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 갈림길에 선 한국 시와 시비평

 

꽃들은 세상을 버리고

다른 서정들

 

 

이장욱 林洪培

시인. 시집『내 잠 속의 모래산』과 주요 평론으로「오감도들」등이 있음. oblako@hanmail.net

 

 

서정의 인공정원

 

흔한 말이지만, 지금은 서정의 시대가 아니다. 오늘의 삶과 세계는 전래의 서정적 어법으로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다. 이제 후위(後衛)에 남은 서정시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의 도원(桃源)을 이루는 것 정도인지도 모른다. 그 서정의 공간이 도원인 것은 그곳이 무슨 이상향이기 때문이 아니라, ‘전체’이자 ‘모든 것’인 일인칭의 영혼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서정은 만상을 일인칭의 내면적 고도(高度)에 걸어두는 방식이다. 그 고도에는 시인 자신조차 없다. 왜냐하면 전래의 서정이 전제로 삼는 ‘시인’이란, 어쩔 수 없이 왜소할 수밖에 없는 현대적 실존을 벗어나 모종의 ‘전체’에 투신한 자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의 세계에는 파편적이며 오염된 채 존재하는 실재의 만상과 만상에 대한 감각이 들어설 여지가 별로 없다. 서정의 어법은 끊임없이 바깥의 세계와 바깥의 언어를 밀어낸다. 그것은 신화가 언제나 우주 전체를 대상으로 삼아서 제 바깥에 다른 사물과 다른 신화를 상정하지 않는 것과 같다. 전래의 서정은 마음의 신화를 구축하는 방법이며, 이것으로는 전체나 본질 같은 관념과 무관하게 스스로 천변만화하는 오늘의 세계와 시인 자신을 보여주기 어렵다. 왜 서정시가 세계와 시인을 보여주어야 하느냐고는 묻지 말자.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시인의 개인적 의무나 의지 같은 것이 아니라, 서정시의 미적 특성과 그 풍경이다.

이 글의 목적은 오늘의 서정이 ‘다른 서정’에 이르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반(反)서정’이 아니라 ‘다른 서정시들’을 위해 씌어진다. 먼저 한 편의 시를 인용하고 싶다. 이 시에는 서정의 정형과 변형이 공존한다. 서정이 자신의 ‘도원’을 이루자, 그 ‘도원’을 무너뜨리기 위한 세계의 습격이 시작되는 풍경.

 

목련화 그늘 아래서 아니면, 인적이 끊긴 광화문쯤의

                                  오피스 환기구였는지도 몰라

그대와 나라고, 하면은 금방 아닌 것 같은 그대들

술잔에 붉은 입술을 찍어

어린애 손바닥만한 꽃의 육질을 열어

좋은 안주로 삼았었지

                                  그대는 ‘깜찍이 소다’를 마시고

짐짓 취한 척

성냥을 건네주던 그대의 손을 혹은, 라이터

스치며 지는 꽃잎처럼, 흐르던 穀雨

淸明도 지나고 雨水는 이미 오래전 일

그날 잊지 않으려

마음속으로만 무수히 되뇌던 시를

취한 듯, 꿈인 듯, 끝내 적어두지 못해

다시는 꽃이 진 나무 아래를 찾지 못하는 冬至

小雪과 大雪 동안은 놀고

가장 긴 밤에 나는 하염없이

잠든 나무의 이름을 찾아 헤매었지 잠든 나무?

(우리는 누구나 서로의 슬픈 미래를 본 적이 있다)

단오에는 내가

어떤 향기로 그대의 머리를 감겨주었던가?

