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3·1과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백낙청 白樂晴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창작과비평』 명예편집인. 최근 저서로 『문명의 대전환을 공부하다』(공저) 『백낙청 회화록』 『2013년체제 만들기』 『문학이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 등이 있음.

paiknc@snu.ac.kr

 

 

1. 여는 말

 

이 글은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주최로 열린 ‘3·1운동100주년기념 국제컨퍼런스’(2019.2.25)에서 강연한 내용을 비교적 큰 폭으로 수정·보완한 것이다.1 주최 측에 처음 전달한 제목은 ‘3·1운동과 한반도식 나라만들기’였는데 발표가 임박해서 ‘3·1과 한반도식 나라만들기’로 바꾸었다. 3·1운동인가 3·1혁명인가 하는 논란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익숙한 대로 3·1운동이라는 표현을 썼다가, 강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혁명’을 수긍하는 쪽으로 더 기울었기에 ‘3·1’이라는 중립적 표현을 쓰기로 한 것이다.2 실은 ‘운동’이라는 표현을 ‘혁명’으로 바꿀 근거가 충분치 못하다는 학계 다수 인사들의 주장에 공감하는 바도 없지 않고, 운동이냐 혁명이냐 하는 논란이 별로 생산적이지 않다는 일부의 비판이 수긍되는 면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호칭에 관한 논란이 아니고 3·1의 성격과 ‘혁명’의 의미를 되묻는 계기가 된다면 더 밀고 나갈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21세기 한국의 ‘촛불혁명’이 혁명의 이름에 실제로 값한다는 주장을 펼쳐온 나로서는 ‘3·1혁명’ 개념을 진지하게 검토할 책임마저 있다. 물론 촛불이 혁명이므로 3·1도 혁명이어야 한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지만, 촛불혁명이 다시 성찰하게 만든 혁명 개념을 3·1과 관련해서도 더 발전시키고 점검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창작과비평』 2019년 봄호 특집의 권두를 장식한 임형택(林熒澤)의 다음 주장을 일단 출발점으로 삼아보자.

 

3·1은 한국 근대의 본격적인 출발 지점이다. 그렇기에 이 지점은 한국 근현대가 안고 있는 대립 갈등의 발원처이기도 하다. 3·1은 문자 그대로 거족적이어서 혁명적 영향력을 폭넓게 불러올 수 있었다. 하지만 대단히 유감스럽게도 이후로는 명실상부한 거족적인 움직임은 재연되지 못했다.(「3·1운동, 한국 근현대사에서 다시 묻다」 16면)

 

이는 한국의 ‘근대’에 관한 논의와 3·1 이후 운동들의 진행에 관한 논의를 동시에 촉구하는 발언이다. 편의상 두번째 문제를 먼저 다루고자 하는데, 성찰의 초점은 3·1 자체보다 3·1이 꿈꾸었던 국가건설의 과제에 두기로 한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한반도 근대의 나라만들기는 단계적으로 진행되어왔고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 단계적 건국이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건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근대 한반도 특유의 역사로 인해 유난히 긴 세월에 걸쳐 유난히 복잡한 경로를 밟게 되었고, 국민국가의 형색을 상당부분 갖춘 두개의 정부가 남과 북에 자리 잡았지만 3·1이 요구한 의미의 ‘대한독립’ ‘조선독립’에는 여전히 도달하지 못하고 있다.

 

 

2. 3·1과 나라만들기

 

근년의 한국에서 ‘건국’을 둘러싼 논쟁은 대한민국이 헌법 전문에 나오는 대로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으므로 올해가 건국 100주년이 되느냐 아니면 1948년 8월 15일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정식 건국으로 보느냐 하는 문제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후자는 이명박·박근혜 정부가 8월 15일을 ‘건국절’로 선포하려는 시도와 함께 내세운 입장임에 반해, 촛불항쟁으로 정권교체를 이룬 현 정부는 헌법 전문의 입장을 강조하여 3·1과 임정 100주년을 대대적으로 기념하고 있다.

8·15 건국절 추진은 임시정부 계승에 대한 헌법규정은 물론 3·1과 그후의 항일독립운동 전체를 폄하하면서, 단독정부 수립을 주도하고 이후의 독재정권에 가담한 친일인사들을 대거 건국공로자로 삼으려는 정치적 책략을 내장했다는 점에서 애당초 진지한 학문적 고려의 대상이 되기 힘든 것이었고 촛불혁명으로 추동력을 상실한 형국이다. 그러나 ‘임정이냐 48년이냐’라는 대립구도는 처음부터 논의의 폭을 너무 좁히고, 설혹 일부에서 우려하듯 또 하나의 관제 건국일을 만들려는 시도는 아니더라도3 한반도에서의 나라만들기 작업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게 한다. 또한 나라만들기의 과정에서 1948년의 남한정부 수립이 어떤 이정표가 되는지도 정확하게 가늠하지 못한다.

