과비평』 2010년 봄호.
  3. 지그문트 바우만 『액체근대』, 이일수 옮김, 강 2009, 77~83면 참조.
  4. 이어지는 인용에서 알 수 있듯, 표면적으로 김연수는 미학 이전에 ‘사실’이라는 벽을 문제삼고 있다. 그러나 결벽성이나 작가적 겸손을 접고 보면, 정치성의 직접적 수용을 힘들게 하는 소설 미학의 문제로 김연수의 발언을 읽는 것도 가능할 것 같다. ‘비슷한 맥락’이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