바람에 꽃잎을 날리던 立夏와 小滿 사이

白露와 霜降의 햇빛도

소용없이 빈 마당에 떨어지는 가좌아파트 베란다

 

꽃들은 세상을 버리고

봄을 잊은 나무는 괴롭게

저절로 깊은 세상을 열어두겠지

―함성호 「꽃들은 세상을 버리고」(『너무 아름다운 병』, 문학과지성사 2001) 전문

 

작은 글씨들을 지우고 읽는다면 이것은 전형적인 서정시이다. ‘그대와 나’를 둘러싼 저 ‘목련화 그늘’은 서정적 우주의 다른 이름이다. 그대를 향한 나의 괴로움과 그리움이 그대와 나로만 이루어진 이 우주의 동력이다. 아마도 정말 평화로웠을 그대와 나의 한때를 위해, ‘목련화’와 ‘꽃의 육질’과 ‘곡우’ ‘청명’ ‘우수’, 그리고 바람에 날리는 ‘꽃잎’들이 호명된다. 이 아득한 만상들은 이제 서정적 감성이 유발하는 일인칭의 리듬을 통과하면서 서서히 기화한다. 지상의 중력이 사라지자 모든 것은 화자의 리듬 안에서 몸의 무게를 잃는다. 그것들은 휘발된다. 마지막 연에서 화자의 괴로움과 그리움이 잠언적인 구절로 종결되는 순간, 그대와 나를 둘러싸고 있던 만상들은 드디어 이 서정적 우주의 소품으로 완성된다. 이제 ‘목련화 그늘’은 꽃의 그늘이 아니라 마음의 그늘이며, ‘곡우’와 ‘청명’과 ‘우수’는 구체적인 시간을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영원을 흘러간다. 결국 모든 것은 저 서정적 화자의 내면 풍경을 대리하기 위해 인입된 것이다. 드디어 꽃들이 “세상을 버리고” 떨어지는 순간, 꽃에 대한 서정적 화자(〓시인)의 압도적인 지위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된다. 그저 떨어질 뿐인 꽃잎은 화자가 부여하는 의미를 대리하는 ‘세상의 모든 꽃잎’이 된다. 당연하게도, 세상을 버리고 떨어진 것은 꽃잎이 아니라 화자의 마음이며, 이는 서정시의 일반적인 문법에 해당한다. 서정시는 사물과 세계에 대한 서정적 자아의 우위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이 시의 제목을 빌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꽃들은 세상을 버리고, 결국 화자의 마음속으로 떨어진다.’ 꽃들이 세상을 버리고 떨어지는 이 마음의 우주는 지나치게 순수한 것이어서, 모든 순수가 그러하듯 폭력적인 방식으로 혼탁한 사물성을 거세한다. 이제 시는 일관된 가치와 의미와 정서를 점유한 서정시인에 의해 단 하나의 지평만을 보여준다. 이 지평에는 하나의 가치와 하나의 세계와 하나의 전체만이 가능하다. 아무리 겸손한 어조를 지니고 있더라도, 서정성은 어쩔 수 없이 권위적이다.

물론 이것은 작은 글자(‘소문자’)를 지웠을 때의 이야기다. 당연하게도 이 시의 핵심은 저 서정적 ‘대문자’에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저 ‘대문자’와 ‘소문자’ 들이 이루는 간극이다. 첫 행에서 ‘목련화 그늘’이라는 서정적이며 관례적인 배경은 “인적이 끊긴 광화문쯤의 오피스 환기구”에 의해 극단적으로 취소된다. 광화문과 오피스 환기구가 창출하는 산문적이며 실재적인 공간성은 서정적 전언을 위해 대상을 도입하는 일반적인 문법에 균열을 부른다. 그것은 다음 행의 ‘그대와 나’ 역시 마찬가지다. ‘그대와 나’는 ‘그대와 나’라고 말하는 순간 부정되고, ‘그대’라는 서정시의 어휘는 ‘그대들’이라는 산문적이며 냉소적인 문체의 도전을 받는다. ‘술잔’과 ‘깜찍이 소다’, ‘성냥’과 ‘라이터’의 대립 역시 서정성의 취소, 혹은 약화에 기여한다. 급기야, “잠든 나무의 이름을 찾아 헤매었지”라는 서정적 어조는 “잠든 나무?”라는 직접적인 구어적 반문에 부딪힌다. 이제 저 대문자의 권위는 전복된다. 완결되었던 만상이 갑자기 지상으로 떨어지자, 서정의 우주, 혹은 마음의 인공정원은 파괴된다. 그러자 문득, 그대와 내가 보인다. 그대와 나는 지상으로 추락한 시의 지평에서 ‘괴롭게’ 다시 만난다.

나는 이 시의 대문자와 소문자를 다소 도식화하여 해석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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