기미독립선언문 자체는 그 발표 날짜를 ‘조선건국(朝鮮建國) 4252년 3월 1일’로 기록했다. 그 무렵 대종교(大倧敎)를 중심으로 보급되던 단기(檀紀)를 사용한 것이다.4 상해 임시정부가 1919년 4월 11일에 마련한 ‘대한민국임시헌장’ 제7조는 “대한민국은 신(神)의 의사(意思)에 의하여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며 나아가 인류의 문화 및 평화에 공헌하기 위하여 국제연맹에 가입함”이라고 했는데, 이때 ‘신의 의사’가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아마도 환웅(桓雄)의 아들 단군왕검이 신시(神市)를 연 ‘의사’, 곧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을 말하는 것일 게다. 역시 그때를 조선건국의 시기로 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 1941년의 ‘대한민국건국강령’과 8·15 후 김구(金九) 주석의 여러 발언을 보면 상해 임정은 단계적 건국관을 고수했음을 알 수 있다.5

그에 반해 이승만(李承晩)은 초대 대통령이 된 뒤에도 ‘민국 30년’을 말하며 기미년을 대한민국 원년으로 표현했다. 그 점에서 이승만을 떠받드는 건국절 추진론자들과 대비되는데, 그렇다고 그가 임시정부 법통 계승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당시 임정세력의 대표는 김구였고 백범은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여 5·10총선에도 불참했기 때문이다.6 알려져 있다시피 ‘임시정부’가 헌법 전문에 처음 등장한 것은 87년 헌법이었다.

1941년 11월 28일 임정이 선포한 ‘대한민국건국강령’이 제시한 건국과정은 세단계로 구성되었다. (1) 독립선언, (2) 복국(復國=국토의 회복), (3) 건국(온전한 정부수립). 거듭 말하지만 건국을 단계적 과정이자 미완의 과제로 설정한 것이다. 물론 복국에 임정세력의 기여가 적어 국토분단을 막지 못하고 두개의 단독정부가 수립되는 기이한 단계가 오리라 상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건국이 단계적으로 실현되는 일 자체는 역사에 드물지 않다. 미국의 경우 1776년 7월에 독립을 선언했지만 1781년의 요크타운 전투를 치르고서야 독립전쟁의 승리가 확정되었고 영국이 13개 주의 독립을 승인한 것은 1783년 9월 4일의 빠리조약을 통해서였다. 아메리카합주국(合州國) 정부가 출범한 것은 그로부터 다시 6년이 지난 1789년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건국기념일을 따로 두지 않고 1776년의 독립선언에 맞춰 7월 4일을 ‘독립기념일’로 축하하고 있다. 프랑스도 1789년 7월 14일 바스띠유 습격 뒤 첫 공화국이 성립한 것은 1792년이다. 그후 나뽈레옹의 황제정치, 왕정복고 등등의 곡절 끝에 제정 또는 왕정으로의 복귀 위험이 사라진 것은 제3공화국 수립(1870)에 와서였는데, ‘건국’의 시기를 그렇게까지 늦출 필요는 없지만 근대국가 프랑스의 나라만들기가 단계적으로 진행된 것만은 분명하다.

한반도 남쪽(또는 북쪽)에서만 일어나는 변화가 아무리 획기적이라도 그 자체로는 임형택이 말한 ‘거족적’ 운동인 3·1의 나라만들기 기획에 부응했달 수 없다. 상해 임시정부도 항일운동의 모든 세력을 대표한 것은 아니지만 목표는 어디까지나 한반도 전체를 통치하는 국가였다. 그런데 현실은 남북으로 갈린 단독정부의 수립이었을 뿐 아니라 북은 김일성(金日成)의 항일투쟁에 거의 배타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전혀 다른 건국관을 유지하고 있다. 건국의 초석을 놓은 만주의 무장투쟁은 1926년 김일성에 의한 ‘ㅌㄷ’(타도제국주의동맹) 결성에서 시작되었고 1948년 9월 9일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으로 건국이 완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1997년에는 김일성의 생년(1912)을 원년으로 삼는 주체연호 내지 주체력(主體曆)을 채택하기도 했다. 그 셈법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각 계기의 의미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남북이 균일할 필요는 없으며, 남측의 임시정부 강조가 한반도 절반에서만 인정된다는 한계를 어떻게 넘어서서 3·1이 실제로 출범시킨 범한반도식 나라만들기를 완수할지 고민해야 한다. 북을 배제하는 논리로 ‘임시정부 법통’을 내세우는 일은 재고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단계적이고 아직 진행 중인 한반도식 나라만들기라는 구도 속에서 ‘법통논쟁’이 아닌 실질적인 기여도—나라만들기에 대한 이제까지의 기여와 앞으로 예상되는 기여—차원에서 검토하며 합의의 폭을 넓혀나가야 할 것이다.7

 

 

3. 근대의 이중과제와 일제하의 ‘변혁적 중도주의’

 

3·1을 한반도에서 아직껏 재연되지 못한 거족적 혁명운동으로 규정한 임형택은 “3·1은 한국 근대의 본격적인 출발 지점이다”라고도 주장했다. ‘근대’는 세계사적 개념이므로 3·1이 거족적일뿐더러 근대의 본격적 출발 지점이기도 하다면 이는 3·1의 중요성을 한층 부각시키는 논리가 된다. 아니, 주체적 운동을 통해 근대의 출발이 이루어졌다면(“한국인의 근대정신은 3·1운동으로 깨어났다”〔같은 글 15면〕) 그것 자체로 혁명의 이름에 값한다 할 것이다. 다만 ‘본격적’이라는 수식어의 의미에 따라 주장의 수위가 달라질 수 있는데, 여기서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근대’의 개념을 어떻게 설정하느냐는 것일 게다.

세계사적 시대구분상의 ‘근대’는 자본주의시대로 규정해야지 안 그러면 ‘근대성’(곧 근대의 이런저런 특성)을 둘러싼 끝없는 논란에 휘말리어 엄밀한 학술적 토론이 거의 불가능해진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이는 비교적 분명한 사실인데도 ‘근대’의 개념을 둘러싼 소모적 논쟁이 끊이지 않는데, 그 이유는 첫째 많은 논자들이 ‘자본주의’를 괄호쳐버린 담론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고, 동시에 ‘근대’ ‘근대성’ ‘현대’ ‘현대성’이 식별되는 우리말(및 다른 동아시아 언어) 위주로 사고하는 대신에 그 네 단어의 의미가 뒤섞인 modernity라는 서양어에 의존하기 때문이기도 하다.8 역사적 시대구분으로서의 자본주의시대인 ‘근대’와 어느 시점이든 당대인에게 가장 가까운 시대로서의 ‘현대’가 혼동되고 근대 또는 현대의 이러저러한 특성으로서의 ‘근대성’과 ‘현대성’ 논의도 뒤섞여 들어와 혼란이 빚어지는 것이다.

