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회
<그 시절, 그 사람들>은 58회까지 방영되었고 63회분까지 녹화가 진행되었다. 형민의 이야기는 57회에 방영될 예정이었다. 녹화가 중단되었기 때문에 형민의 방송은 보류가 되었는데, 사회자는 편집을 해서 어떻게든 방영을 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63회를 녹화하는 동안 사회자는 단 한번도 지각을 한 적이 없었다. 늘 녹화 두시간 전에 도착해서 대본을 들고 건물 옥상에 꾸며놓은 정원으로 올라갔다. 거기 벤치에 앉아서 대본을 읽었다. 그리고 녹화 십분 전에 스튜디오로 내려와 따뜻한 홍삼차를 마셨다. 사회자가 처음으로 지각을 하자 담당 피디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고 기자들에게 말했다. 오는 도중 교통사고가 났거나, 욕실에서 쓰러졌거나, 몸살을 앓아 몸져누웠거나, 그런 줄 알았다고. 담당 피디는 막내 피디와 막내 작가를 사회자의 집으로 보냈다. 둘 다 차가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차를 내주었고, 운전이 서툰 막내 피디는 주차를 하다 주차장 기둥에 차를 들이받았다. 둘은 오피스텔 관리인을 불러 문을 열었다. 천장을 보고 똑바로 누워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잠을 자는 줄 알았다고 관리인은 말했다. 책상 위에는 이런 유서가 놓여 있었다. ‘이만하면 괜찮은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잘되지 않았습니다. 미안합니다.’ 형민은 유서를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시옷을 다른 자음보다 크게 썼는데, 그래서인지 사람이라는 글자가 튀어나와 보였다. 녹화를 할 때 사회자는 형민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지금 진구를 만나게 되면 무슨 말을 하고 싶나요? 대본에 없던 질문이었다. 글쎄요. 아무 말도 못할 것 같아요. 그런데 진구에게 이런 칭찬을 들었으면 좋겠어요. 이만하면 괜찮게 컸다고. 진구가 제 머리를 한번 쓰다듬어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말을 하고 형민은 자신의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말을 듣던 사회자가 갑자기 눈물을 흘려 녹화가 중단되었다. 밖으로 나갔다가 잠시 후 돌아온 사회자가 눈에 뭐가 들어갔다며 거짓말을 했다. 그 말이 사회자의 어느 부분을 건드린 것일까? 형민은 장례식장으로 가면서 그 질문을 하고 또 해보았다. 형민은 답을 알 수 없었고 그래서 장례식장 앞을 서성였다. 그러다 형민에게 섭외 전화를 했던 작가와 마주쳤다. 미안합니다. 형민은 사과를 하고는 도망을 쳤다. 저기요. 작가가 형민을 불렀지만 형민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형민은 뛰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들과, 로비에 서 있는 사람들과,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과, 형민은 어깨가 부딪쳤다. 그때마다 형민은 말했다.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마치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일부러 어깨를 부딪치는 사람처럼. 그러다 병원 응급실 쪽으로 119구급차가 달려가는 것을 보고는 멈추었다.
형민은 병원을 나와 걸었다. 갈림길이 나오면 형민은 오른쪽을 선택했다. 오른쪽. 오른쪽. 오른쪽. 그러다보면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딸이 어릴 적에 미로로 만들어진 집을 그린 적이 있었다. 그림의 주제가 앞으로 내가 살고 싶은 집을 그리는 거였다고 했다. 대문에서 집까지 가는 길이 미로로 되어 있었다. 술 취하면 내 집도 못 찾아가겠다. 형민이 그림을 보고 말했다. 미로 끝에 있는 집은 방이 한칸짜리였다. 형민의 아내가 방이 왜 하나뿐이냐고 묻자 딸이 대답했다. 나 혼자 살 거니까.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혼자 사니까 도둑이 무서워서 미로로 된 집을 만든 거라고 했다. 형민의 아내는 식탁 옆에 딸의 그림을 붙여 두었다. 형민의 아내는 딸의 발상이 재미있다고 했지만, 형민은 혹시 딸의 무의식 속에 집에 대한 공포가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걱정이 들기도 했다. 집에 오는 마음이 미로처럼 그렇게 엉켜 있는 것은 아닌지 하고. 한참을 걷다보니 오래된 주택가가 나왔다. 대문마다 문패가 달려 있었고, 대문 앞에는 빨간 고무통으로 만든 화분이 있었다. 형민은 살면서 한번도 문패가 있는 집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다. 형민은 문패에 적힌 이름을 읽어가며 길을 걸었다. 자신과 같은 이름은 없었지만 아내와 같은 이름은 있었다. 형민은 휴대폰을 꺼내 문패를 찍었다. 아내에게 전송하려다 말았다. 아내는 딸 이름이 들어간 간판을 보면 꼭 사진을 찍었다. 하영노래방. 하영옷수선. 하영이네분식. 하영유치원. 형민도 지방 출장을 갔다가 두번이나 하영이 들어간 간판을 발견했다. 하영칼국수와 하영교회. 하영칼국수에서 형민은 바지락칼국수를 사 먹기도 했다. 문패를 읽어가며 길을 걷다 형민은 장난감 자동차를 타고 놀던 아이와 부딪쳤다. 자동차에는 벤츠 로고가 붙어 있었다. 형민은 일부러 정강이를 붙잡고 아픈 시늉을 했다. “운전 똑바로 하셔야죠, 기사님.” 그렇게 말하자 아이가 자동차에서 내렸다. “미안해요, 아저씨.” 아이는 사과를 한다며 지렁이 모양의 젤리를 형민에게 주었다. 