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오기영의 해방 직후 사회비평활동
한기형 韓基亨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교수. 저서로 『한국 근대소설사의 시각』 등이 있음. khhan112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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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적·백 두 세계의 냉정전(冷靜戰)은 날을 따라 가열해가고 있다. 이 두 세계는 각기 자기 빛깔과 같은 조선의 완전 일색을 희망한다. 그러나 우리는 적색세계의 부자유를 원치 않고 백색세계의 착취도 원치 않는 바이다. 따라서 우리는 흰 백합도 청아한 동시에 붉은 장미의 정열적 미소에도 매혹을 아니 느끼지 못한다. 진실된 경제적 민주와 정치적 자유를 누리는 조선이 된다면, 붉은 꽃, 흰 꽃은 제각기의 향기를 발하며 제각기의 형색으로 경염(競艶)할 것 아닌가. 이러한 적·백의 조화를 우리가 생각하는 것은 과연 부당한 일인가?
(오기영 「적색과 백색」, 『삼면불』, 성각사 1948, 155면)
동전(東田) 오기영(吳基永, 1909~?)은 잊혀진 인물이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잊혀진 것이 아니라 기억되지 못한 것이다. 한 인간의 이름이 역사에 남는 것은 전적으로 후인들의 기억에 달려 있다. 역사의 구성이 기억하는 사람의 자의적 관심과 주관적 척도에 달려 있으니 결국 후인들의 태도와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가 관건적 문제이다. 기억의 거세를 강요당해온 한국현대사의 구성에서 이러한 문제는 더욱 중요하다.
오기영이 주로 활동한 해방정국에는 새로운 국가건설의 문제가 당면한 핵심적 과제였다. 그러나 민족국가 수립이란 동일한 문제의 이해방식은 전혀 이질적인 두 개의 이념에 긴박되어 있었고, 그 두 이념의 자장을 벗어난 사고는 존립의 기반조차 얻기 어려웠다. 사회주의 혁명과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체제로의 편입이란 두 길이 현실적 선택방안으로 제시된 것이다. 그리고 미·소 냉전 대립의 저 압도적 압박은 그 두 가지 이외의 길에 대한 대안적 사고를 어렵게 만들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사유의 단순화를 야기한 강대국의 대립이 사고의 단순화뿐 아니라 제3의 길에 대한 관심 자체의 폐기를 은연중 강요했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좌와 우를 아우르고 또 넘어서는 민족 주체의 정치철학은 두 개의 이념 가운데 어느 한쪽으로 귀속되어 이해되거나 현실적이지 못한 공상적인 논의로 평가되었다. 역사의 기록자들은 그들을 ‘중간파’로 분류하였고 당대 현실운동의 토대에 근거하지 않은 이상주의자 그룹으로 규정하였다.1 다수파의 언어가 아닌 소수파의 언어, 역사는 그들의 말에 무관심했고 귀기울이지 않았던 것이다.
오기영은 해방정국의 짧은 시간 속에서 정치평론집 『민족의 비원』(서울신문사 1947), 『자유조국을 위하여』(醒覺社 1948), 수기집 『사슬이 풀린 뒤』(성각사 1948), 수필집 『삼면불(三面佛)』(성각사 1948) 등의 집필을 통해 좌·우의 상호 존재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민족의 이념으로 그것을 통합하려고 노력한 인물이다. 그는 현실운동의 선두에 있지는 않았지만 지식인의 시대적 소임에 결코 게으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의 발언이 해방되고 50년이 훨씬 지나도록 세인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그의 말이 소수파의 언어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수의 생각을 보편타당한 것으로 믿으려 했던 우리 현대사의 경화된 관념체계가 그러한 인물들에 대한 관심을 거부하도록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이 글의 의도는 그러한 역사적 소수의 언어 속에 살아 있는 시대의 진실을 더듬어보는 데에 있다. 이를 통해 역사의 여러 국면에서 대세를 거슬러 자신의 믿음을 말했던 인물들의 삶이 기억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면 다행이겠다.