아무튼 근대를 자본주의시대로 설정하면 1876년 병자수호조약으로 한반도가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편입된 시기가 한국 근대의 출발점이 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는 타율적인 근대전환이었으므로 주체적인 근대화작업과는 거리가 멀었다. 억지로 끌려들어간 결과 근대에 적응하지 못해 고생이 막심했고 드디어 국권상실로까지 이어졌다. 3·1이 한국 근대의 ‘본격적인 출발점’이라면 그때부터 근대에 대한 우리 민족과 민중의 주체적 적응 노력이 본격화했다는 뜻일 테다. 임형택의 표현대로 “한국인의 근대정신은 3·1운동으로 깨어”난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 노력은 3·1 이전 및 이후 근대에 대한 여러 주체적 대응의 맥락 속에서 검토할 일이다.9 주체적 대응 가운데는 근대 자체를 거부하는 움직임도 있었는데 이들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는 역사의 큰 흐름과 동떨어져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시류에 맞서 그들 나름의 대의에 목숨을 건 기개는 결코 폄하할 수 없으며, 강렬한 민족주의 정서를 대표하면서도 국수주의가 아닌 유교적 보편주의를 내세운 점도 특기할 점이다. 반면에 비록 타율적으로 부과된 근대지만 이에 주체적으로 적응하여 어엿한 근대국가를 건설하려는 ‘개화파(開化派)’는 다시 두 흐름으로 나눌 수 있다. 곧,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라는 쿠데타를 통해 자주적 근대화를 서두르려던 급진개화파와 이들의 실패 이후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을 주도한 온건개화파가 그들이다. 개화파는 1905년 이후의 애국계몽운동에서도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10년의 국권상실로 그들의 근대적응 노력 또한 일단 실패했다고 봐야 한다. 다만 식민종주국이 된 일본이 원래 근대화·서구화의 모범생 격이었으므로 개화파의 흐름은 이런저런 변주를 거치면서 식민지시대를 통해 오히려 입지를 넓혀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조선조 말기에 또 하나의 중요한 주체적 대응 시도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곧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인데, 남한의 급진운동권이 학계의 담론에도 큰 영향을 행사하던 1980년대만 해도 ‘척사·개화·농민전쟁’의 3자구도를 설정하고 그중 농민전쟁을 가장 중시하는 경향이 강했다. 다만 이때 강조된 것은 ‘동학’보다 ‘농민전쟁’—‘종교의 외피를 쓴’ 농민전쟁—이었다. 이후 급진운동권의 퇴락과 더불어 이런 담론은 점차 사라지고 결국 척사론에 대한 개화론의 압도적 우세가 기정사실처럼 되다가, 근년에 와서야 “근대전환기를 개화냐 척사냐 하는 구도에 가두어 결과적으로 개화파를 승인하게 만드는 관행을 깨고 개벽파를 이 시기의 핵심 주체로 새롭게 구성해내는 작업”10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나 자신이 역설해온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를 중심으로 평가한다면, 한말의 척사·개화·개벽 3파 중 그나마 이중과제론적 문제의식이 뚜렷하고 실행도 무시할 수 없었던 것이 개벽파인데,11 이렇게 볼 때 동학농민전쟁에서 ‘동학’의 중요성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니, 3·1혁명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단순히 천도교 교단과 교도들의 대대적 참여를 기억하는 일을 넘어, 동학운동과 농민전쟁을 거친 민족이기에 그러한 대규모 민중운동이 가능했고 동학의 개벽사상이 있었기에 민주공화주의로의 전환과 새로운 인류문명에 대한 구상이 한결 수월했음을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덧붙여 여성의 참정권을 규정한 ‘대한민국임시헌장’의 선진성도, 직접적인 원인은 무엇보다 여성들의 대대적인 만세운동 참여였겠지만, 동학과 증산도의 남녀평등사상에서 그 중요한 뿌리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12

그럴 경우 3·1이 한반도에서 주체적 근대적응의 출발점이라는 명제도 3·1이 근대극복 노력의 본격적 출발이기도 했다는 명제를 동반해야 한다. 개항 이전부터 준비해온 한반도의 이중과제 수행이 이때 드디어 본격화되었는데, 근대극복 노력을 포함하는 이중과제의 일부로서만 근대적응이 장기적 성공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후의 진행에서도 독립을 아예 포기한 개량주의나 급진개화파의 한 변형에 가까운 교조적 맑스주의·공산주의13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임형택이 홍명희(洪命憙)를 원용하며 말하는 “‘바른 길로 바르게 나가는’, 즉 정도의 중간길”(앞의 글 30면)을 택한 운동가·사상가들이야말로 근대적응이라는 기준에서도 최적의 길을 찾았다고 볼 수 있겠다. 실제로 기미독립선언문도 천도교·기독교·불교 지도자들의 합작품이었고 이후 민족운동의 전개과정에서도 ‘변혁적 중도주의’의 선구자라 부름직한 인사가 많다. 도산 안창호(1878~1938), 불교사회주의를 제창한 만해 한용운(1879~1944), 우사 김규식(1881~1950), 몽양 여운형(1886~1947), 조소앙(1887~1958, 소앙 조용은), 벽초 홍명희(1888~1968), 민세 안재홍(1891~1965) 등은 하나같이 후대에 마주하기 힘든 거인들인바, 여기에 거인임에 틀림없지만 원래는 우편향이 두드러진 편이다가 말년에 남북협상과 좌우합작에 나선 백범 김구(1876~1949)도 당연히 추가해야 할 것이다.14