이게 약인가요? 형민이 웃으면서 묻자 아이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형민은 지렁이 젤리를 먹었다. 형민이 지렁이 젤리를 먹는 동안 아이는 자동차 앞 범퍼를 손으로 만져보았다. 이만하면 괜찮은 운전기사라며 형민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이가 자기 머리를 만졌다고 화를 내서 형민은 사과했다. 형민은 다시 길을 걸었다. 한참을 더 올라가니 대문마다 엑스표가 그어진 동네가 나왔다. 누군가 1톤 트럭 적재함에 흙을 메우고 농작물을 심어놓았다. 손가락만 한 크기로 싹이 났다. 자라서 뭐가 될지는 알 수 없었다. 형민은 싹 하나를 뽑아보았다. 뿌리를 깨끗하게 털어서 먹어보았다. 그래도 알 수 없었다. 뭔지 알 수 없어서 형민은 마음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열무일 거라고. 아직 마을을 떠나지 못한 어느 할머니가 심어놓은 거라고. 그걸로 김치를 담가 마지막으로 소면에 비벼 먹은 뒤에 이 마을을 떠날 거라고. 아니면 이색적인 장사를 하려는 어느 청년의 작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트럭 적재함을 텃밭으로 만들어 상추를 키운 다음 고객들에게 직접 뽑아가도록 하는 것. 트럭을 어느 아파트 단지 앞에 세워놓고 팔겠지. 한봉지에 삼천원이에요. 유기농입니다, 하면서. 두번째 상상이 더 재미있어서 형민은 트럭을 훔쳐 직접 팔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혹시나 하고 운전석을 열었는데 문이 열렸다. 형민은 운전석에 앉아보았다. 먼지가 쌓인 앞 유리에 누군가 바보라고 낙서를 해놓았다. 조수석에는 인형 하나가 버려져 있었다. 형민은 그 인형을 들어 조수석에 앉혔다. 그리고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바보라고 쓴 낙서를 가만히 보고 있자니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밖에서 낙서를 했다면 글자가 거꾸로 보여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낙서를 한 사람은 왜 바보라는 글자를 거꾸로 적은 것일까? 운전자에게 바보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 그랬을까? 형민은 핸들을 잡았다. 그리고 운전을 하는 척 핸들을 돌려보았다. 바보. 그래 나는 바보다. 진구였을 때 세살짜리 여동생은 진구를 바보라고 불렀다. 오빠, 바보. 모두들 진구만 보면 칭찬을 했지만 여동생만은 그러지 않았다. 진구의 등에 업혀 잠을 자던 여동생은 자면서 침을 흘리곤 했다. 동생을 업고 있으면 늘 등이 축축했다. 그때를 생각하자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왔다. 포대기 끈이 가슴을 조이는 것 같았다. 형민은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래도 숨이 쉬어지지가 않았다. 그때였다. 누군가 운전석 문을 열었다. “당신 누구요?” 남자가 소리쳤다. 형민은 차를 훔치려 한 게 아니라는 말을 하려 했다.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남자가 형민의 멱살을 잡고 차에서 끌어내렸다. “저, 저, 저는.” 형민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러나 다시 말문이 막혔다. “뭐야, 말더듬이야.” 남자가 형민을 떠밀었다. 그 바람에 형민은 넘어졌다. 남자가 바닥에 침을 한번 뱉고는 엑스표가 그려진 어느 집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차라리 맞았으면. 형민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때리면 가슴을 조이는 기분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러면 다시 말이 나올 것이다. 넘어지면서 땅을 잘못 디뎠는지 팔목이 시었다. 형민은 팔이 아프네,라고 말을 해보려 했다. 나는 기특한 아이였지,라고 말을 해보려 했다. 되지 않았다. 형민은 진구가 여동생에게 들려주던 자장가를 허밍으로 불러보았다. 그건 잘되었다. 형민은 왔던 길을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형민은 문패에 적힌 이름들을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여전히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형민은 자신과 똑같은 이름의 문패를 발견했다. 커다란 감나무가 있는 집이었다. 나무가 꽤 커서 감이 열리면 근사할 것 같았다. 가을이 되면 한번 와봐야겠다고 형민은 생각했다. 그 집 앞에 서서 형민은 재채기를 했다. 에취. 에취. 에취. 그렇게 재채기를 하다보면 언젠가 다시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형민은 생각했다. 문패에 적힌 이름을 불러보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겠다고. 집 안에서 밥 짓는 소리가 들렸다. 어렸을 때 형민은 자명종 시계가 없이도 똑같은 시간에 일어났다. 어머니는 늘 같은 시간에 아침밥을 지었고, 그래서 형민은 압력밥솥에서 증기 빠지는 소리에 눈을 떴다. 밥 짓는 소리가 형민에게는 자명종이었다. 세수를 하고 나오면 어머니는 형민의 엉덩이를 두드려주면서 칭찬을 해주었다. 우리 착한 아들. 벌써 일어났어. 그때를 생각하자 형민은 배가 고파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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