오기영은 흥미로운 가족사의 배경을 지닌 인물이다. 그는 1909년 황해도 배천읍에서 태어났다. 부친 오세형(吳世炯)은 읍내에서 규모있는 상점을 경영했는데 3·1운동 당시 배천읍내 만세시위 주모자의 한사람이었다. 이러한 오세형의 민족주의적 성향이 오기만(吳基萬), 오기영, 오기옥(吳基鈺) 세 아들의 의식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형 오기만은 1930년을 전후한 시기에 윤철(尹哲)이라는 가명으로 상해한인청년동맹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한 사회주의 운동가이다. 1931년 여름, 국내에 들어와 공산당 재건운동을 포함한 지하활동에 종사했고, 1934년 상해에서 체포되어 5년형을 언도받는다. 이후 오기만은 감옥에서 얻은 폐결핵으로 인해 안타까운 죽음을 맞는데 수기집 『사슬이 풀린 뒤』에 그 전말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아우 오기옥은 1943년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했다. 일제 말기 치안유지법으로 8개월간 복역하다 해방과 함께 출옥, ‘조선민주청년동맹’의 간부로 활동했고 6·25 와중에 경주에서 처형되었다고 한다. 이들 형제뿐만 아니라 오기영의 매제 강기보(康基寶)도 제3차 고려공산당 평안남북도책으로 활동한 이력이 있는 인물이다.2
가족들이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한 것과는 달리 오기영은 민족주의 운동에 가담하여 안창호·조만식·오동진 등 서북 계열의 기독교 민족운동가 그룹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1929년 수양동우회에 입단하고 1937년에는 동우회 사건에 연루, 검거되기도 했다. 10여년간 재직하던 동아일보에서 퇴사당한 이유도 그 여파의 결과로 추측된다. 사회주의와 기독교, 민족주의를 동시에 포괄했던 가족사와 그 자신의 경험은 해방 이후 오기영의 의식내용을 규정하는 핵심적 기제로 작용한다.3 “가난하고 세력없는 계급의 동지였던 예수의 정신이 가난하고 세력없는 계급을 위해 싸울 때에는 혁명적이지마는 일단 권세있는 착취계급과 타협하고 그 총검의 비호를 입을 때는 예수는 천국에서 내려다보거나 말거나 이들은 완전한 반동세력으로서 발전”(「예수의 조선」, 『민족의 비원』 249면)한다는 오기영의 기독교관 속에는 그러한 이념 형성의 중층성이 반영되어 있다.
오기영은 도산 안창호의 최후를 끝까지 지킨 몇 안되는 인물 가운데 하나인데 이를 통해 안창호에 대한 오기영의 신뢰를 짐작할 수 있다. 하나의 에피소드이긴 하지만, 도산의 죽음에 대한 오기영의 다음과 같은 회고는 민족지도자의 최후와 관련된 흔치 않은 기록으로 기억해둘 만하다.
이날 낮 조각가 이국전(李國銓)군이 와서 선생
- 중간파라는 단어는 해방정국의 정치이념을 구분하기 위한 개념으로는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범주에 포함된 인물들이 기회주의자, 혹은 애매한 인식의 소유자라는 인상을 갖게 한다. 따라서 한 인간의 삶을 이해하는 데 잘못된 선입관을 주입할 가능성이 있다. ↩
- 오기영의 가족관계와 이력에 대해서는 성균관대학교 출판부가 재간행한 『사슬이 풀린 뒤』(2002)의 ‘동전 오기영 연보’를 참조할 것. 참고로 성균관대 출판부는 최근 『사슬이 풀린 뒤』 외에 『진짜 무궁화』(『삼면불』의 개제)와 『민족의 비원』 『자유조국을 위하여』 등 오기영의 저서 네 권을 다시 발간하였다. ↩
- 오기영은 민족주의자 부친과 사회주의자 형제들 사이에서 겪은 정신적 갈등을 “내 아버지는 우익에 속한 인물이요, 내 아우는 좌익에 속해 있다. (…) 그러나 비통한 심정이거니와 나는 아버지의 가는 길, 아우의 가는 길이 모두 조국의 독립과 번영을 위하여 반드시 유일무이한 똑바른 길이 아닌 것을 알고 있다. 하물며 이 두 가지 길은 모두 조국독립에 통해 있기보다는 미국과 소련에 통해 있음을 간취할 때에 우리가 이 두 가지 사상의 조화에서만 독립과 번영의 가능을 믿는 한 이들의 가는 길은 더욱더 독립과는 거리가 멀어가고 있음을 슬퍼하는 바이다”(『민족의 비원』 4면)라고 술회한 바 있다. ↩