이들의 노선을 현대 한국의 정치지형에 적용되는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용어로 표현하는 것이 무의미하지 않을 듯하다. 일본의 식민지체제에 대해 개량 아닌 변혁(곧 독립)을 수행하되 양 극단을 배제한 ‘정도의 중간길’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렇고, 오늘의 변혁적 중도주의가 식민지시대로 소급되는 뿌리를 지녔음을 상기하는 점에서도 그렇다. 다만 이때 경계할 점은, 일본의 철권통치 아래 평화적인 독립운동이 심각하게 제약된 상황에서 나라 안팎의 무장투쟁·폭력투쟁을 폄하하는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되리라는 것이다. 실제로 독립운동의 노선과 그 방법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했지만 본질적으로 평화사상가이던 안중근(安重根) 의사를 비롯하여, 의열단의 지도자이면서도 독립운동에서 좌우합작을 추진한 약산 김원봉(1898~1958)도 노선으로는 중도임이 분명하며 통일전선운동의 중요 인물이었다.15 아니, 설혹 중도주의를 거부한 경우라 해도—아나키즘으로 나아간 우당 이회영(1867~1932)과 단재 신채호(1880~1936)를 쉽게 떠올릴 수 있는데—그들의 헌신과 공헌은 높이 평가해 마땅하다.

이론적으로 더 흥미로운 문제는 국내운동과 국외운동의 바람직한 관계가 어떠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오게 마련인데, 한반도의 경우 국내운동도 국외운동도 연합국의 승리에 크게 기여하지 못한 채 8·15해방을 맞았기 때문에 그 질문에 답할 역사적 자료가 미비한 셈이다. 다만 성찰의 방편으로 추론해본다면, 변혁적 중도주의의 선구자들이 집결하여 국내외 운동에 이념적 지도력을 행사하는 가운데 국외의 운동도 연합국의 승리에 좀더 기여하게 되었더라면 해방 후의 혼란도 한결 덜했을 것이고 분단의 비극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현실에서는 여운형(呂運亨)의 건국동맹이 그나마 일정한 조직과 세력을 갖추었고 8·15 직후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이어졌지만 미군정에 의해 해체된데다 몽양계와 공산주의 세력의 갈등으로 변혁적 중도주의 노선을 제대로 확립하지도 못했다. 그런 점을 고려할 때 도산이 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1891~1943)을 방문하여 그의 경륜에 찬사를 보낸 것도, 일찍부터 이론과 세력을 갖춘 거의 유일한 국내 조직이 소태산(少太山)이 이끌던 불법연구회(佛法硏究會, 훗날의 원불교)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만남에 대한 원불교 측 기록은 경전의 한 대목으로 남았다.

 

안 도산(安島山)이 찾아온지라, 대종사 친히 영접하사 민족을 위한 그의 수고를 위로하시니, 도산이 말하기를 「나의 일은 판국이 좁고 솜씨가 또한 충분하지 못하여, 민족에게 큰 이익은 주지 못하고 도리어 나로 인하여 관헌들의 압박을 받는 동지까지 적지 아니하온데, 선생께서는 그 일의 판국이 넓고 운용하시는 방편이 능란하시어, 안으로 동포 대중에게 공헌함은 많으시면서도, 직접으로 큰 구속과 압박은 받지 아니하시니 선생의 역량은 참으로 장하옵니다.」 하니라.16

 

방문이 이루어진 1936년 2월 당시, 도산은 국내외로 유명한 58세의 민족지도자였고 소태산은 40대 중반으로 전국적으로는 무명인사에 가까웠는데, 도산이 굳이 소태산을 찾아가고 후자는 여러명의 감시 경찰관을 달고 다니는 도산을 기꺼이 만난 것은 양쪽 모두 뜻한 바 있어서였을 것이다. 어찌 보면 이 사건은 ‘개벽을 향해 열린 개화파’와 ‘개화를 수용한 개벽파’의 상징적 만남이랄 수 있다.17

아무튼 3·1 이후의 운동들이 좌우의 대립으로 갈라진 현실이 그 자체로 운동의 진전에 해당하는 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분열된 운동세력을 ‘정당한 중간길’로 다시 통합하는 일이 절실했던 상황에서, ‘근대의 이중과제’라는 일관된 잣대로 각각의 사상과 노선을 평가하는 일이 긴요하다.18 이로써 통합의 가능성을 찾아내기가 쉬워질 뿐 아니라 그러한 통합에 기여한 인사와 운동을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으리라 본다.

 

 

4. 촛불혁명과 3·1혁명

 

2016~17년의 대규모 촛불시위와 그에 따른 한국사회의 변화를 과연 혁명이라 부를 수 있을지에는 아직 합의가 없다. 촛불혁명은 ‘고전적’ 혁명개념과 거리가 있음은 물론, 대한민국의 역사에서도 4·19나 6월항쟁처럼 정권교체를 넘어 새로운 헌법체제를 재빨리 만들어낸 사건에도 미달하는 면이 있다.19

3·1과 견준다면 어떨까? 3·1이 총독부 지배를 종식시키지 못한 데 비해 촛불은 현직 대통령을 퇴출하고 어떤 의미로는 대한민국 최초로 민주적 헌정을 실행할 길을 열었다. 반면에 앞서도 지적했듯이 3·1은 거족적 운동이었던 데 비해 촛불항쟁은—4·19나 6·10과 마찬가지로—남한에 국한된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여전히 3·1혁명의 수준에 못 미치는 면이 있다.

