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신한반도체제의 한일관계를 위한 시민연대

 

 

남기정 南基正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 저서 『일본 정치의 구조 변동과 보수화』 『기지국가의 탄생』, 역서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등이 있음.

profnam@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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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은 한국 현대사의 커다란 결절(結節)을 이루는 해다. 1960년의 4·19민주혁명으로부터 60년, 청년 전태일의 분신 항거로부터 50년, 광주민주항쟁으로부터 40년, 최초의 남북총리회담으로부터 30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으로부터 20년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한국전쟁 발발 70년이 되는 해다. 해방 후 한국의 역사는 전쟁과 독재에 항거하여 평화와 민주주의를 갈망해온 역사였다. 코로나19 통제를 통해 K-방역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 속에서 축적된 한국 시민사회의 역량이었다. 국교정상화 이후에도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의 해석 차이 때문에 한일관계의 토대를 흔들어온 ‘1965년 체제’를 넘어 동북아시아에 평화질서를 구축하는 힘도 한국 시민사회에서 나온다.

시민들은 10년마다 평화와 민주주의의 이정표를 세워왔다. 1960년대 민주화운동은 1970년대 노동운동으로 확대되었고, 1980년대 반전평화운동으로 다시 확대되었다. 1987년 민주혁명과 노동자대투쟁으로부터 남북화해 기운이 움터 나왔다. 이를 배경으로 1990년에는 남북총리회담이 열렸다. 그리고 2000년에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고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실질적인 기원이다.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분투의 역사에서 2000년 남북정상회담은 특히 큰 의미를 지닌다. 한국전쟁 발발 반세기 만의 일이었다. 2000년 남북공동선언은 1998년 한일공동선언과 2002년 북일공동선언 사이에서 이 둘을 잇고 있다. 세개의 공동선언은 동북아시아 평화를 위한 세개의 축이다. 이때 한일-남북-북일로 이어지는 동북아시아 평화의 핵심 삼각형이 만들어졌다. 이 과정을 주도한 것은 평화와 민주주의에 대한 한국인들의 열망을 대변한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한일관계를 정상화하여 이를 밑변 삼아 남북화해의 탑을 쌓고, 북일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 그의 염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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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력은 민주화운동의 정통을 이어받은 노무현정부에 계승되었다. 2007년에는 10·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명박·박근혜 정권하에서 남북화해 프로세스는 중단되고 후퇴했다.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전쟁 위기가 고조되었다. 2015년부터는 한반도 상공을 전쟁 직전의 암운이 뒤덮는 ‘4월의 위기’가 연례행사가 되었다. 그해 북한 핵미사일 문제를 둘러싸고 남북, 그리고 북미 간에 긴장이 높아지는 가운데 한미합동훈련이 열렸기 때문이다. 2016년 4월, 위기는 더욱 고조되었다.

2016년 한미합동훈련에서는 B-52 폭격기와 F-22 전투기, 그리고 핵추진 잠수함 등 최첨단의 전략무기가 동원되었고, 북한 점령 및 참수작전 연습도 포함되었다. 이에 북한은 격렬히 반발하며 청와대를 ‘선제적인 정의의 작전 수행’의 1차적 타격 목표로 삼았고, ‘실전 배치한 핵탄두들을 임의의 순간에 쏴버릴 수 있게’ 항시적 준비태세에 들어갔다. 7월 한미가 사드(THAAD) 배치를 결정하자 9월에 북한은 5차 핵실험으로 대응했다. 유엔은 새로운 대북제재를 채택했다. 도발과 제재의 악순환이 구조화된 것이다.

그 속에서 촛불혁명이 일어났다. 박근혜 대통령의 직무정지로 방향전환의 가능성이 생겼지만 황교안 권한대행은 사드 배치를 강행했고, 나아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을 체결하면서 대결의 수위는 한층 높아졌다. ‘사드 가고 평화 오라’가 촛불혁명의 한 구호가 되었다. 2017년 4월에는 북미 간 치킨게임이 전쟁 전야 상태를 방불케 했다. 이후 2017년을 통틀어 북미 간 응수는 격화되어갔다. 5월 10일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해 만신창이의 내정과 외교를 정상화하면서 7월에 베를린에서 ‘신(新)한반도 평화 비전’을 제창했지만, 북미 간 말폭탄의 응수 속에서 그 목소리는 묻히는 듯했다. 11월 29일 끝내 북한은 대륙간탄도미사일의 시험발사를 단행했고, 미국은 ‘코피(bloody nose) 작전’을 내비치면서 일촉즉발의 상황은 연말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2018년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와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패럴림픽 참가로 사태가 급선회했다. 그 이유와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가능하지만 우리가 함께 기억하고 역사에 기록해야 할 것이 있다. 전쟁에 반대하고 화해와 평화를 희구하는 시민운동이 촛불혁명에 기름이 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진행형인 촛불혁명을 배경으로 4월에는 극적으로 남북정상회담이 실현되었고, 역사적인 판문점선언이 발표되었다. 1960년 4·19로 민주주의와 평화의 길을 열어젖힌 지 58년 만의, 2000년에 제1차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개시된 지 18년 만의 일이었다. 2018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시작되었다.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처럼 보였던 평화프로세스는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제2차 북미정상회담이 성과 없이 끝나면서 발걸음이 엉키기 시작했다. 그 틈을 일본 아베 정권이 치고 들어왔다. 6월 30일, 판문점에서 남·북·미 정상이 회동하여 가까스로 평화프로세스의 동력을 되살려놓은 바로 다음날이었다. 2019년 7월 1일, 아베 정부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산업에 불가결한 주요 소재부품의 대(對)한국 수출규제 조치를 취했고, 8월에는 수출심사 우대국 목록(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을 삭제했다. 일본의 일방적인 조치로 시작된 ‘한일무역전쟁’에 문재인정부는 총력으로 대응했다. 국민은 ‘보이콧 아베’(일본 상품 불매운동)로 항거했다. 무기만 들지 않았을 뿐 가히 총력전이었다. ‘1965년 체제’ 극복을 위해 일본의 도전에 맞서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2019년은 3·1독립선언과 임시정부 수립 100년의 해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3·1절 100주년 기념연설에서 새로운 100년의 과제로 신한반도체제 구축을 설정했다. 신한반도체제는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와 동북아시아 플러스 책임공동체, 동북아시아 평화플랫폼 등을 종합하는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한반도가 전쟁과 대립의 무대에서 평화와 협력의 무대로 변화할 때 만들어지는 새로운 질서로 이해된다. 이를 위해서는 동북아시아에 전쟁 논리를 강요하는 ‘두개의 전후(戰後)’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된다. 냉전이라는 이름으로 지속된 2차대전의 전후와 정전의 이름으로 지속된 한국전쟁의 전후가 한반도에서 중첩되어 전쟁의 위기를 고조시켜왔다.1 두 ‘전후’를 극복하지 않고서는 동북아시아에 평화는 오지 않는다.

‘두개의 전후’가 해체되기 시작한 것도 2018년이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진행되는 가운데, 냉전체제 위에 성립한 한일 1965년 체제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4월의 판문점선언과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에 대한 10월의 대법원 판결은 불가분의 일체다. 신한반도체제에 어울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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