그런데 촛불시위를 중심으로 전개된 촛불항쟁이 촛불혁명의 제1기에 해당한다고 파악한다면, 한반도의 남북을 아우르는 분단체제에 발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한층 혁명적이고 ‘거족적’인 변화를 달성할 가능성이 아직 열려 있는 형국이다. 2018년 이래 남북관계의 극적인 진전과 그해 6월 북·미 화해의 시작은 ‘거족적 항쟁’과는 다른 차원의 범한반도적 변화를 기대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3·1이 ‘근대적응의 본격적 출발’로 인정받는 것도, 비록 독립된 근대국가의 건설은 망명 임시정부의 형태로밖에 달성하지 못했으나 주민생활 전역에 걸쳐 본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고 민중의 주체적 역량이 크게 향상되었기 때문일 테다. 1968년에 프랑스의 5월 봉기를 포함하여 세계 도처에서 벌어진 반체제운동들이 국가권력 탈취에 성공한 예가 드문데도 ‘68혁명’이라 불리는 것 역시 사상·문화의 발본적 변화와 민중적 주체역량의 증대를 가져온 까닭이다.

여기에 3·1운동이 표방하고 크게 보아 실행하기도 한 비폭력 항쟁 방식도 단순히 고매한 이상(理想)의 발로였다거나 현실적인 약점이었다는 시각과는 달리 볼 여지가 있다. 21세기에 와서 돌이켜보면, 세계 혁명사에서의 더 큰 변화의 시작, 김종엽(金鍾曄)이 촛불혁명을 두고 말했듯이 “혁명에도 스스로에 대한 유토피아가 있”고 “폭력 없는 축제인 혁명”20에 대한 꿈이 있는데 그 꿈의 현실화가 시작된 대사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직접적인 영향관계는 없지만 3·1과 간디의 불복종운동 초기는 동시대 현상이었고, 중국의 5·4운동보다는 오히려 앞서면서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어쨌든 촛불항쟁으로 실현된 남한의 정권교체가 남북관계의 획기적 개선으로 이어지고 한반도 전역에 걸친 민중역량의 비약적 증대를 이룬다면 이는 ‘혁명’의 이름에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촛불혁명은 “한국 근현대가 3·1에 진 채무”(임형택, 앞의 글 36면)를 드디어 갚게 될 것이다. 아니, 100년의 지체 끝에 실현되는 채무이행은 전에 없던 감수성의 확장과 3·1혁명이 미처 전망하지 못한 지평도 열어주게 마련이다.

감수성의 변화는 아무래도 논설보다 문학작품을 통해 잘 드러나는데 그 문제를 길게 논할 자리는 아니다. 『창작과비평』 2018년 겨울호의 평론 「주체의 변화와 촛불혁명: 최근의 몇몇 소설들」에서 그러한 논의를 내놓았던 한기욱(韓基煜)은 3·1운동 특집을 꾸민 2019년 봄호의 머리글에서 황정은(黃貞恩)의 최근작 『디디의 우산』(창비 2019)을 언급한다.

 

『디디의 우산』에 수록된 중편 「d」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에서 눈여겨볼 것은 혁명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특이한 방식이다. 작가 나름의 새로운 혁명 개념을 제시하기보다 기존의 혁명운동이나 혁명관을 삐딱한 각도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게다가 그 비스듬한 시선으로 보이는 형상과 움직임을 그대로 진술하기보다 서사화하고 비평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낡은 세계의 제도·정동·사유에 침윤되지 않은 혁명 개념을 재구성하도록 이끈다.(「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디디의 우산』을 읽고」 2~3면)

 

낡은 세계의 제도·정동·사유에 침윤된 온갖 반응들에 대한 작가의 신선하고 예리한 비판은 독자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1996년의 연세대 투쟁과 2014년의 세월호참사 등을 2016~17년의 촛불항쟁과 하나의 서사 속에 묶음으로써 촛불혁명이 대중의 누적된 학습의 결과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학습과정을 통해 배운 촛불시민의 평화적 시위에 대한 갈망에는 상처의 경험이 포함되어 있음을 날카롭게 짚어낸다.

 

누군가 다치는 광경을 우리는 너무 보았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게 아니었을까. 누구도 다치게 하지 말라, 우리는 이미 너무 겪었다고.(『디디의 우산』 309면)

 

다만 헌법재판소의 탄핵판결로 혁명이 도래했다거나 완성되었다는 ‘사람들의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는 일은 그 자체로 필요하면서도 그것만으로 촛불혁명에 충분히 부응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혁명이 도래했다는 오늘을 나는 이렇게 기록한다”(317면)라고 작가는 끝머리 가까이서 말하는데, 그러나 혁명의 ‘도래’와 ‘완성’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촛불항쟁의 탄핵쟁취로 혁명이 ‘도래’했지만 혁명의 ‘완성’을 향한 긴 여정이 비로소 시작된다는 생각으로까지 나갈 대목이며, 한반도체제의 변혁을 가져올 혁명의 진행에 따라 제도·정동·사유의 더욱 발본적인 변화를 전망하고 탐색할 대목인 것이다.

국가에 관해서도 기존의 국가 행태를 비판하고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를 부정하는 일을 넘어 어떤 국가기구를 창의적으로 건설해서 촛불혁명을 완성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3·1의 염원이던 단일형 국민국가(unitary nation-state)의 수립은 촛불혁명 이후에도 가능하지 않으려니와 촛불시민이 꿈꾸는 새세상의 기준으로는 오히려 낡은 관념일 수 있다. 완전한 통일보다 점진적·단계적·창의적인 한반도 재통합 방안을 강구할 때이며, 비핵화라는 현안 자체가 남북에 현존하는 두 국가의 상호인정과 평화공존을 전제하되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의 표현대로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것을 인정”하는 방식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동서독이 1972년에 채택한 기본조약에도 없던 조항이며, 남북이 함께 유엔 회원국이 된 후에 이룩한 합의라는 점에서 국가연합을 추진하는 매우 특이하고 창의적인 방안인 것이다.

이후 6·15공동선언(2000)과 10·4선언(2007)으로 그 작업이 한층 구체화되다가 이명박·박근혜 시대에 정체와 역진을 보였다. 그러나 촛불항쟁과 판문점선언(2018.4.27), 9월 평양선언 등으로 재개되어 큰 흐름으로 자리 잡았고 현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본격화하고 있다. 나는 남북연합, 그것도 ‘낮은 단계의 남북연합’만 실현되어도 불가역적인 한반도 재통합의 ‘제1단계’에 해당한다고 주장해왔다.21 이는 곧 한반도식 나라만들기의 당면한 다음 단계가 될 것인데, 지난호 특집에서 이남주(李南周)는 남북연합의 중요성을 이렇게 부연한다.

 

남북연합은 두가지 다른 차원의 속성을 내포한다. 하나는 남북이 국가 자격으로 국제사회 활동에 참여하는 것과 내부에 대한 주권적 통치권을 상호인정하는 국가 간 관계로서의 속성이다. 이와 함께 민족공동체 의식을 기초로 양자의 재통합을 추구하는 특수관계이다. 특수관계적 속성은 단순히 민족통일이라는 당위성에서 비롯하지는 않는다. 남북분단이 초래한 상호적대 및 그 재생산을 뒷받침하는 정서와 사회적 기초를 청산해가는 작업은 분리의 법적 승인이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화해와 협력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진전이 없으면 국가 간 관계의 규범에 기초한 관계의 안정성도 항상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앞의 글 73~74면)

 

근대세계에 국가연합의 선례가 적지 않지만 지금 이곳에서 진행되는 이런 남북연합의 건설과정이야말로 “낡은 세계의 제도·정동·사유에 침윤되지 않은” 사고와 행동 그리고 감수성을 요구하는 것 아니겠는가.

국가연합이 나라만들기의 최종 단계는 아닐 것이다. 더욱이나 ‘낮은 단계의 연합’이라고 할 때는 더 높은 단계 연합의 존재를 상정한 것이고, 어차피 그 방향으로 지속되는 나라만들기의 동력을 그때 가서 멈추는 일도 쉽지 않을 터이다. 다만 완전한 통일국가 건설을 최종 목표로 미리 설정할 필요는 없다. 점진적·단계적 진행은 현실여건상 불가피하기도 하려니와, 그러한 진행이야말로 민중참여의 폭을 최대한 넓히는 길이며 그에 따라 확대되는 민중의 역량과 지혜는 무엇이 후천개벽시대의 한반도에 가장 걸맞은 수준의 정치공동체인지를 찾아낼 것이고 3·1혁명조차 뛰어넘는 세계사적 성취를 이룩할 것이다.

 

 

  1. 국문·영문 두 언어로 된 강연원고는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주최 3·1운동100주년기념 국제컨퍼런스(2019.2.24~27, 롯데호텔서울) 자료집 『3·1운동의 의미와 동북아 평화를 위한 한반도 미래 구상』에 수록되었고, 영문본은 『창작과비평』 홈페이지(http://magazine.changbi.com/en/articles/89775?board_id=2487)에도 게재되었다.
  2. 강연 준비를 위해 선행연구 중 참고한 것은 3·1혁명100주년기념사업준비위원회 『3·1혁명95주년기념학술회의 자료집』(2014)에 수록된 이만열 교수의 기조강연과 이준식 박찬승 임경석 서희경 등의 논문, 김정인 『오늘과 마주한 3·1운동』(책과함께 2019), 한인섭 「‘3·1운동’이야말로 대한민국을 태동시킨 혁명」(한국일보 2019.1.2) 등이었다. 『창작과비평』 2019년 봄호는 임형택 「3·1운동, 한국 근현대사에서 다시 묻다」, 백영서 「연동하는 동아시아와 3·1운동: 계속 학습되는 혁명」, 이남주 「3·1운동, 촛불혁명 그리고 ‘진리사건’」 세편으로 ‘3·1운동의 현재성: 100주년에 부쳐’ 특집을 짰는데, 강연 준비 막바지에 출간되어 충분히 숙독하고 활용하지 못했다. 이번에 재독하며 한층 생산적인 후속논의로 만들고자 했고, 새로 참조한 다른 문헌들은 본고에서 필요한 대로 적시할 것이다.
  3. 최근 역사문제연구소·역사학연구소·한국역사연구회가 공동주최한 학술회의에서는 딱히 관제 건국일 혐의를 씌운다기보다 정부가 임정법통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 국가주의 강화와 불필요한 역사전쟁을 초래한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았다(『국가 정통론의 동원과 ‘역사전쟁’의 함정』, 역사문제연구소 외 학술회의 자료집, 2019.4.12). 이러한 경고를 일면 수긍하면서도 임시정부의 역사적 의의를 과소평가할 것도 아니라는 주장으로 고명섭 칼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어떻게 볼 것인가」(한겨레 2019.5.1) 참조.
  4. 도진순은 “연호와 나라의 건국연도는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역사와 기억: 건국연도와 연호, 그 정치적 함의」, 『역사비평』 2019년 봄호 397면)고 역설하면서, 대한제국과 이후 여러 독립운동 세력뿐 아니라 외국의 사례들도 상세히 검토하고 있다.
  5. 이에 대해서는 도진순의 논의가 상세하며 치밀하다(같은 글, 특히 제3절 ‘임시정부의 「건국강령」과 김구의 건국론’ 참조).
  6. “‘1919년 건국론’은 기나긴 논쟁에서 오해되어온 것처럼 김구와 임시정부가 주도하고 이승만‘마저도’ 그렇게 따라간 것이 결코 아니다. 이승만‘이야말로’ 이 기억의 창시자이자 주도자였”다(도진순, 같은 글 417면). 그에 앞서 서희경도 제헌국회 당시 상해의 임정보다 1919년 4월 23일에 결성된 ‘한성임시정부’를 중시한 이승만의 독특한 입장을 거론한 바 있지만(「해방후 ‘3·1운동’에 대한 인식과 국가정체성」, 『3·1혁명95주년기념학술회의 자료집』 112~13면), 이승만이 한편으로 단정수립에 반대한 김구에 맞서고 다른 한편으로 유엔 감시하 총선거를 거부한 북조선을 공격하기 위해 ‘민국 30년’설을 적극적·주도적으로 주창한 점을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았다.
  7. 백영서는 남과 북의 3·1관의 차이 역시 단계적으로 극복될 것을 전망한다. “주체사관에 입각한 북쪽의 3·1관과 남쪽의 그것 사이에는 분기가 분명히 존재한다(특히 임정 평가가 그렇다). 그러나 역사인식의 차이를 ‘생산적 자극물’로 적극 활용하면서, 낮은 수준의 ‘차이의 공존’을 거쳐 높은 수준의 ‘인식의 공유’로 향상해가는 역사화해의 여정에 민족과 민주라는 공통 화두를 제공하는 3·1의 기억은 유용하다.”(「연동하는 동아시아와 3·1운동」 60면) 북측의 3·1관에 대해서는 김정인 「북한은 3·1운동을 어떻게 생각할까」, 『오늘과 마주한 3·1운동』 269~73면 참조.
  8. 이와 관련해서 졸고 「근대, 적응과 극복의 이중과제」, 송호근 외 『시민사회의 기획과 도전』, 민음사 2016, 252~54면 및 영어권 독자를 위해 새로 정리한 Paik Nak-chung, “The Double Project of Modernity,” New Left Review 95, September/October 2015, 65~66면 참조. 또한 백낙청 외 『문명의 대전환을 공부하다』, 창비 2018, 81면도 참조.
  9. 임형택은 3·1의 배경이 되는 19세기의 민요(民擾)·민란과 민회, 1893년 동학도들의 보은집회, 1894년의 동학농민전쟁, 이후의 의병활동과 애국계몽운동 등을 상기시킨다(앞의 글 20~23면).
  10. 황정아 서평 「‘개벽’이라는 대담한 호명」, 『창작과비평』 2019년 봄호 457면. 개벽파를 이 시기의 핵심 주체로 새롭게 구성해내는 작업을 정면으로 시도한 것은 서평의 대상이 된 조성환 『한국 근대의 탄생: 개화에서 개벽으로』(모시는사람들 2018)인데, 다만 서평자도 지적하듯이 “서구적 근대를 규정하는 핵심 요소이자 그런 근대의 극복에 있어서 핵심 난관인 자본주의 문제에 이렇다 할 언급이 없는 점은 이 책의 커다란 공백”이며, “그런 점에서 ‘개벽’을 서구적이든 한국적이든 ‘근대’에 매어두지 말고 차라리 ‘근대극복’의 전망과 연결하되 그 도정에서 근대화의 압력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묻는 편이 저자의 문제의식에도 더 부합하리라”(같은 글 459면)는 지적은 경청할 만하다.
  11. 관련된 논의로 백낙청 외 『문명의 대전환을 공부하다』 중 박맹수 발제(215~18면) 및 후속논의(242~43면) 참조. 임형택은 “동학농민전쟁은 19세기의 역사변화를 추동한 민요 형태 농민저항의 정점이자 종점이었다”(앞의 글 23면)고 평가하지만 개벽사상보다는 농민저항운동의 측면을 더 중시하는 느낌이다.
  12. ‘임시헌장’ 제3조(및 제5조)의 여성참정권 조항은 세계 최초는 아니지만, 미국(1920)이나 영국(1928)보다 앞선 것이었다. 그 배경에 대해 이준식은 “당시 중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던 헌법제정 움직임의 영향을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중국도 임시정부보다 뒤늦게 여성의 참정권을 헌법적 권리로 인정했기 때문이다”고 지적하면서 “헌장을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조소앙의 생각이 강력하게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추론하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이준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념적 지향」, 『인문과학연구』 제24집 72면). 조소앙이 초안을 만드는 등 문안작업을 주도했음은 본인이 「자전(自傳)」에 기록한 바도 있다(임형택, 앞의 글 31면 참조). 그러나 개신교 전도가 시작되기 전인 1860년에 동학이 창건하며 이미 핵심 교리이자 실천강령으로 남녀평등이 선포되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개신교가 조선 여성들의 권리신장에 기여한 공로를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교리 차원에서는 성평등을 강조하는 종교로서의 한계가 뚜렷했다.
  13. 이 표현이 사회주의 사상 및 운동 전체를 과소평가하는 의미로 읽혀서는 안 될 것이다. 다른 한편, 분단 이후 북녘의 공산주의는 주체사상의 대두와 더불어 척사파적 면모도 두드러지게 되었다는 해석 또한 가능하다.
  14. 그러고도 이것이 부분적인 목록에 불과함은 더 말할 나위 없다. 더구나 여기서는 사상가의 면모를 갖춘 독립운동가를 주로 거명했는데, 활동가가 아니었지만 소설가이자 사상가로서 벽초와 쌍벽을 이룬 염상섭 또한 변혁적 중도주의의 선구자로 꼽는 데 손색이 없을 것이다(도산과 함께 염상섭을 논한 강경석 「민족문학의 ‘정전 형성’과 3·1운동: 미당 퍼즐」, 이기훈 기획 『촛불의 눈으로 3·1운동을 보다』, 창비 2019, 206~210면 참조; 초본은 『창작과비평』 2018년 겨울호에 실림).
  15. 일제하 통일전선운동에 관한 한국 역사학계 최초의 본격 연구서라 할 강만길 『조선민족혁명당과 통일전선』(초판 화평사 1991, 증보판 역사비평사 2003; 『강만길저작집』 제7권, 창비 2018)은 김원봉 등의 조선민족혁명당을 주로 다루었다. “1930년대 후반기 이후 우리 민족운동전선이 민족의 해방을 한층 더 가까이 전망하면서 통일전선론의 수립과 통일전선운동의 실천에 최선을 다했다면, 1980년대 후반기 이후 우리 역사는 민족의 평화적 주체적 통일을 한층 더 가까이 전망하면서 그 올바른 방법론을 수립하고 실천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저작집 7권 11면)라는 초판 서문의 말은 지금도 곱씹어볼 만하다.
  16. 「대종경」 실시품 45, 『원불교전서』, 원불교출판사 1995, 344면. 도산 쪽에서는 당대에 기록을 남길 정황이 아니었으리라 짐작되고 실제로 확인되는 것이 없다. 가장 오래된 기록은 하와이 국민회의 기관지 『국민보』의 특파원이 익산 현지를 방문하고 쓴 기사인데(1956.6.20), 내용은 주로 소태산의 후계자 정산 송규 종법사로부터 들은 것으로 되어 있다(김도형 「소태산과 도산 안창호」,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공동학술대회 자료집 『원불교와 독립운동』, 2019.2.14, 32~35면).
  17. 백영서는 “〔막판에 전쟁협력 단체로 변질한 천도교 교단과 달리〕 동학의 개벽론을 계승하는 동시에 불교와도 결합한 불법연구회(해방 후 원불교의 전신)가 개인수양과 사회변혁을 동시수행하면서 물질개벽(곧 물질문명시대)에 상응하는 정신개벽을 제창한 문명전환운동은 당시 민족종교 가운데 이중과제의 기준에 어울리는 것으로 주목할 가치가 있다”(앞의 글 55면)고 평가한다. 원불교에 대한 나 자신의 생각은 졸저 『문명의 대전환과 후천개벽』(박윤철 엮음, 모시는사람들 2017)에 수록된 「문명의 대전환과 종교의 역할」 등, 그리고 이를 영어권 독자를 위해 수정 보완한 Paik Nak-chung, “Won-Buddhism and a Great Turning in Civilization,” Cross-Currents: East Asian History and Culture Review No. 22, March 2017, https://cross-currents.berkeley.edu/e-journal/issue-22/paik 참조.
  18. 아쉽게도 『창작과비평』 2019년 봄호의 특집을 빼고는 최근의 3·1운동 연구에서도 이중과제론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찾아보기 힘들다. 특집 중 임형택은 백영서(53~56면)나 이남주(68~70면)와 달리 이중과제를 직접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중시하고 특히 그의 ‘자본주의 소멸’론을 해석할 때 이중과제론적 문제의식에 접근한다(36면). 다만 그것을 자본주의 수용 이후의 극복이라는 단계론으로 보는지 아니면 이중과제론으로 보는지는 이 글에서 분명치 않은데, 소앙 자신의 입장은 이중과제론에 부합한다고 생각된다.
  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촛불혁명’으로 호명하는 것이 옳다는 주장을 나는 「‘촛불’의 새세상 만들기와 남북관계」, 『창작과비평』 2017년 봄호; 「‘촛불’이 한반도 평화를 만들어낼까」, 창비주간논평 2017.9.13; 「촛불혁명과 촛불정부」, 창비주간논평 2017.12.28 등에서 밝혀왔다. 영어권 독자를 위해 쓴 글로 Nak-chung Paik, “South Korea’s Candlelight Revolution and the Future of the Korean Peninsula,” The Asia-Pacific Journal Vol. 16 No. 3 (2018.12.1, https://apjjf.org/2018/23/Paik.html) 참조. 앞서 언급한 『창작과비평』 특집에서 백영서와 이남주는 모두 ‘촛불’을 혁명으로 부르는 데 동의하면서 각기 의미있는 후속논의를 펼친다(각기 58~59면과 62면, 67면).
  20. 김종엽 「촛불혁명에 대한 몇개의 단상」, 『분단체제와 87년체제』, 창비 2017, 469면.
  21. 최근의 글로는 졸고 「어떤 남북연합을 만들 것인가」, 『창작과비평』 2018년 가을호 및 위에 언급한 “South Korea’s Candlelight Revolution and the Future of the Korean Peninsula,” 특히 그 마지막 절 ‘Toward an Association of Korean States’ 참조. 국가주의와 국가개조 문제에 관해서는 졸고 「국가주의 극복과 한반도에서의 국가개조 작업」, 『창작과비평』 2011년 봄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